조홍근
40여년 족보·역사 연구
[저서] 마고할미로부터 7만년/홍익인간 7만년 역사/천부경 인간완성-제1부 천부경과 음양오행 ·역원리 이해 등
<고조선 문자> 검증역 · 허대동 저. 이민화 감수 / 공학사·법학사·언론학사·인문학사(중문학·영문학·국문학)
해달별문화원 · 천부역사태학원 대표 / 민족회의 상임부대표 / 민족회의 역사광복군 총사령 / 기천검학 범사 / 참한역사신문협의회 감사 / 한뿌리사랑세계모임 자문위원 / 도선풍수지리신문 편집인 /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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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서 동이전(東夷傳) 기록의 소평(小評)과 연대기 정리
<삼한(三韓)·신라(新羅)>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진서(晉書), 양서(梁書), 수서(隋書), 북사(北史), 남사(南史),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구오대사(舊五代史),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실린 동이전(東夷傳), 동이열전(東夷列傳) 중 우선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 弁辰)의 삼한(三韓)과 신라(新羅)에 관한 기록을 검토하여 그 사건별 기록의 정확성 여부와 가치를 간략히 평가하고, 주요 사건들을 연대기로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일부 역사연구가들이 이들 동이전의 기록들이 아주 정확하다고 믿거나, 우리 측 사서에는 없는 기록을 싣고 있는 것처럼 매우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을 법 한데, 혹시라도 이러한 맹신적 사례를 우려하여 이들 동이전의 기록들이 역사 사실적으로 과연 정확한 것인지, 주요 기사들의 사건이 과연 어느 시기에 있었던 것인지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원문은 생략하기로 한다.
중국사서 동이전 기록의 평가 및 연대기
구당서 열전 신라(舊唐書 列傳 新羅)
(1) 구당서(舊唐書) 기록 개요
구당서(舊唐書)는 당 고조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21명의 황제(皇帝)가 통치한 290년 동안의 당나라(唐) 정사(正史)로 이십사사(二十四史)의 하나이다. 서기940년에 편찬을 시작해 서기945년에 완성되었다. 5대 후진(後晉)의 유후(劉昫)가 일을 총괄하고 장소원, 가위, 조희 등이 편찬하고 조영이 감수하였다. 처음에는 『당서』라 했으나, 송대(宋代)에 『당서』를 다시 편찬하였기 때문에 『구당서』라 부르게 되었다.
(2) 구당서(舊唐書) 열전 신라(新羅)
신라국(新羅國)은 본래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대(漢代)의 낙랑(樂浪) 땅에 있으니,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 연하여 있고, 서쪽은 백제(百濟)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고려(高麗)와 인접하였다. 동서로 1천리, 남북으로 2천리이다. 성읍(城邑)과 촌락(村落)이 있다. 왕(王)이 사는 곳은 금성(金城)으로, 둘레가 7·8리이다. 위병(衛兵)은 3천명으로, 사자대(獅子隊)를 설치하였다. 문무관(文武官)은 모두 17등급이 있다. 그 나라의 왕(王) 김진평(金眞平)은 수(隋) 문제(文帝) 때에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을 제수(除授)받았다. 무덕(武德) 4년(서기621; 新羅 眞平王 43년)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다. 고조(高祖)는 친히 노고를 치하하고,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郞) 유문소(庾文素)를 사신(使臣)으로 보내어 새서(璽書) 및 그림병풍과 비단 3백단(百段)을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조공(朝貢)이 끊이지 않았다.
풍속(風俗)· 형법(刑法)· 의복(衣服)은 고려(高[구,句]麗)· 백제(百濟)와 대략 같으나, 조복(朝服)은 흰색을 숭상한다. 산신(山神)에게 제사하기를 좋아한다. 식기(食器)는 버드나무 그릇을 쓰는데, 구리그릇과 질그릇도 있다. 국인(國人)은 김(金)· 박(朴) 두 성씨가 많으며, 다른 성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 원일(元日)을 중히 여겨서 서로 [이 날을] 축하하고 연회를 베푸는데, 해마다 이 날에는 일월신(日月神)에게 절을 한다. 또 8월 15일을 중히 여겨서 풍악을 울리고 연회를 베풀며, 군신(群臣)을 모아 궁정(宮庭)에서 활쏘기를 한다. 부인들은 머리를 틀어 올려서 비단 및 구슬로 치장하는데, 머리털이 매우 길고 아름답다.
고조(高祖)는 이미 해동(海東)의 세 나라가 오래전부터 원한이 맺혀 서로 번갈아 가며 공격을 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들은 같은 번국(藩國)으로서 힘쓸 것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라 하여, 이에 그 사신(使臣)에게 원한을 맺게 된 까닭을 물으니, “지난 날 백제(百濟)가 고려(高麗)를 치러 갈 적에 신라(新羅)에게 구원을 청하였는데, 신라(新羅)는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국(百濟國)을 쳐부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원수가 되어 늘 서로 공벌(攻伐)을 하게 되었으며, 신라(新羅)가 백제(百濟)의 왕(王)을 잡아다 죽였으므로 원한은 이로 말미암아 비롯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무덕(武德) 7년(서기624년; 新羅 眞平王 46년)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김진평(金眞平)에게 주국(柱國)을 제수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에 책봉하였다.
