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근
40여년 족보·역사 연구
[저서] 마고할미로부터 7만년/홍익인간 7만년 역사/천부경 인간완성-제1부 천부경과 음양오행 ·역원리 이해 등
<고조선 문자> 검증역 · 허대동 저. 이민화 감수 / 공학사·법학사·언론학사·인문학사(중문학·영문학·국문학)
해달별문화원 · 천부역사태학원 대표 / 민족회의 상임부대표 / 민족회의 역사광복군 총사령 / 기천검학 범사 / 참한역사신문협의회 감사 / 한뿌리사랑세계모임 자문위원 / 도선풍수지리신문 편집인 /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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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서 동이전(東夷傳) 기록의 소평(小評)과 연대기 정리
<삼한(三韓)·신라(新羅)>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진서(晉書), 양서(梁書), 수서(隋書), 북사(北史), 남사(南史),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구오대사(舊五代史),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실린 동이전(東夷傳), 동이열전(東夷列傳) 중 우선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 弁辰)의 삼한(三韓)과 신라(新羅)에 관한 기록을 검토하여 그 사건별 기록의 정확성 여부와 가치를 간략히 평가하고, 주요 사건들을 연대기로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일부 역사연구가들이 이들 동이전의 기록들이 아주 정확하다고 믿거나, 우리 측 사서에는 없는 기록을 싣고 있는 것처럼 매우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을 법 한데, 혹시라도 이러한 맹신적 사례를 우려하여 이들 동이전의 기록들이 역사 사실적으로 과연 정확한 것인지, 주요 기사들의 사건이 과연 어느 시기에 있었던 것인지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원문은 생략하기로 한다.
중국사서 동이전 기록의 평가 및 연대기
진서 열전 한(晉書 列傳 韓)
(1) 진서 기록 개요
진서(晉書)는 중국 진나라(晉)의 역사서로 이십사사중에 하나이다. 서기648년 당나라 태종 때에 방현령(房玄齡), 이연수(李延壽) 등 20여명의 학자가 편찬하였는데, 서진(西晉. 265년~316년)과 동진(東晉. 317년~418년)의 역사 기록이다. 총 130권으로, 제기 10권, 열전 70권, 지 20권, 재기(載記) 30권이다.
(2) 진서 열전 한(韓)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마한(馬韓),둘째는 진한(辰韓),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고 동서는 바다를 접한다.
마한은 산과 바다 사이에 사는데, 성곽이 없으며 무릇 소국이 56개나 되며, 큰 것은 마호, 작은 것은 수천가이고 각 거수가 있다. 습속은 기강이 약한데, 무릎 꿇는 절이 없다. 거처는 토실을 만드는데 무덤과 같다. 문은 위를 향하고 있고 온 식구가 함께 그 속에 살며 장유(長幼)와 남녀(男女) 구별이 없다. 소와 말을 타는 방법을 모르고 단지 장례용으로 쓴다. 습속에 금은과 비단과 융단을 귀중히 여기지 않고 구슬(瓔珠)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거나 장식으로 귀에 달아 늘어뜨린다. 남자들은 머리를 묶어 상투를 드러내며, 옷은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성질은 용감하고 굳세다. 국가 부역이나 성황 축조 때에는 용감하고 강건한 젊은이들이 모두 등가죽을 뚫어 그 구멍에 큰 밧줄을 꿰어서 막대기로 그 줄을 흔들면서 온 종일 소리를 지르며 힘껏 일하는데,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활·방패·창·큰 방패를 잘 쓰고, 비록 남과 다투거나 전쟁을 할 때도 굴복한 상대를 서로 귀하게 대한다. 풍습은 귀신을 믿어 해마다 5월에 씨뿌리는 작업을 마친 뒤에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며 신에게 제사지낸다. 10월 추수를 마친 뒤에도 또 그렇게 한다. 국읍에는 각각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재하게 하며 그를 ‘천군’이라 부른다. 또 별읍을 설치하여 그 이름을 ‘소도’라 하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단다. 소도의 뜻은 서역의 부도와 흡사한데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차이가 난다.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 2년에 그 왕이 빈번히 사실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7년, 8년, 9년, 10년에도 빈번히 왔다.
