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근
40여년 족보·역사 연구
[저서] 마고할미로부터 7만년/홍익인간 7만년 역사/천부경 인간완성-제1부 천부경과 음양오행 ·역원리 이해 등
<고조선 문자> 검증역 · 허대동 저. 이민화 감수 / 공학사·법학사·언론학사·인문학사(중문학·영문학·국문학)
해달별문화원 · 천부역사태학원 대표 / 민족회의 상임부대표 / 민족회의 역사광복군 총사령 / 기천검학 범사 / 참한역사신문협의회 감사 / 한뿌리사랑세계모임 자문위원 / 도선풍수지리신문 편집인 /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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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서 동이전(東夷傳) 기록의 소평(小評)과 연대기 정리
<삼한(三韓)·신라(新羅)>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진서(晉書), 양서(梁書), 수서(隋書), 북사(北史), 남사(南史),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구오대사(舊五代史),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실린 동이전(東夷傳), 동이열전(東夷列傳) 중 우선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 弁辰)의 삼한(三韓)과 신라(新羅)에 관한 기록을 검토하여 그 사건별 기록의 정확성 여부와 가치를 간략히 평가하고, 주요 사건들을 연대기로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일부 역사연구가들이 이들 동이전의 기록들이 아주 정확하다고 믿거나, 우리 측 사서에는 없는 기록을 싣고 있는 것처럼 매우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을 법 한데, 혹시라도 이러한 맹신적 사례를 우려하여 이들 동이전의 기록들이 역사 사실적으로 과연 정확한 것인지, 주요 기사들의 사건이 과연 어느 시기에 있었던 것인지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원문은 생략하기로 한다.
중국사서 동이전 기록의 평가 및 연대기
후한서 동이열전 한(後漢書 東夷列傳 韓)
(1) 후한서 기록 개요
남조(南朝) 송(宋)나라 범엽(范曄: 398~446)이 지은 후한서(後漢書)는 중국 이십사사 중의 하나로 후한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기전체로 쓰였다.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되어 있다. 이 중 본기와 열전은 범엽이 쓴 후한서의 것이고, 지(志)는 사마표가 쓴 속한서(續漢書)의 것이다. 다루는 시대는 25년(건무 원년)부터 220년(건안 25년)까지의 역사이다.
(2) 후한서 동이열전 한(韓)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辰)이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 남쪽은 왜(倭)와 접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하여 있다. 변진(弁辰)은 진한(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倭)와 접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 백제(伯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가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 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三韓)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모든 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마한(馬韓)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 큰 밤이 산출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며,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는 5尺이나 된다. 읍락(邑落)에 잡거하며 역시 성곽이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이 마치 무덤 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부분에 있다. 무릎 굽혀 절할 줄을 알지 못하며, 장유(長幼)의 차례와 남녀의 분별 따위의 예가 없다. 금·보화·비단·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소, 말을 탈 줄을 모르고, 오직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감하여 젊은이들 중 집짓는 일 하는 사람은 매번 밧줄로 등의 가죽을 꿰어 큰 나무를 매어 달고 소리를 지르는데 건장하다고 한다.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 지어 노래 부르며 춤춘다. 춤출 때에는 수십 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의 추수를 끝내고는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여러 국읍에는 각각 한 사람이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재하는데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소도(蘇塗)를 만들어 거기다가 큰 나무를 세우고서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남쪽 경계는 왜(倭)에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도 있다.
진한(辰韓)은 늙은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망명인으로서, 힘든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오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한다.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를 부르기를 도(徒)라 하여 진나라 말과 유사한 고로 혹 이르기를 진한(秦韓)이라 한다. 성책(城柵)과 옥실(屋室)이 있다. 여러 작은 별읍들은 각각 거수(渠帥)를 두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 토지가 비옥하고 아름다워 오곡에 마땅하다. 잠상(蠶桑)을 알고 겸포(縑布)를 지으며, 우마(牛馬)를 타고 혼인의 예법이 있다. 길 가는 자들은 길을 양보한다. 나라에 철(鐵)이 나고 예(濊), 왜(倭), 마한(馬韓)에서 나란히 사 간다. 무릇 모든 무역에는 철을 화폐로 삼는다. 풍속으로 가무(歌舞), 음주(飲酒), 고슬(鼓瑟)을 좋아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모두 돌로 누른다.
