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맥의 태백일사 제8 고려국본기
★고려말, 왕조의 분열과 옛영토 회복(14-1)
천수 기원 439년은 경효왕(공민왕) 5년(단기 3689, 1356)이다. 이해 여름 4월 정유(丁酉)에 기철(奇轍, 고려말기의 권세가, 몽골명 빠이앤부카), 태감 권겸(權謙), 경양부원군 노책(盧頙) 등이 반역을 꾀하다가 형벌을 순순이 받아 죽었다.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으로 임명하고,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 고려후기에 원이 일본을 원정하기 위한 전방사령부로서 고려에 설치한 관서)를 철폐했다. 이때에 원나라 왕실이 극도로 쇠약해져 오왕 장사성(張士誠, 원나라 때 태주 사람)이 강소(江蘇)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소란스런 일이 많았다.
*기철~고려 말기 권세가로 몽골명은 빠이앤부카이다. 누이동생이 원나라 순제 왕후가 되었다. 충혜왕 1년(1340) 원나라부터 행성 참지정사라는 벼슬을 받고, 고려에서도 덕성부원군에 봉해졌는 데 기황후의 권세를 믿고 지나치게 세도를 부려 민폐가 컸다. 공민왕 즉위 후 배원정책을 써서 기씨 일당을 탄압하자 반란의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주살되었다.
*정동행성이문소
정동행성은 고려 후기에 원이 일본을 원정하기 위한 전방사령부로 고려에 설치한 관서이다. 명칭은 고려말까지 존손하였다. 정식 명칭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으로서 '정동'은 일본 정벌을 뜻하고, '행중서성'은 중앙정부 중서성의 지방파견을 뜻한다.
승상은 고려 왕이 겸임했고, 승상 아래에는 평장정사.우승.좌승.참지정사.원외랑.낭중.도사 등이 있다. 정동행성에는 원나라의 다른 행정과 마찬가지로 이문소(理問所)가 있있다. 이문소는 본래 개경에서 대원관계를 저해하는 범죄행위를 다스리는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부원세력층의 불법과 전횡을 옹호하고, 전민의 점탈을 방조하였다. 이문소 관리들의 횡포와 전권이 문란해져 고려말에 더욱 심했다.
1356(공민왕 5년)에 반원개혁의 첫 조치의 하나로 행성이문소가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장사성~원나라 때 태주 사람으로 원나라 순제 지정 연간에 기병하여 처음에 성왕(誠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대주(大周)라 하였다가 다시 고쳐 오왕(吳王)이라 칭하였다.
*고우(高鄅)~지금의 강소성 고우시
#역주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747
#한자원문 해설은 고려국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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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왕조분열과 옛 영토 회복, 최영장군의 요동공략(14-2)
최영(崔瑩, 1316~1388) 등이 고우(高郵, 지금의 강소성 고우시)에서 돌아오자 최영 등의 의견을 좇아 드디어 서북 땅을 회복할 계책을 정하셨다.
먼저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계속해서 인당(印璫, 공민왕 때의 장수, 서북면 병마사), 최영 등 여러 장수를 보내시어 압록강 8참(八站)을 깨뜨렸다. 또 류인우(柳仁雨), 공천보(貢天甫), 김원봉(金元鳳) 등을 보내시어 쌍성(雙城, 쌍성총관부의 약칭, 원나라 때 고려 和州에 두었던 관청) 등 옛 땅을 되찾게 하셨다.
10월(단기 3694, 1361) 겨울 10월에, 홍두적(紅頭賊, 홍건적을 말함) 반성(潘誠), 사류(沙劉), 주원장(朱元璋, 중국 명나라 시조, 원나라를 멸하고 명나라를 세움) 등 무리 십만 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로 침범하였다.
11월에 도적이 안주를 습격하니 상장군 이음(李蔭, 행촌 이암의 아들), 조천주(趙天柱)가 전투에서 죽었다.
*최영장군~공민왕 3년(1354)에 원나라의 요청으로 유탁, 염제신과 함께 정병 2천을 인솔하고 가서 선봉을 맡아 장시성(원나라 때 태주 사람으로 반란을 일으킴)의 반란군을 거의 전멸시켜 명성을 대륙에 떨쳤다.
2차에 걸쳐 침입한 홍건적을 격퇴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우왕 2년(1376)에는 역사상 유명한 홍산(鴻山)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그 뒤에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자 요동정벌을 주장, 팔도도통사가 되어 우왕과 함께 평양까지 진출하였은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성계 일파에게 붙잡혀 고봉(高峰)에 유배되었다가 후에 죽음을 당하였다. 최영은 평소 청렴결백하여 재물을 탐내지 않았다.
*주원장~중국 명나라의 시조.
원나라가 쇠약해져 여러 곳에서 홍건적이 일어났을 때 가담했다가 백련교의 뒷받침으로 세력을 넓혀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을 세웠다.
