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의 분단 이후 계급지배사회로 전변된 우리 역사는 열국시대, 삼국시대, 발해와 통일신라의 남북국시대, 고려, 조선왕조,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날의 남북분단시대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계급지배의 역사전개과정에서도 단군조선의 역사와 전통, 사상과 문화의 주체인 인민들은 언제나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와 문화를 지켜 왔으며, 인간의 본성인 자주성-창조성-통일성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왔다.
단군조선 분단 이후에도 인간을 존중하는 전통의 영향으로 이 땅에는 서양과 같이 인간을 도구나 가축으로 취급하는 살인적인 노예제는 없었으며 대부분 마을공동체를 기본단위로 하여 삶을 영위하여 왔다. 삼국시대에는 위로는 왕족과 귀족이 있었고 밑으로는 전쟁포로와 범죄자로 구성된 노비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사회의 주된 세력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하호(下戶)같은 양인 신분의 농민층이 주된 사회세력을 이루었으며 이들은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마을공동체 내에서는 사람들이 일정하게 토지를 나누어 갖고 마을 지도자들과 하나가 되어,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었으며, 조세와 병역의 의무도 함께 했다. 더 나아가 조세 수탈권을 갖고 있던 귀족들까지도 공동체 내에서 함께 일하며 살아갔다.
삼국의 역대왕조들은 마을공동체를 통치의 기본대상으로 하여 유지되었으며, 신라의 경우는 마을공동체의 촌주를 통해서만 왕조의 통치를 실현하였고, 지방 수령들도 촌주들과 상의하여 지방을 다스려나갔다. 통일신라 말에는 촌주들이 촌주층을 형성하고 재지세력(在地勢力)으로 발전하여 호족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는 이런 호족세력들에 힘입어 창건되었는바, 호족세력의 두목인 왕건이 천민세력의 두목인 궁예를 죽이고 왕조체제를 정비하였다. 왕건은 이에 기초해 마을공동체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촌정(村丁)등을 중심으로 자치적으로 촌락을 경영하는 형태가 많이 남아 있었다.
조선왕조는 이같은 마을을 면리제(面里制)로 발전시켰으며, 권농관 이정이 등의 하급관료를 임명하여 마을공동체에 대한 중앙집권적 지배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마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면면히 계승되었으며 이 속에서 사람들은 촌로(村老)들을 중심으로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고 치루어냈으며, 함께 노동하고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다. 사람들은 서로 공경하고 아겼꼈으며 아무리 어려운 시기라도 쌀 한톨까지 나누어 먹는 공동운명체 정신을 발휘하였다.
역대 왕조들이 끊임없이 마을공동체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여 왔어도 이 땅의 대부분의 노동주체들은 함께 살아가는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생활하여 왔으며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풍속을 살펴보면 삼국시대에는 두레삼 등이 있어 마을의 아녀자들이 집집마다 번갈아가며 모여 함께 노래도 하고 담소도 나누며 길쌈을 함으로써 일의 능률을 올렸다. 봄에는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고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에 감사하며 화합과 단결을 위해 굿과 놀이를 즐겼다. 이때 가면극, 꼭두각시 놀음, 사자춤 등을 벌이며 춤을 추었으며 씨름, 태껸 등을 통해서도 공동체의식을 키워나갔다. 민중제전으로서 무천 등의 국가적 제천 행사가 있었고 삼국마다 국선(화랑), 선인(先人=仙人)등의 집단이 있어 단군조선 이래 공동체의 정신과 전통을 발전시켜 갔다.
고려시대에는 설날, 보름날, 단오절, 상달(10월 15일) 등의 명절날에 마을의 단결력을 강화하는 많은 풍속이 있었으며, 고구려 동맹의 전통 위에 巫와 불교를 통일시켜낸 종합대제전 행사로서 팔관회 등이 있어 공동체간의 결속을 다져나갔다.
조선왕조에서는 향악 등의 마을자치계율이 만들어져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들이 농민 속에서 발전되었으며, 삼국시대 이후 계속되어온 계(契)가 상부상조의 성격으로 발전되어 사교와 비밀결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마을굿 등도 널리 행하여져 공동체의 단합과 단결을 꾀했다.