변진(弁辰) 사람들은 진한(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변진(弁辰)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의복은 깨끗하고 형법은 엄격하다. 변진은 왜국(倭國)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문신(文身)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 과거에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準)의 후손이 절멸(絶滅)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自立)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
건무(建武) 20년(서기44년; 百濟 多婁王 17년)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光武帝)는 소마시(蘇馬諟)를 봉(封)하여 한(漢)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朝謁)하도록 하였다.
영제(靈帝) 말년에 한(韓)과 예(濊)가 모두 강성해져 군현(郡縣)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한(韓)으로 도망하여 유입(流入)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한의 서쪽 바다의 섬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고 머리를 깎으며, 가죽 옷을 입는데 상의만 입고 하의는 입지 않는다.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한(韓)의 나라 안에서 물건을 사고판다.
(3) 기록의 평가
시기적으로 보면, 진한(辰韓)은 늙은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망명인으로서 힘든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오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한다(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라는 기록은, 서기전209년에 단군조선의 유민들이 서라벌로 와서 (후)진한을 건국한 것을 두고서 하는 것이나, 실제로는 서기전194년에 기준왕이 마한으로 와서 마한왕이 되었고, 그 이후 목지국(目支國. 月支國과 目支國 중 하나는 오기에 해당)의 기탁(箕卓)이 제2대 마한왕이 되어 진한과 변한을 통할한 것이 되어 그 선후가 바뀐 기록이 된다. 즉, 서기전209년에 서라벌에서 (후)진한이 먼저 건국이 되었고, 북부여의 제후국이던 번조선의 기준왕이 마한 땅 금마로 와서 마한왕이 된 것은 서기전194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위 중국사서의 동이전 기록은 정확하지 못하여 맹신하는 것은 금물이다.
서기전238년 단군조선이 사실상 망하면서 진한의 서쪽 지역에 해당하는 만리장성 부근의 단군조선 유민들이 동쪽으로 이동·이주할 때 진(秦)나라의 폭정이나 노역을 피하여 번조선에 망명한 연. 제. 조의 백성들도 많았으며, 소백손이 이끌던 조선유민들에 이들 연. 제. 조 유민들도 다소 섞여 있었던 것으로 사료되는데, 마치 진나라의 노역을 피하여 온 망명인들이 진한(辰韓)의 주축세력이 되는 것처럼 기술하면서 진시황의 나라인 진(秦)을 끌어다가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설사 진한(秦韓)으로 적었다하더라도 단군조선의 진한(眞韓)이나 후삼한의 진한(辰韓)이라는 소리와 같은 소리로서 다른 글자를 쓴 표기일 뿐이다. 이 후한서는 아전인수격으로 진한(辰韓)을 굳이 진시황의 진(秦)나라와 연관시켜 단군조선의 유민이라는 사실을 희석시키고,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식으로 저들의 화하인(華夏人)을 내세우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렇게 중국사서의 동이전 기록은 의도적인 아전인수의 견강부회 식으로 기록하는 경우가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4) 사건별 연대기
서기전209년에 단군조선 진한(眞韓) 땅 소성(蘇城) 출신의 소백손(蘇伯孫)이 조선유민들을 이끌고 서라벌로 와서 정착하여 진한(辰韓)을 건국하였다<珍州蘇氏 族譜 참조>.
서기전194년에 번조선왕 기준(箕準: 서기전221년~서기전194년)이 위만(衛滿)의 속임으로 나라를 잃고 마한 땅의 금마(익산)로 망명하여 마한왕(馬韓王)이 되었다<한단고기 태백일사 번한세가 참조>.
서기전193년에 기준왕이 1년 만에 죽고 중마한(中馬韓)인 월지국(月支國. 稷山)의 기탁(箕卓)이 제2대 마한왕이 되었으며 이후 서기9년에 백제에 망하기까지 대대로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통할하는 진왕(辰王)이라 불리었다<한단고기 북부여기, 기씨 족보 마한세기 참조>. 여기 월지국(月支國)은 목지국(目支國)으로도 기록되는데 하나는 오기가 될 것인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에서는 월지국(月支國)이라 기록하고 있어 목(目)이 월(月)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서기44년 후한(後漢) 건무(建武) 20년(百濟 多婁王 17년)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는 소마시(蘇馬諟)를 봉(封)하여 한(漢)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朝謁)하도록 하였다.