태희(太熙) 원년에 동이교위(東夷校尉) 벼슬에 이르고 하감(何龕)을 바쳤다.
함령(咸寜) 3년에 또 왔으며 그 다음해에는 또 내부(內附)를 청했다.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망명인들로 노역을 피하여 한(韓)에 들어왔는데, 한(韓)이 동쪽 경계를 나누어 살게 하였다고 한다. 성책(城柵)을 세우고 말은 진(秦)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점이 있어 이로 말미암아 혹 진한(秦韓)이라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6국이 있었으나 뒤에 작게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다.
또 변진(弁辰)이 있는데 역시 12국으로 합 4~5萬戶이며, 각 渠帥가 있고 모두 辰韓에 속한다.
진한은 언제나 마한 사람을 써서 주인으로 삼아 세세토록 서로 이어지지만 스스로는 되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유이민임이 분명한 고로 마한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땅은 오국에 적당하며, 누에 뽕이 넉넉하고 겁포를 잘 짜며, 소도 부리고 말도 탄다. 그 풍속은 마한과 비슷하며, 병기도 역시 마한과 같다. 처음 아이를 낳으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한다. 춤추기를 좋아하며 거문고를 잘 타고, 거문고의 모양은 축(筑)과 비슷하다.
무제 태강 원년(西晋 武帝 太康 元年. 서기280년)에 그 왕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태강 2년(서기281년)에 다시 와서 조공하였으며, 태강 7년(서기286년)에도 또 왔다.
(3) 기록의 검토 및 비평
후한서나 삼국지 위서의 한에 관한 기록을 축약한 것이 되는데, 마한과 진한의 조공 사실을 적고 있다. 여기 마한과 진한은 역사적 시기로 볼 때 각 백제와 신라를 가리키는 것이 명백하다. 다만 서진(西晉) 무제(武帝) 연호인 함령(서기275~280년)을 태강과 태희 뒤에다 놓고 있는데 순서를 잘못 놓은 것이 된다.
진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고 동서는 바다를 접한다고 하였는데, 대방은 소위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남쪽을 분할하여 만든 군이 되는데, 이 대방을 대동강 평양의 낙랑국의 남쪽으로 갖다 붙여 이 낙랑의 남쪽에 대방이 있음을 의도적으로 나타내어 진한이 낙랑국의 남쪽에 있었던 것을 대방의 남쪽에 있는 것으로 호도하고 있는 것이 된다. 즉 대방을 대동강 평양의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4) 사건별 연대기
서기276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함령(咸寧) 3년(백제 고이왕 43년)에 백제가 조공하였다.
서기277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함령 4년(백제 고이왕 44년)에 백제가 내부(內附)를 청하였다. 여기서 백제가 외교 전략상 조공하였다는 것은 수긍할 수 있으나 내부를 청하였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과장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기280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元年)에 백제(고이왕 47년)가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서기281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太康) 2년에 백제(고이왕 48년)가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라가 조공하였다.
서기286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 7년에 백제(고이왕 53년)가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라가 또 조공하였다.
서기287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 8년에 백제(책계왕 2년)가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서기288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 9년에 백제(책계왕 3년)가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서기289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 10년에 백제(책계왕 4년)가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서기290년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희(太熙) 원년(元年)에 백제왕(책계왕 5년)을 동이교위(東夷校尉)로 삼았다.
양서 열전 신라(梁書 列傳 新羅)
(1) 양서 기록 개요
양서(梁書)는 중국 남조 양나라(梁, 502년 ~ 557년) 시대의 기록을 한 역사서이다. 전56권으로 구성되어있다. 629년에 진나라(陳) 사람인 요찰(姚察)이 편찬을 시작하였고, 요찰이 죽자,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아들인 요사렴(姚思廉)에 의해 완성하였다. 총56권으로 본기 6권과 열전 50권의 기전체(紀傳體)로 구성되어 있다.