이렇듯 조선민족은 단군조선이래 오랜기간 동안을, 아름다운 벌과 강산 위에 아름다운 일터를 일궈왔으며, 공동체 중심의 생활과 문화를 누려왔다.
그렇기에 조선민족은 다른 민족과 달리 자신들의 아름다운 산하의 일터와 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이는 왕조를 지키려는 충성심이 아니라 일터와 공동체를 지키려는 강한 애국심과 자주의식을 낳았다.
강한 조국애를 갖고 있었던 노동주체로서의 조선민족은 수없는 외래 침략자를 영웅적 투쟁으로 물리치고 하늘과 땅과 공동체를 지켜 조국의 이름을 빛내왔다.
고구려때에는 단기 2931년(서양기원 598년)에서 단기 2947년(서양기원 614년)에 이르는 17년 동안 수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네차례나 침범해 온 수나라 침략군대를 몰살시킴으로써 수나라를 붕괴시키고 조선민족으로서의 고구려의 강대함과 기개를 세계만방에 과시했으며, 연이어 침범해오는 당나라의 군대도 용감하게 격퇴함으로써 조국의 존엄과 영예를 더욱 빛냈다. 고려 때에는 단기 3326년(서양기원 993년) 10월 부터 30년 간에 걸쳐 3차례나 침범한 뿌리가 같은 요나라의 거란을 굴복시켰으며, 역시 뿌리이 일파로서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제국을 형성한 몽골의 원나라에게도 고려 인민들은 분연히 궐기하여 이들의 침략에 항거하였으며, 이에 왕조가 강화도로 도망하여 조국의 방위를 포기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주권을 빼앗기지 않았다.
조선왕조시대의 임진왜란 때도 지배층은 황망하게 도망갔지만 논밭을 가꾸던 인민들은 분연히 봉기하여 곽재우, 손인갑, 정인홍, 김연의, 고경명 등의 많은 의병장을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결성 항쟁함으로써 왜놈 침략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연이은 후금의 침략에도 인민들은 의병을 결성해 침략군을 패퇴시켰으며, 이후 같은 조선 뿌리족이 지배계급인 청나라의 10만 군대의 침략때에도 왕조는 투항하여 많은 공물을 약조했지만, 인민들의 투쟁은 그치지 않아 이들의 침략을 되돌릴 수 있었다.
조선민족의 노동주체는 공동체에 대한 지배와 약탈을 자행한 반노동주체인 지배층에 맞서서 인간으로서의 본성인 자주성-창조성-통일성을 실현해 가는 끊임없는 투쟁의 전통도 창조하여 왔다. 통일신라 말기에 지배층이 권력쟁투에 휩싸이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수많은 농민과 천민, 노비들이 봉기하였다.
특히 이들중에 양길(梁吉), 기훤(箕萱) 같은 이의 세력은 막강하여 후에 궁예와 함께 통일신라의 왕조를 전복하고 고려를 세우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인민의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2차에 걸친 대규모 노비해방투쟁이 있었으며 천민과 농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첫번째 노비해방투쟁은 만적과 미조이의 투쟁이다. 만적은 원래 고려 무신 정권의 일인자이던 최충헌의 사노였다. 그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설파하며, 고무래 정(丁)자의 깃발 아래 개경 일대의 공사노비 모두를 규합해 봉기하려고 계획하였다. 만적은 상전계급을 모조리 살육하고 동시에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워 삼국이래 귀천의 차별을 근본적으로 철폐하고, 정치 사회적 평등을 모두 균등히 향유케하고자 하였으니 실로 계급적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평등한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실패로 100여명이 참살되고 강물에 던져지고 말았지만 35년 후에 다시 제2차 노비해방투쟁이 일어났다.
이 투쟁은 충주의 관노들에 의해 일어났는데, 이들은 원래 몽골군이 이 땅에 침입하여, 그 위풍이 전역을 석권할 때, 자기 고장에서 봉기하여 끝까지 충주를 사수한 노동주체들이었다. 그러나 몽골군이 퇴거하자 이 전공을 시기한 특권층들이 난데없이 약탈이란 누명을 씌우고 이들을 위기에 몰아넣자 분연히 봉기하여 일시에 양반군을 격파하고 자신들의 더러운 상전들을 도륙하였다.