서기180년경 후한(後漢) 영제(靈帝: 서기168~189년) 말년에 한(韓)과 예(濊)가 모두 강성해져 군현(郡縣)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한(韓)으로 도망하여 유입(流入)되는 경우가 많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
(1) 삼국지 기록 개요
삼국지(三國志)는 서진(西晉)의 진수(陳壽, 233년 ~ 297년)가 쓰고, 동진(東晉) 말에서 송(宋) 초의 정치가인 배송지(裴松之, 372년 ~ 451년)가 주석을 달아 내용을 보충한 사찬(私撰) 역사서이다. 후한 말기부터 서진 초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삼국지는 사기, 한서, 후한서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리며 이십사사(二十四史) 중의 하나이다. 총 6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토착생활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무명(綿布)을 만들었다. 각각 장수(長帥)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하였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城郭)이 없었다.
원양국·모수국·상외국·소석색국·대석색국·우휴모탁국·신분고국·백제국·속로불사국·일화국·고탄자국·고리국·노람국·월지국·자리모로국·소위건국·고원국·막로국·비리국·점리비국·신흔국·지침국·구로국·비미국·감해비리국·고포국·치리국국·염로국·아림국·사로국·내비리국·감해국·만로국·벽비리국·구사오단국·일리국·불미국·지반국·구소국·첩로국·모로비리국·신소도국·막로국·점랍국·임소반국·신운신국·여래비리국·초산도비리국·일난국·구해국·불운국·불사분사국·원지국·건마국·초리국 등 모두 5십여 국이 있다. 큰 나라는 만 여가(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數千家)로서 총 10여만 호이다.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을 통치한다. 신지(臣智)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신운견지보 안사축지 분신리아불례 구사진지렴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에는 위솔선·읍군·귀의후·중랑장·도위·백장이 있다.
후(侯) 준(準)이 참람되이 왕(王)이라 일컫다가 연(燕)나라에서 망명한 위만(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위략(魏略)에 적기를, 옛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王)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공하여 주(周) 왕실(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大夫) 례(禮)가 간(諫)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례(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燕)은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몽염(蒙恬)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후(朝鮮王)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秦)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략상 진(秦)나라에 복속(服屬)은 하였으나 조회(朝會)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否)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진(陳勝)과 항(項羽)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제,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준(準)에게 망명(亡命)하므로, 준(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盧綰)으로 연왕(燕王)을 삼으니, 조선(朝鮮)과 연(燕)은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관(盧綰)이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도망간 뒤,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준(準)에게 항복하였다.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中國)의 망명자(亡命者)를 거두어 조선(朝鮮)의 번병(藩屏)이 되겠다고 준(準)을 설득하였다. 준(準)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博士)에 임명하고 규(圭)를 하사(下賜)하며, 백리(百里)의 땅을 봉(封)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만(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準) 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숙위(宿衛)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準)을 공격하였다. 준은 만(滿)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그의 근신(近臣)과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위략(魏略)에 적기를, 준(準)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한씨(韓氏)라는 성(姓)을 사칭하였다. 준(準)은 해외에서 왕(王)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준(準)의 후손은 절멸(絕滅)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朝謁)하였다. 위략(魏略)에 적기를, 일찍이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右渠)에게 간(諫)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朝鮮)에 조공하는 번국(藩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王莽)의 지황(地皇) 연간에, 염사착(廉斯鑡)이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어 낙랑(樂浪)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한인(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물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한(漢)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戶來)이다. 우리들 천 5백 명은 재목(材木)을 벌채하다가 한(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착(鑡)이 “나는 한(漢)나라의 낙랑(樂浪)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호래(戶來)는, “좋다.” 하였다. 그리하여 착(鑡)은 호래(戶來)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含資縣)으로 갔다. 함자현(含資縣)에서 군(郡)에 연락을 하자, 군(郡)은 착(鑡)을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辰韓)에 들어가서 호래(戶來)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 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 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착(鑡)이 이때 진한(辰韓)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5백 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樂浪)이 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라고 하니, 진한(辰韓)은 “5백 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만 5천명과 변한포(弁韓布) 만 5천 필을 내어놓았다. 