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나라 사람 기자의 은둔생활-날조된 기자조선
솔나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해(BCE 1150)년이다.
재위 37년 정해(BCE 1114)년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살면서 인사를 사절하였다.
*기자(箕子)~기자는 은나라 왕실의 근친인 '다자(多子)' 출신의 제후로서 성은 子, 이름은 서여(胥餘)이다. 기(箕) 나라 이름이고 子는 작위 명칭이다. 은나라 말기 기자가 봉해졌던 기국(箕國)은 은나라 왕실의 직할지인 '하남성 상구현'으로 추측된다(윤내현의 고대사론) 주나라 무왕이 상(商)을 이긴 뒤에 기자를 데리고 주나라에 서울 호경으로 돌아와 홍범을 묻고 사관에게 기록하게 했다고 하였다.
기자족이 신흥세력 주의 압력으로 그 주력이 동방으로 이동하여 정작한 곳은 난하하류이다.(천관우의 기자조선설) 기자가 동진하여 평양지역까지 도달하였다. 문헌상으로는 창려의 험독, 광녕의 험독, 집주의 험독, 낙랑의 험독에 이동과정에서 일정기간 머무는 근거지로 보았다. 이형구는 기후방정에 새겨진 '기후(箕候)'를 은이 망한 후에 상왕족인 기자를 대표로 하는 은나라 씨족들이 주(周)의 세력을 피해 원래 조상이 거주했던 발해연안 북부의 대능하 유역으로 이주해 건국한 것이 기자조선이다.
윤내현은 상나라 말, 기국의 상왕(商王)의 직할지 상읍(商邑) 부근인 하남성 상저현 지역이었다고 보았다. 상나라가 주족에 의해 망하고 기자는 중국의 동북부 연산지역으로 이동하여 자리를 잡았는 데, 그 후 기자국은 난하 동부연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고려.조선 사대주의 신봉자들의 기자조선 조작
*중화중심의 사기들이 기자조선 날조 행각
*단군세기에서는 "BCE 1122년에 은나라가 망하고, 3년이 지난 BCE 1120년에 기자가 태항산 서북 땅에서 살다가 BCE 1114년에 다시 서화(西華, 지금의 하남성 개봉)으로 옮겨 살면서 인사를 일절 사절했다"하여 기자조선을 강력히 부정하고 있다.
재위 47년 정유(BCE 1104)년에 임금께서 상소도(上蘇塗)에 고례(古例)를 강론하시다가, 아첨하는 신하와 골곧은 신하 차이를 물으셨다. 삼랑(三郞) 홍운성(洪雲性)이 나아가 아뢰었다.
"올바른 이치를 굳게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直臣)이요, 권위를 두려워하여 자기 뜻을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임니다. 임금은 근원이요. 신하는 지류이다. 근원이 이미 탁하거늘 지류가 맑기를 바란다면 이는 옳지 않음니다.
그러므로 군왕이 성군이라야 신하가 올곧은 신하가 되는 것이 옴니다". 임금께서 "그대 말이 옳도다"하셨다.
재위 59년 기유(BCE 1092)년에 밭곡식이 잘 여물어 한줄기에 다섯 이삭이 패었다.
재위 88년 무인(BCE 1063)년에 솔나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추로(鄒魯)가 즉위하셨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149~151
#한자원문 해설은 이암의 단군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자랑스런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