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단단군의 재위 원년은 기묘(BCE 1782)년이다.
재위 16년 갑오(BCE 1767)년에 임금께서 주현(州縣)을 정하고 관직을 분립하는 제도를 두셨다.
관(官)은 권한을 겸하게 못하게 하고 정치는 법도를 넘지 않게 하시므로, 백성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스스로 하는 일을 편안히게 여기어 현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나라에 넘쳐 흘렀다.
★하나라 멸망과 은나라 건국비사(1)
이해 겨울,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치자 하나라 왕 걸(桀)이 구원을 청하였다. 읍차(邑借) 말량(末良)에게 구환의 병사를 이끌고 전투를 돕게 하셨다. 이에 탕(湯)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군사를 되돌리라 명하셨다.
이때 걸(桀)이 악속을 어기고 군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 맹약을 깨뜨리려 하셨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마침내 은나라 사람과 함께 걸(桀)을 치는 한편 은밀히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보내 견군(畎軍)을 이끌고 낙랑(樂浪) 군사와 합세하여 관중의 빈(邠).기(岐) 땅을 점령하여 주둔시키고 관제(官制)을 설치하셨다.
*은(殷)~건국 초기에 하남성 박(亳, 商丘)을 도읍으로 삼고, 상(商)이라 하였다. 그 뒤 여러 차레 도읍을 옮겼는 데, 19세 반경(盤庚)왕이 하남성 안양으로 옮긴 뒤 은이라고 부루게 되었다. 일설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격하시키기 위해 은나라로 부르게 되었다.
*하나라의 멸망과 은나라의 건국~전한(前漢) 때 유향이 저술한 '설원 권모(說苑 權謀)'에 은나라를 연 성탕(成湯)이 하나라의 폭군 걸(桀)을 정벌하려 하니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하나라가 구이군대(단군조선의 구환의 군대)의 도움을 받으므로 아직은 불가함니다"라고 간하였다. 그런 데 다음해(BCE 1766)에 걸왕이 구이(九夷) 군대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탕임금이 군사를 일으켜 걸왕을 토벌하므로 걸이 남소(南巢, 지금의 안휘성 소현 동북)로 도망하였다"라고 하였다. "탕이 걸을 내쫓은 것은 동이가 하를 멸망시킨 것과 같다.
*낙랑(樂浪)~낙랑은 위만이 번조선을 찬탈해서 다스렸던 왕험성(王險城, 지금의 히북성 창려현 지역)이다. 본래 평양 일대에 있었던 낙랑은 고조선 삼한 중 번한의 유민 최승이 세운 '최씨낙랑국'이며 낙랑군이 아니다. 현재 주류학계는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별하지 못하고, 낙랑군이 한반도 대동강 일대에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식민사관)
*견군(畎軍)~견이의 군사, 견이는 동이족 가운데 하나이다.
'후한서 서강전'에 "걸왕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자 견이가 빈과 기의 사이에 들어갔다"라고 하였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131~133
#한자원문 해설은 이암의 단군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자랑스런 한겨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
★신라 화랑의 기원인 국자랑의 선발과 오성 관찰(2)
재위 20년 무술(BCE 1763)년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의셨다. 미혼 소년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셨다. 국자랑이 밖에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불렀다.
*국자랑(國子郞)~국선, 선랑이라 불리던 국자랑은 신라시대 화랑의 모체다. 국자랑의 전통은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 백제의 무절로 계승되었다. 그 뒤로 명맥이 쇠잔되었으나 조선시대 선비의 저항정신, 구한말의 항일 구국운동과 3·1운동 등 민족의 위기 때마다 유감없이 표출되었다.
재위 50년 무진(BCE 1733)년에 오성(五星)이 누성(婁星)에 모이고, 황학(黃鶴)이 날아와 금원(禁苑)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누성(婁星)~황도를 따라 천구를 28등분한 별자리를 28수라한다. 천상의 별자리를 동서 남북 4궁으로 나누고 각 궁을 다시 7등분하여 도합 28구를 만들었다. 누성은 서쪽 방위에 위치한 별이다. 28수가 하늘을 대행하여 지구와 함께 천체 운동을 이루는 현실적인 변화의 주체 노릇을 한다. 五星이 婁星에 모였다에 모였다고 한 흘단단군 50년(BCE 1733)년의 기록은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에 의하여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었다. 박교수는 오성취루 현상이 1년의 오차가 있다고 했는 데, 이것은 단군 원년을 정월 세수로 계산한 무진(BCE 2333)년이 되므로 천문학과 역사 기록의 오차는거의 사라지게 된다.(박창범.라대일, 단군조선 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과학적 검증, 한국 상고사 학보, pp95~109쪽)
*금원(禁苑)~궁원 안에 있는 동산이나 후원, 내원.봉원.어원이라고도 부른다.
재위 61년 기묘(BCE 1722)년에 흘단단군께서 붕어하시자 만백성이 음식을 끊었고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명을 내려 죄수와 포로를 석방하고,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였다. 해를 넘겨서 장례를 치렸다. 우가(牛加) 출신 고불(古弗)이 즉위하였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133~135
#한자원문 해설은 이암의 단군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자랑스런 한계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