정관(貞觀) 5년(서기631년; 新羅 眞平王 53년)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여악공(女樂工) 두 사람을 바쳤는데, 모두 머리가 새까만 미인(美人)들이었다. 태종(太宗)이 시신(侍臣)에게, “짐(朕)이 들으니 성색(聲色)을 즐기는 것은 덕(德)을 좋아함만 같지 못하다고 한다. 그리고 산천(山川)으로 가로 막혀 있으니, 고향을 그리워 할 것도 알 수 있다. 얼마 전에 임읍(林邑)에서 바친 흰 앵무새도 오히려 고향을 그리워할 줄 알아 제 나라로 보내 줄 것을 하소연하였다. 새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인정(人情)에 있어서랴! 짐(朕)은 그들이 멀리 떠나 와서 반드시 친척을 그리워할 것을 불쌍히 여긴다. 마땅히 사자(使者)의 편에 보내어 제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 해에 진평(眞平)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그의 딸 선덕(善德)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 종실(宗室)로서 대신(大臣)인 을제(乙祭)가 국정(國政)을 총괄하여 맡아 보았다. 조서를 내려 진평(眞平)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물(賻物) 2백단(段)을 내려 주었다.
(이하 생략. 주로 조공과 책봉 기록임. )
(3) 기록의 검토 및 비평
신라국(新羅國)은 본래 변한(弁韓)의 후예이다(新羅國,本弁韓之苗裔也)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변한은 진한(辰韓)의 명백한 오기가 된다. 이처럼 중국사서의 동이전 기록은 오기가 종종 있어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 때로 심각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곧이곧대로 믿을 바가 못 된다. 그 나라는 한대(漢代)의 낙랑(樂浪) 땅에 있다(其國在漢時樂浪之地)라고 한 기록도 이전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오기로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아니한다.
서기594년 이후 서기841년까지 조공과 책봉 관계를 중심으로 신라와 관련된 사실을 간략히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며, 그 외 신라 내부의 사정에 관한 것은 신라의 기록 등을 참고하여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4) 사건별 연대기
서기594년 수 문제 때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16년)을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을 삼았다(其王金真平,隋文帝時授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서기621년 신라는 당나라 무덕(武德) 4년(新羅 眞平王 43년)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고, 고조(高祖)는 친히 노고를 치하하고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郞) 유문소(庾文素)를 사신(使臣)으로 보내어 새서(璽書) 및 그림병풍과 비단 3백단(百段)을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조공(朝貢)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서 당나라가 보냈다는 그림병풍을 선덕여왕이 보고 벌과 나비가 없어 함께 보내온 모란씨를 심으니 과연 향기가 없었다라고 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덕만공주가 여왕이 아닌 약 42세 공주시절의 일이다.
서기624년 당나라 고조(高祖)는 무덕(武德) 7년(新羅 眞平王 46년)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김진평(金眞平)에게 주국(柱國)을 제수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에 책봉하였다.
서기631년 신라가 당나라 정관(貞觀) 5년(新羅 眞平王 53년)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여악공(女樂工) 두 사람을 바쳤는데, 당나라는 이들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서기631년에 진평왕(眞平)이 죽고 아들이 없어서 그의 딸 선덕(善德)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 종실(宗室)로서 대신(大臣)인 을제(乙祭)가 국정(國政)을 총괄하여 맡아 보았다. 당나라는 조서를 내려 진평(眞平)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물(賻物) 2백단(段)을 내려 주었다. 여기서 신라 진평왕은 실제 632년 1월에 사망하였는데 앞당겨 적고 있다.
(이하 생략. 서기841년까지 주로 조공과 책봉 기록임.)
신당서 열전 신라(新唐書 列傳 新羅)
(1) 신당서(新唐書) 기록 개요
신당서(新唐書)는 북송 인종이 구당서(舊唐書)의 내용을 보완하고자 구양수 등에 명하여 서기1044년부터 서기1060년에 걸쳐 완성한 당나라의 역사서로 이십사사의 하나이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편찬시기가 100년이라는 차이가 나고 그 사이 원사료가 많이 소실되었는데 지나치게 간략하고 문장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 등으로 인해 구당서보다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
(2) 신당서(新唐書)기록의 평가
신당서(新唐書)에서 “아들 문왕(文王)과 아우 이찬간(伊贊干) 춘추(春秋)를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 문왕(文王)에게는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제수(除授)하고, 춘추(春秋)에게는 특진(特進)을 제수(除授)하였다(貞觀......二十一年......明年,遣子文王及弟伊贊干春秋來朝,拜文王左武衛將軍,春秋特進).”라고 한 것은, 구당서에서 “아우 국상(國相) 이찬간(伊贊干) 김춘추(金春秋) 및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 조서를 내려 춘추(春秋)에게는 특진(特進)을 제수(除授)하고, 문왕(文王)에게는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제수(除授)하였다(貞觀......二十二年,真德遣其弟國相、伊贊干金春秋及其子文王來朝。詔授春秋為特進,文王為左武衛將軍)”이라고 한 것의 명백한 오기가 된다. 여기 문왕은 김춘추의 일곱 아들 중 하나인 서자(庶子)인데, 신당서는 문왕을 마치 진덕여왕의 아들인 것처럼 순서를 바꾸어 기록하고 있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당서가 구당서의 기록을 보완하였다고는 하나 오히려 문맥이 통하지 아니하는 명백한 오류가 있어 구당서보다 허술한 측면이 있다.
참고자료
原著 一始堂主人 桂延壽, 校閱 海鶴 李沂, 定本 桓檀古記, 한뿌리, 2005,
임승국 번역.주해,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1987
二十五史全文檢索系統(網絡版)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삼국사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중국정사조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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