(2) 양서 열전 신라
신라(新羅)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었다.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데,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로는 진(秦)나라 때 망명들이 역(役)을 피하여 마한(馬韓)으로 가니, 마한 역시 그 동쪽 땅을 나누어 살게 하였는데, 진(秦)나라 사람인 까닭으로 그 나라를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그들의 말과 물건 이름은 중국인의 것과 비슷하니 국(國)을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 도둑(賊)을 구(寇),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기를 모두 도(徒)라고 하는데 마한과 같지 아니하다. 또 진한(辰韓)의 왕(王)은 항상 마한(馬韓) 사람을 세워 대를 이어 가고, 진한이 스스로 왕이 될 수는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유이민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 마한에 의해 지배되었다. 진한은 처음 6국이었다가 작게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 신라는 그 중의 하나이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있다. 그 땅의 동쪽은 큰 바다와 접해 있고, 남북으로 구려, 백제와 접하고 있다. 위(魏)나라 때는 신로(新盧)라 불렀고, 송(宋)나라 때는 신라(新羅) 또는 사라(斯羅)라 하였는데, 그 나라는 작아서 스스로 사신을 보낼 수 없었다. 보통(普通) 2년(서기 521년)에 왕 모(募)가 이름이 진(秦)으로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그 습속에 성(城)을 부르기를 건모라(健牟羅)라 하며, 그 읍(邑)이 안에 있으면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으면 읍륵(邑勒)이라 하니, 또한 중국말로 郡縣이다. 나라에 6 탁평(啄評)과 52 읍륵(邑勒)이 있다. 토지는 비옥하여 五穀을 심기에 마땅하다. 뽕나무와 삼이 많아 비단과 베를 생산한다. 소를 부리고 말을 탄다. 남녀 간의 구별이 있다. 그 나라의 관직 이름에는 자분한지(子賁旱支), 제한지(齊旱支), 알한지(謁旱支), 일고지(壹告支), 기패한지(奇貝旱支)가 있다. 그들은 갓(冠)을 유자례(遺子禮)라 하며, 저고리(襦)를 위해(尉解), 바지(袴)를 가반(柯半), 신(靴)을 선(洗)이라 한다. 그들의 절(拜)과 걸음은 고려(高麗)와 서로 비슷하다. 文字가 없으므로 나무에 새겨 신표로 삼는다. 말을 함에는 백제를 대동해야 비로소 통할 수 있다.
(3) 기록의 검토 및 평가
이 기록도 진한이 마한의 통제를 받았다는 취지의 후한서 진한 관련 기록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진한 대신 신라로 기록하고 있으며, 중국 남북조시대의 송(宋)나라 보통(普通) 2년인 서기521년에 신라가 스스로 사신을 보낼 수 없어 백제를 따라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4) 사건별 연대기
서기521년 송(宋) 보통(普通) 2년에 왕 모(募)가 이름이 진(秦)으로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여기 송(宋)은 위진(魏晉:220~420) 이후의 남북조 시대(420~589)의 송(宋:420~479)이다. 이때의 신라왕은 법흥왕(法興王:514~540)이다.
수서 열전 신라(隋書 列傳 新羅)
(1) 수서 기록 개요
수서(隋書)는 수나라의 역사서로서, 수나라가 멸망하고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한 후 무덕(武德) 4년(서기621년)에 왕소(王劭)가 수서 18권을 완성하였는데, 당 태종 정관 3년(서기629년)에 방현령(房玄齡)이 감수를 시작하여 당 태종 10년(서기636년)에 위징(魏徵)과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의 감독으로 실제 집필자로는 안사고(顔師古)와 공영달(孔穎達) 등이 참여하여 본기 5권, 열전 50권이 완성되었고, 제3대 당 고종 현경 원년(서기656년)에 이르러 지(志) 30권이 추가되어 총 85권으로 되었다. 지에는 수나라뿐만 아니라 남조의 양(梁), 진(陳)과 북조의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 다섯 개 왕조가 같이 수록되어 있다.