착(鑡)은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군(郡)에서는 착(鑡)의 공(功)과 의(義)를 표창하고, 관책(冠幘)과 전택(田宅)을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안제(安帝) 연광(延光) 4년(서기125년; 百濟 己婁王 49년)에 이르러서는 그로 인하여 부역(賦役)을 면제받았다.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기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郡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연간(서기196~220년; 百濟 肖古王 31~仇首王 7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
경초(景初) 연간(서기237~239년; 百濟 古爾王 4~6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풍속은 의책(衣幘)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들도 군(郡)에 가서 조알(朝謁)할 적에는 모두 의책(衣幘)을 빌려 입으며, 자신의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된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하여 낙랑(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臣智)과 한인(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태수(太守) 궁준(弓遵)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遵)은 전사하였으나 2군은 마침내 한(韓)을 멸(滅)하였다. 그 풍속은 기강이 흐려서, 제국(諸國)의 도읍에 비록 주수(主帥)가 있어도 읍락(邑落)에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궤배(跪拜)하는 예절 또한 없다. 거처는 초가(草家)에 토실(土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그 문은 윗부분에 있다. 온 집안 식구가 그 속에 함께 살며, 당유와 남녀의 분별이 없다. 그들의 장례에는 관(棺)은 있으나 곽(槨)은 사용하지 않는다.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소나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써버린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지만, 금·은과 금(錦), 수(繡)는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칼을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는데 마치 날카로운 병기(兵器)와 같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그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官家)에서 성곽(城郭)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에 한 발(丈)쯤 되는 나무막대를 매달고 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탁무(鐸舞)와 흡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이렇게 한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國邑)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그 지역으로 도망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아니하므로 도적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도(蘇塗)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
그 나라 북방(北方)의 군(郡)에 가까운 제국(諸國)은 그런대로 약간의 예속(禮俗)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와 노비(奴婢)가 모여 사는 곳과 같다. 별다른 진보(珍寶)가 나지 않고, 동물과 초목은 대략 중국과 동일하다. 큰 밤이 생산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다. 또 세미치(細尾雞)가 나는데 그 꼬리의 길이는 모두 5자(尺) 남짓 된다. 그 고장 남자들은 간혹 문신(文身)을 한 사람도 있다.
또 주호(州胡)가 마한(馬韓)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한(韓)과 같지 않다. 모두 선비족(鮮卑族)처럼 머리를 삭발하였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옷은 상의(上衣)만 입고 하의(下衣)는 없기 때문에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나라에서 물건을 사고판다.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늙은이들이 대대로 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옛날 망명인들이 진(秦)의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성책(城柵)이 있고 그 말은 마한과 같지 않다.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고 한다. 서로 부르기를 모두 도(徒)라 하고 진(秦)나라 사람의 말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연(燕), 제(齊)의 말은 아니다. 낙랑 사람을 불러 아잔(阿殘)이라 하고 동방인(東方人)은 아(我)를 아(阿)라고 했으니, 이는 낙랑 사람이 그들의 잔여인(殘餘人)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지금 그들을 진한(秦韓)이라 부르기도 한다. 처음에 6국이었는데 점점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다.
변한과 진한은 모두 24개 국인데 대국은 4천~5천 가(家), 소국은 6백~7백 가(家)로 총 4만~5만 호다. 그 12국은 진왕(辰王)에 속한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을 써서 되게 하는데 세세토록 서로 계승한다, 진왕은 스스로 즉위하지는 못한다.【위략에 이르기를 유이민임이 명백하므로 마한의 제어를 받았다.】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 종자를 뿌리기에 적합하고 누에치는 법에 밝고 베(布)를 만든다. 우마(牛馬)를 타고 혼인하고 예의 풍속에 남녀의 구별이 있다. 큰 새의 깃털로 장사를 지내는데 그 뜻은 죽은 자가 날아오르도록 하고자함이다. 【위략에 이르기를 그 나라는 집 지을 때 나무를 가로 지르는데 뇌옥(牢獄)과 비슷하다 】나라에 철(鐵)이 나는데 한(韓), 예(濊), 왜(倭)에서 모두 따라 취한다. 시장에서 물건 살 대는 모두 철을 사용하는데 중국에서 돈(錢)을 쓰는 것과 같고, 또한 2군에도 공급한다. 풍속에 음주 가무를 좋아한다. 거문고(瑟)가 있는데 그 형태가 축(筑)과 비슷하고 뜯을 때 또한 음곡(音曲)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돌로 눌러 편편하게 하는데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것으로, 지금 진한 사람들은 모두 편두(頭-납작머리)다. 남녀가 왜(倭)와 가까워 또한 문신을 한다. 보전(步戰)에 익숙하고 병장기는 마한과 같다. 그 풍속으로, 길 가던 사람이 서로 마주치면 모두 멈추고 길을 양보한다.
