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 제20대 고홀(固忽) 천왕(天王)의 역사]
은(殷)나라의 조공(朝貢)
서기전1380년 신유년(辛酉年)에 은나라가 사절을 보내 사례하였다.
이 때는 은나라 19대 왕인 반경(盤庚) 시절인데, 반경이 수도를 박(亳) 즉 은(殷)에 두어 나라이름을 은(殷)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박(亳)은 처음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가 수도로 삼았던 곳이며, 제곡고신씨의 아들 설(契)이 상(商)에 봉해진 이후 서기전1766년에 은나라 시조 성탕(成湯)이 박(亳)을 수도로 삼았다가, 후대에 홍수로 인하여 상(相), 경(耿, 또는 刑), 비(庇), 엄(奄)으로 옮겼다가 반경이 다시 안양(安陽)의 서쪽이 되는 소위 은허(殷墟)라 불리는 박(亳)을 수도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 단군조선에 사절을 보내어 사례한 은나라 왕은 후기 은(殷)나라를 시작한 반경(盤庚)이 되는 것이다. 반경은 서기전1402년부터 서기전1374년까지 재위하였다.
[조선(朝鮮) 제20대 고홀(固忽) 천왕(天王)의 역사]
북흉노(北匈奴)의 반란
서기전1377년 갑자년(甲子年)에 북흉노(北匈奴)가 변방에서 어른 노릇을 하므로 군사를 보내 물리쳤다.
북흉노는 흉노의 북쪽 지역의 부족을 가리키는데, 서기전2177년 이후 흉노의 시조가 된 열양(列陽) 욕살(褥薩) 색정(索靖)이 사면(赦免)되어 약수(弱水) 지역에 봉해진 이후 흉노의 세력이 불어난 것이 되고, 약 800년이 지난 서기전1377년경에 이르러 북쪽의 흉노 부족이 흉노는 물론 흉노 부근의 주변을 장악한 것이 되며, 이 북흉노가 질서를 어지럽히므로 단군조선 본국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북흉노를 진압한 것이 된다.
[조선(朝鮮) 제20대 고홀(固忽) 천왕(天王)의 역사]
해가 무지개를 뚫다.
서기전1370년 신미년(辛未年) 가을에 하얀 태양이 무지개(虹)를 뚫었다.
하얀 태양(白日)은 밝게 빛나는 태양, 해를 가리키는데 가을이라 하늘이 맑아 하얀 태양이 되는 것이며, 이 해가 하늘에 뜬 무지개를 뚫고 지나갔다라는 것이다.
하얀색은 원래 해의 빛깔을 가리키는 색으로서, “해”라는 말 자체가 “희”라는 말과 어원이 같은 것이 된다. 빛의 삼원색이 합쳐져 이루는 색이 하얀색이다.
무지개는 물이 하늘에 떠서 띠처럼 지어진 것이라는 “물지개”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며 수증기 같은 자디잔 물방울에 의하여 태양의 빛이 산란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되는데, 태양이 이 무지개를 뚫고 지나갔다라는 것은 태양이 무지개가 져 있던 곳을 통과하였다는 것이 된다.
즉 하늘에 일정지역에 수분이 있어 태양에 의하여 무지개가 져 있던 상태에서 태양이 점점 무지개가 있던 곳을 지나 통과하였던 것이 되는 것이다. 이는 낮에 태양이 운행하는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관찰된 것이 된다.
[조선(朝鮮) 제20대 고홀(固忽) 천왕(天王)의 역사]
은(殷)나라 서울 부근 시찰
서기전1353년 무자년(戊子年)에 천왕께서 서남쪽으로 행차하여 은(殷)나라 서울에 이르러 다음달에야 돌아왔다.
이 때 은나라의 왕은 제20대 소신(小辛)에서 제21대 소을(小乙)로 넘어가던 시기가 된다. 이때 은나라 서울은 박(亳)으로서 서기전1402년에 은나라 제19대 왕인 반경(盤慶)이 수도로 삼았는데, 서기전1766년에 은나라 시조 성탕(成湯)이 수도를 삼은 곳이기도 하여 중경(中京)에 해당하는 중박(中亳)이 되며, 지금의 안양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소위 은허(殷墟)라고 불리는 곳이다.