(2) 수서 열전 신라
신라국(新羅國)은 고리(高麗) 동남쪽에 있다. 한(漢)나라 때의 낙랑(樂浪)의 땅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혹 사라(斯羅)라고도 부른다.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려(高麗)를 쳐부수니 옥저(沃沮)까지 달아났는데, 그 뒤 자기 나라로 돌아왔으나 남은 자들은 마침내 신라(新羅)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신라 사람들에는 화하(華夏), 고려(高麗), 백제(百濟)의 족속들이 섞여있고, 아울러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예(獩)의 땅도 가지고 있다. 그 왕은 원래 백제(百濟) 사람인데, 바다로부터 몰래 신라(新羅)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대대로 임금을 이어와 김진평(金眞平)에 이르렀다.
개황(開皇) 14년(594)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고조(高祖)가 진평(眞平)을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을 삼았다. 신라는 처음에 백제(百濟)에 복속하였다. 뒤에 백제가 고려(高麗)를 치자 고려 사람들이 군역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서 신라로 귀화하니, 드디어 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백제를 치고 가라국(迦羅國)을 복속시켰다.
열일곱 관등이 있다. 첫째는 이벌간(伊罰干)으로 귀하기가 상국(相國)과 같다. 다음은 이척간(伊尺干), 다음은 영간(迎干), 다음은 파미간(破彌干), 다음은 대아척간(大阿尺干), 다음은 아척간(阿尺干), 다음은 을길간(乙吉干), 다음은 사돌간(沙咄干), 다음은 급복간(及伏干), 다음은 대나마간(大奈摩干), 다음은 나마(奈摩), 다음은 대사(大舍), 다음은 소사(小舍), 다음은 길토(吉土), 다음은 대오(大烏), 다음은 소오(小烏), 다음은 조위(造位)다.
밖에는 군현(郡縣)이 있다. 신라는 글자와 무장 병사(甲兵)가 중국과 같다. 건장한 사람들을 뽑아 군대, 봉수(烽), 수자리(戍), 순라(邏)에 들인다. 모두 둔관부오(屯管部俉)를 갖추고 있다. 풍속, 형벌 정치, 옷은 대체로 고려(高麗), 백제(百濟)와 같다. 해마다 1월 1일 설날 아침에 서로 축하한다. 임금은 잔치를 벌여 관리들을 나누어 대접하고, 그 날에 해 신과 달 신에게 절한다. 8월 15일이 되면 잔치를 베풀어 즐기고 관리들에게 활쏘기를 시켜 말과 베를 상으로 준다. 큰 일이 생기면 뭇 관리들이 모여 의논한 뒤 결정한다. 옷 색깔은 흰색을 높이 여긴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땋아 머리 위로 두르고 여러 채색과 구슬로 꾸민다. 혼인예식은 술과 밥만 있으면 된다. 빈부 정도에 따라 한다. 신혼 저녁에 신부는 먼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게 절한 뒤 지아비에게 절한다. 사람이 죽으면 관에 넣어 땅에 묻고 무덤을 세운다. 임금,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식에 대한 상복은 일 년을 입는다. 밭은 아주 기름져서 논벼와 밭벼를 같이 씨 뿌린다. 오곡, 열매, 나물, 새, 짐승, 물산은 대체로 화하와 같다.
대업(大業. 수양제 연호. 605~618) 이후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신라 땅은 산이 많고 험하다. 비록 백제(百濟)와 사이가 벌어졌으나 백제 역시 신라를 어쩌지는 못하였다.
(3) 기록의 검토 및 평가
이 기록은 신라국(新羅國)을 한(漢)나라 때의 낙랑(樂浪)의 땅에 자리 잡고 있다(居漢時樂浪之地)라고 함으로써, 마한 땅의 최씨 낙랑국과 소위 한사군의 낙랑을 혼동시키고 있다. 신라국은 서라벌을 중심으로 하여 마한 땅 낙랑국(서기전195년~서기37년)의 동남쪽에 위치한 것이 되는데, 소위 한사군의 낙랑군은 지금의 발해만 난하 유역에 있었으므로 반드시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종종 중국 측 기록은 이렇게 혼동을 일으키게 하는 경우가 있어 반드시 그 지명의 위치를 분별해야 한다.
또 신라가 강성하게 된 이유를 들고 있는데,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려(高麗)를 쳐부수었을 때 옥저(沃沮)까지 달아났던 고구려인들이 그곳에 남았다가 신라(新羅) 사람이 되었다(魏將毌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複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고 적고 있다.