변진(弁辰)은 진한(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살며 성곽(城郭)도 있다. 의복(衣服)과 주택은 진한(辰韓)과 같다. 언어(言語)와 법속(法俗)이 서로 비슷하지만,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방식은 달라서 문의 서쪽에 모두들 조신(竈神_을 모신다. 그 중에서 독로국(瀆盧國)은 왜(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12국에도 왕이 있으며 그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장대하다. 의복(衣服)은 청결하며 장발(長髮)로 다닌다. 또 폭이 넓은 고운 베를 짜기도 한다. 법규와 관습은 특히 엄준(嚴峻)하다.
(3) 기록의 검토 및 평가
진한(辰韓)이 마한(馬韓)의 통제를 받았다는 측면에서는 후한서 동이열전의 진한 관련 기록과 별 차이가 없으며, 후한서의 기록에다 위략(魏略)의 기록을 드는 등 여타 사실을 더 상세히 첨기한 것이 된다.
다만,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공하여 주(周) 왕실(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大夫) 례(禮)가 간(諫)하므로 중지하였다.”라고 한 기록을 보면, 여기 조선후는 번조선왕으로서 엄연히 단군조선의 비왕인데도 조선후가 주왕실을 받들려 하였다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바, 중국사서 특유의 중화우월주의적 경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실소를 금치 못한다.
지황 연간에 진한(辰韓) 사람 염사착이 낙랑에 항복하였다는 기록은 후한서 동이전에 기록된 한(韓)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관련 기록과 연관되는데, 왕망 시기에 진한은 신라이고 한(韓)은 기준왕이 한왕(韓王)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백제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바, 이처럼 중국사서는 시기가 지남에 따라 그들의 의도하는 바에 따라 글자를 변개하는 경향이 있어 유의하여 그 조작여부를 파악하여야 한다.
이시기에 백제는 발해만 유역에 세력의 근거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에 항복하였다는 염사착은 이 발해만 유역의 마한(백제) 사람 염사착일 것인데, 이 기록은 진한 사람 염사착이라 하여 소위 한사군의 낙랑이 대동강 낙랑에 있었다고 갖다 붙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대동강 낙랑국의 동남편에 위치한 신라를 두고 진평왕 이후의 신라왕을 낙랑군공 또는 낙랑군왕이라고 책봉한 것도 소위 한사군의 낙랑이 대동강 낙랑이라고 미리 설정해 놓고 고착시키려는 의도라고 할 것이다.
(4) 사건별 연대기
서기전1120년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망명하였다<한단고기 태백일사 번한세가 참조>.
서기전323년 1월 기자의 먼 후손인 읍차 기후(箕詡)가 번한(番韓) 수한(水韓)이 죽었으나 후사가 없어 번한성(番汗城)에 입궁하여 연(燕)나라를 대비하여 스스로 번조선왕이라 칭하며 사후 윤허를 구하였다<한단고기 북부여기 및 태백일사 번한세가 참조>. 연나라를 역공하려 하자 대부(大夫) 례(禮)가 간하여 멈추었다. 대부 례로 하여금 연(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서기전281년 연(燕)은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번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한단고기 북부여기 참조>. 진개는 연나라 소왕(서기전311년~서기전279년) 때의 장수인바, 만번한까지 차지한 해는 서기전281년경이 타당하다.
서기전232년 기비(箕丕: 서기전232~서기전221년)가 번조선왕이 되었다. 기부(箕否)는 기비(箕丕)의 오기가 된다.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蒙恬)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여기 요동은 요수(遼水)의 동쪽으로서 양평(襄平) 또는 창평(昌平)을 가리키는 것이 되며 이때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 부근이 된다.
서기전221년 기준(箕準: 서기전221~서기전194년)이 번조선왕이 되었다.
서기전209년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제,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준(準)에게 망명(亡命)하므로, 준(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서기전202년 한(漢)의 연왕(燕王)인 노관(盧綰)이 패수(浿水)를 번조선과의 경계로 삼았다. 여기 패수는 지금의 난하(灤河)를 가리킨다.
서기전195년 연왕 노관(盧綰)이 한(漢)을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도망간 뒤,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준(準)에게 항복하였다.
서기전194년 기준왕(箕準準)이 연(燕)나라에서 망명한 위만(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고, 근신(近臣)과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여기 한(韓)은 곧 단군조선의 마한(馬韓) 땅이며, 기준왕이 실제 왕노릇 한 곳은 금마(金馬)로서 지금의 익산(益山)이다.
서기전108년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右渠)에게 간(諫)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다.