자하선생과 팔공진인이 전한 신교총화(神敎叢話)에서는 "명나라 주원장은 고주몽의 후손으로 그의 행동과 말을 살펴보면 우리동방 사람이다"라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명태조는 '임회현 일대' 사람 즉 백제 신라 고려사람이었다. 임회현은 본래 백제의 맥구리현이다. 임회현은 고려의 진도라고 했다. 게다가 나주에 속한다. 고려의 나주는 절강과 마주본다고 했으니 나주는 강소성에 있어야 마땅하다. 대략 임회현 일대가 나주에 속함을 알 수 있다.(다음 인터넷, 주원장은 고려인 출신이 맞다)
*홍건적~홍건적난은 중국 중원에서 이민족인 왕조 원을 타도하고, 한족 왕조인 명나라 창건의 계기를 만든, 종교적 성격을 띤 농민반란
*인당~공민왕 때의 장수, 공민왕이 원나라의 정치가 위축된 틈을 타서 서북면 병마사로 삼아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략하게 하자, 파사부 등 3참을 무찌르고 돌아와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747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고려국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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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왕조의 분열과 옛 영토의 회복(14-3)
*정세운 장군과 이암의 애국충정
12월에, 임금이 복주(福州)에 이르러 정세운(鄭世雲, 공민왕 때의 장군, 공민왕 10년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경이 함락, 상장군으로 왕을 따라 피난, 왕명으로 총병관이 되어 공민왕 11년에 홍건적을 압록강변으로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을 총병관으로 삼았다. 정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백하였다. 임금이 파천(播遷)한 이후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하게 여겼다. 홍건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여기므로 임금이 또한 의지하셨다. 정세운은, 애통하게 여기는 조서(詔書)를 속히 내려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사신을 모든 도에 보내어 징병(徵兵)을 독려하시도록 임금에게 여러번 청원하였다.
임금께서 마침내 조서를 내리시니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암이 정세운에게 전하여 말하였다.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정승에게 기울이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뜻을 장수에게 기울이는 법이다.
나는 문신(文臣)이라 나약하여 군사를 부리지 못하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정세운이 도당(都堂)에 나아가 분명히 소리 높여 류숙(柳淑)에게 군사를 징집하면서 기한이 늦은 일을 책망하였다.
전선으로 출발하려 할 때 이암이 정세운에게 말하였다.
"강력한 외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황성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의 수레가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삼한의 치욕이로다. 공이 앞장서서 대의를 부르짖어 왕업이 중흥함이 이번 한 판 싸움에 달려 있도다. 우리 임금과 신하는 밤낮으로 공이 이기고 돌아오기를 바랄뿐이다."
권면하고 깨우쳐 전송한 뒤에 매일 여러 장수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독려하고 묘락을 전해 주었다. 안우(安祐),이순(李珣, 희필로 개명, 이암의 종질), 한방신(韓方信) 등 여러 장수가 모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747~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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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북방 영토를 회복할 기회(14-4)
20년 신해(단기 3704, 1371) 2월 갑술에 여진 천호(千戶) 이두란 첩목아(李豆蘭帖木兒, 조선의 개국공신, 여진의 천호 아라부카의 아들, 원나라 말기에 일당을 이끌고 투항, 북청에 있다가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이씨 성을 받고 이름은 之蘭이라함)가 백호(百戶) 보개(甫介)를 보내어 백호를 거느리고 투항해왔다. 윤3월 기미에, 북원(北元, 명왕조에 의해 중국 본토에서 쫓겨난 원왕조의 잔존 세력에 대한 호칭)의 요양성 평장사 유익(劉益), 왕우승(王右丞) 등이 요양은 고구려 땅이라 하여 우리나라에 귀순하고자 사람을 보내어 귀화를 청했다. 이때 조정의 의론이 일치하지 않고, 국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임금이 정몽주(고려 말의 충신, 호는 포은)를 명나라에 보내시어 촉(蜀, 명나라 明玉珍이 사천이나 운남에 세웠던 夏나라를 평정한 것을 말한다)을 평정할 것을 하례하게 하셨다. 1371년 6월 주원장이 湯和.傅友德 등을 보내 명옥진의 아들 明昇이 다스리던 하나라를 멸망시켰다.
김의(金義, 고려말 장수, 원래 胡人으로 본명은 也列哥)가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살해하자 조야가 시끄러워 이 일에 대해 말하려는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바로 회신을 하지 않자, 유익 등이 마침내 金州.復州.蓋平.海城.遼陽 등의 땅을 가지고 명나라에 가서 붙었다. 오호라! 당시 청론(淸論)을 떠들던 무기력한 자들이 한갓 편안함을 가시고 좇기만 일삼아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고, 마침내 옛 강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뜻있는 사람의 한(恨)이 더욱 깊어지는구나!
강릉왕(우왕)이 선제(先帝, 공민왕)의 명으로 즉위(단기 3707, 1374)하셨다. 이 때 요동도사(요동에 설치한 명나라 최고 군사기구로 도지휘사를 말함)가 승차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어 압록강에 방을 써붙여 말하기를 "철령의 북쪽과 서쪽의 개원(지금의 요령성 개원현)에 속하던 땅이니 거기에 관할하던 軍人, 漢人, 女眞, 達達, 高麗는 여전히 요동에 속한다." 고 운운하였다.
조정의 중론이 분분하여 일치하지 않다가 마침내 싸울 것을 결정하고, 나라 안에 병마를 크게 일으키고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셨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2012), pp749-751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고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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