한편, 그 왕은 원래 백제(百濟) 사람인데 바다로부터 몰래 신라(新羅)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라고 하여, 후한서 동이전의 진한 기록과 대동소이한 취지로서 백제의 선대인 마한을 백제로 대입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 측 기록은 자세하지 아니하고 역사를 압축하여 기록함으로써 후대인들이 혼동을 일으키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대로 임금을 이어와 김진평(金眞平)에 이르렀으며 개황(開皇) 14년(594)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고, 고조(高祖)가 진평(眞平)을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을 삼았다(傳祚至金真平,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高祖拜真平為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처음에는 백제(百濟)에 복속하였으나 뒤에 백제가 고려(高麗)를 치자 고려 사람들이 군역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서 신라로 귀화하여 드디어 강성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백제를 치고 가라국(迦羅國)을 복속시켰다(其先附庸於百濟,後因百濟征高麗,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百濟,附庸于迦羅國)라고 하여, 신라가 강성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신라가 백제를 치고 가야를 복속시킨 시기는 대략 수나라 건국 이전으로 기준 잡으면 서기551년에서 서기562년 사이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이후 신라는 수나라 양제 이후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라고 하고, 백제와 신라가 사이가 나빠진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가 강성해진 상태였음을 나타내주고 있다(大業以來,歲遣朝貢。新羅地多山險,雖與百濟構隙,百濟亦不能圖之).
(4) 사건별 연대기
서기전57년 이후 신라국(新羅國)이 낙랑(樂浪)의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 낙랑은 실제로는 한반도인 마한의 낙랑국을 가리키며, 신라는 이 낙랑국의 동남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이 수서의 기록은 낙랑국(樂浪國)을 소위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으로 호도(糊塗)하고 있다.
서기246년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려(高麗)를 쳐부수었을 때 옥저(沃沮)까지 달아났던 고구려인들이 그곳에 남았다가 신라(新羅) 사람이 되었다(魏將毌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複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 이 기록에서 일부의 해석으로 옥저에 남았던 고구려인들이 신라를 세웠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신라는 서기전57년에 이미 건국되었으므로 신라로 귀화하거나 복속하여 신라 사람이 되었다라고 해석하여야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이 된다.
서기551년 백제가 신라와 고구려를 합공하여 한강 하류의 6군을 빼앗았다. 이때 신라 진흥왕은 이해에 연호를 개국(開國)이라 하였으며, 거칠부가 백제와 합공하여 죽령 이북(한강 상류지역)의 고구려의 10개성(군)을 빼앗았다.
서기553년 신라는 백제의 한강 하류 6군을 차지하여 버렸다.
서기554년 7월에 백제가 대가야와 손잡고 신라의 관산성(옥천)을 공격하였다가, 구천에 매복하였던 신라의 복병에 걸려 신라의 비장인 고간, 도도의 급습에 백제 성왕이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 좌평 4명과 군사 29,600명이 죽고 말 한필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에 나제동맹이 결렬되었다.
서기562년에 신라는 마지막으로 대가야를 병합함으로써 가야를 모두 병합하였다.
서기594년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16년)이 수나라 개황(開皇) 14년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고, 고조(高祖)가 진평(眞平)을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을 삼았다(傳祚至金真平,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高祖拜真平為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이때부터 수, 당은 신라왕을 책봉하고 신라는 조공을 하는 관계로 지속한 것이 된다.
서기605년 이후 신라는 수나라(서기581년~서기618년)에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신라 진평왕(서기579~632년) 시대이다.
북사 열전 신라(北史 列傳 新羅)
북사 열전의 신라 기록은 수서의 기록보다 자세하지 않고, 생략된 글귀가 있어 문맥상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바,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서 열전 신라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낫다.
남사 열전 신라(隋書 列傳 新羅)
남사 열전의 신라 기록도 북사와 별 다름이 없는바,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수서 열전의 신라 기록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낫다.
참고자료
原著 一始堂主人 桂延壽, 校閱 海鶴 李沂, 定本 桓檀古記, 한뿌리, 2005,
임승국 번역.주해,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1987
二十五史全文檢索系統(網絡版)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삼국사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중국정사조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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