우거의 나라는 단군조선 말기에 번조선의 땅으로서 지금의 요하와 난하 사이에 소재한 발해만 유역이고, 역계경이 갔다는 동쪽의 진국은 곧 요하 동쪽 땅이 되고 진한(辰韓)을 진국(辰國)이라 하였으므로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땅인 북부여나, 신라 이전의 진한(辰韓)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서기20~23년 왕망(王莽)의 지황(地皇) 연간에, 염사착(廉斯鑡)이 한(韓. 辰韓은 韓의 오기)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어 낙랑(樂浪)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였다.
이 시기에 대동강 평양지역에 낙랑국(서기전195년~서기37년)이 엄연히 존속하고 있었는데, 이 기록의 취지는 소위 한사군(漢四郡)의 낙랑이라고 의도하는 것이 되어 일단 지금의 난하 중하류 지역에 있었던 낙랑군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바, 실제로 어느 곳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서기125년에 후한의 안제 시기에 염사착의 후손들이 부역을 면제받았다는 기록이 정확하다라면 역사 사실적으로는 난하유역의 낙랑군이 될 것이다.
한편 여기 진한은 당시의 시기로 보아 신라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이렇듯 중국사서의 기록은 정확하지 못하고 아전인수격으로 의도하여 기록하는 경향이 있어 항상 경계하여야 한다. 그래서 여기 염사착이 정착한 곳이 대동강 평양의 낙랑군을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의도하여 기록하였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후한서 동이전 한(韓)에 기록된 염사 사람 소마시는 한(韓)의 염사라고 하여 한(韓.백제)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진한(辰韓)이라고 변개한 것이 된다. 이렇듯 중국사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개되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기록의 변천을 파악하여야 역사 사실적으로 정확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된다. 물론, 실제로 염사착이 항복하여 정착한 곳이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인지 대동강 평양 지역의 낙랑국인지는 역사적으로 명백히 규명되어야 하는 부분이 남아 있다.
서기125년 후한 안제(安帝) 연광(延光) 4년(百濟 己婁王 49년)에 이르러서는 염사착의 후손들은 부역(賦役)을 면제받았다.
여기 염사착을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에 정착한 것으로 전제하고 기록한 것이 된다. 이 기록이 조작이 아니라면 염사착이 난하유역에 정착한 것이 맞으나, 앞뒤 기록의 맥락을 위하여 대동강 평양의 낙랑국 지역에 정착한 것을 의도적으로 조작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는 없는 것이 된다. 다만, 발해만 유역의 한(韓.백제)에서 바로 인근에 있는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가서 항복하여 정착한 것이라면 앞뒤 기록이 일맥상통하여 역사적 사실로 판단된다. 즉, 왕망 시기에 발해만 유역의 한(韓)이 되는 백제사람 염사착이 인근에 있는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항복하여 정착하였던 것으로 된다.
서기160~서기180년경 후한 환제(桓帝: 서기132~168년), 영제(靈帝: 서기168~189년) 말기에는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郡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여기 한(韓)은 시기적으로 볼 때 곧 마한의 뒤를 이은 백제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곧 소위 한사군인 낙랑군의 인근에 있던 발해만 유역의 백제 관할지역이다. 서기전42년에 발해만 유역의 진번지역 즉 패대지역에 자리 잡은 소서노의 어하라국은 서기전31년에 고구려의 제후국이 되었다가 이후 서기전19년에 소서노가 죽자 비류가 이었으나 서기전18년에 마한지역의 한강유역으로 와서 시작한 온조십제에 나중에 합쳐진 것이 되는데, 여기가 곧 온조백제의 요서군, 진평군의 개척 기지가 되는 셈이다. 광개토경호태황도 한예(韓濊)를 취하여 연호(煙戶)를 담당하게 하였다고 하는바, 곧 백제와 백제 인근의 예(濊)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서기196~220년 후한 건안(建安) 연간(百濟 肖古王 31~仇首王 7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 여기 난하유역의 대방 땅에 후한과 백제 사이의 세력 다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237~239년 위(魏) 경초(景初) 연간(百濟 古爾王 4~6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여기서 대방군과 낙랑군이 한 때 백제(韓)의 땅이 되었던 사실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신지와 읍군과 읍장은 마한 시대의 직위로서 이때가 백제 시대임을 감안하면 시대착오적인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참고자료
原著 一始堂主人 桂延壽, 校閱 海鶴 李沂, 定本 桓檀古記, 한뿌리, 2005,
임승국 번역.주해,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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