천민과 농민들의 봉기도 끝없이 전개되었다. 공주 명학소에서는 망이, 망소이를 중심으로 천민들이 소(천민들의 행정구역) 및 천인신분 타파를 외치며 봉기하여 관군 3천을 격파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들어주기로 했던 지배층이 망이의 어머니와 처를 잡아가는 배신을 하자, '칼에 맞아 죽을지언정 기어코 개경까지 쳐들어 가겠다'고 선언하고 다시 봉기하여 청주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다.
명종2년(단기 3505년 - 서양기원 1172년)에는 서북면의 창주(창성), 성주(성천), 철주(철산) 등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고 명종4년에는 서부 40여 성의 농민들이 조위총을 앞세워 봉기하였다.
이외에도 남쪽의 관성(옥천), 부성(서산), 전주, 경주 등에서 농민봉기가 잇따랐고, 운문(청도)의 김사미 울산에 효심이 봉기하였다.
조선왕조에도 수탈을 강화해가는 지배층에 맞선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15세기 중엽이전에는 이시애를 중심으로 함경도 농민들이 봉기하여 절도사와 고을 원들을 처단하는 등 연 4개월 동안을 완강히 투쟁하였다. 그후도 농민봉기가 끊이지 않다가 단기 3892년(서양기원 1559년) 경에 임꺽정을 중심으로 노비, 천인, 양인 등이 강고한 투쟁을 벌였다. 임꺽정은 천민출신으로, 도탄에 빠진 농민들과 무장집단을 결성하여 가렴주구를 일삼던 양반 및 관료들을 응징했으며 종국적으로는 조선왕조를 전복하여 평등사회를 건설할 것을 목표로 수년간 활약하였다. 정여립은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며 대동계를 만들어 지배계급들을 암살하였고 그후 홍경래를 필두로 한 평안도 농민들의 봉기, 진주 농민의 봉기를 필두로 한 임술농민봉기, 제주도의 3차에 걸친 농민봉기 등 헤아릴 수 없는 저항과 투쟁이 계속되어 왔다.
단기 4227년(서양기원 1894년)에는 동학농민을 필두로 인내천(人乃天)에 기초한 평등사회건설과 반제국주의적 기치하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남일대의 농민이 대규모로 봉기하여, 조선민족사 뿐만 아니라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1년여에 걸친 대농민혁명전쟁을 전개하였다. 세상을 뒤흔들던 농민혁명은 일제와 왕조세력들에 의해 전봉준을 비롯한 40만 이상의 농민이 처절하게 참살당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을 치뤄 낸 농민들은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의병이 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한일합방 이후에는 노동자 농민으로서 함께 무장투쟁을 조직하여 이땅에서 가장 치열한 조국해방전쟁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도 전국적 규모의 파업투쟁, 봉기 등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집요한 인간해방투쟁을 전개한 조선민족으로서의 노동주체는 그 과정에서 희생 또한 세계에서 가장 컸다.
근대만 보더라도 동학농민전쟁에서 당시 인구의 4%를 상회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단기 4293년(서양기원 1906년)~단기 4244년(서양기원 1911년)의 의병투쟁에서도 최소한 1만 8천 이상의 사람이 희생되었고, 일제 강점하에서도 해방투쟁을 전개한 인민들이 수없이 학살되었다.
해방 후 제주도항쟁 때에는 400개 부락 중 295개의 부락이 전소되었고 당시 제주도 인구의 1/4에 이르는 인명이 사망하고, 6.25 이후 최근의 광주민중항쟁에서만도 노동자계급이 희생자의 90% 이상이었다.
세계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처절한 투쟁과 피의 희생이 포기되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단군조선사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 민족은 장구한 세월동안 공동체를 중심으로 삶을 영위하여 왔으며 인간의 자주성-창조성-통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세계의 그 어느 민족과도 비교되지 않는 가장 집요하고 가장 위대한 투쟁의 역사적 전통을 창조해 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