고홀 천왕이 아사달에서 서남쪽으로 행차하여 은나라 서울인 박(亳)의 근처에 이르렀고 약 한달쯤 지나 아사달로 돌아왔다는 것이 된다.
[조선(朝鮮) 제20대 고홀(固忽) 천왕(天王)의 역사]
영고탑(寧古塔) 이궁(離宮) 건립
서기전1345년 병신년(丙申年)에 영고탑(寧古塔)을 개축하고 이궁(離宮)을 지었다.
이궁(離宮)은 별궁(別宮)이 되는데, 천재지변이나 전쟁 또는 화재 등 변고가 있을 때 임시수도로 삼은 곳이 된다.
영고탑은 동만주(東滿州)에 위치하며, 위치적으로 대진국(大震國, 발해)의 초기 수도 부근에 있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 진한(眞韓)의 이궁으로는 상춘(常春)의 신경(新宮)과 개원(開原)의 장당경(藏唐京)과 영고탑(寧古塔)이 있는 것이 된다. 상춘은 서기전1285년부터 후기 단군조선의 수도가 된 곳이고, 장당경은 서기전425년부터 말기 단군조선의 수도가 된 곳이기도 하다. 영고탑은 다른 이궁과는 달리 그냥 이궁(離宮)으로 남았던 것이 된다.
[조선(朝鮮) 제20대 고홀(固忽) 천왕(天王)의 역사]
구한(九桓) 지도
서기전1341년 경자년(更子年)에 공공(共工) 공홀(工忽)이 구한(九桓)의 지도(地圖)를 제작하여 바쳤다.
공공(共工)이라는 직책은 글자로 보더라도 건설 또는 공사와 관련되는데, 공홀(工忽)이 공공의 직을 수행하면서 단군조선의 전체 지도를 제작한 것이 된다.
단군조선은 구한(九桓)의 나라이며, 구한(九桓)은 서기전1797년에 시작된 한국(桓國)의 구한(九桓)이기도 하며 구족(九族)이라 하기도 하고,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는 구이(九夷)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桓國)시대는 구한(九桓)으로 이루어진 나라로서 12분국(分國)을 거느린 시대였다. 이 12분국을 12한국(桓國)이라 하는 것이며, 구한(九桓)을 다스린 임금을 한인(桓因)의 9형제라 하여 9황(黃)이라고도 한다. 9한(桓)에 봉해진 9개국에 다시 3국(國)이 더해져 모두 12국이 되는 것이며, 이들의 중심나라인 중앙조정이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땅이 되는 흑수백산(黑水白山)의 땅이 된다.
이리하여 구한의 지도는 지금의 파미르고원의 동쪽에 위치한 한배달조선의 영역을 그린 지도가 되는 것이며, 고대중국에 해당하는 은(殷)나라도 물론 단군조선의 영역 안에 포함되는 것이 된다. 은나라는 역사상 9이(夷)의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사방(四方)의 4이(夷)로 구성되는 나라이다.
[조선(朝鮮) 제20대 고홀(固忽) 천왕(天王)의 역사]
태자(太子) 소태(蘇台) 즉위
서기전1338년 계묘년(癸卯年)에 세상이 아직 평안하지 못한데 고홀(固忽)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太子) 소태(蘇台)가 즉위하였다.
세상이 아직 평안하지 못하다는 것은 당시 단군조선의 정세가 조금 혼란스러웠다는 것인데 아마도 제후들이나 욕살들의 군사적 행동에 질서가 흐트러져 천왕의 명령이 잘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서기전1289년에 개사원(蓋斯原) 욕살 고등(高登)이 서기전1291년에 은나라 제22대 무정(武丁)이 점령한 바 있던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서북의 땅을 군사적으로 차지하여 강성하게 되었으며, 이때 고등이 소태 천왕께 우현왕(右賢王)으로 봉해 줄 것을 청하였고, 천왕은 이를 위태롭다하여 허락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고등이 거듭하여 청하므로 마침내 허락하여 두막루(豆莫婁)라 부르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천왕의 명령이 고등의 요청을 묵살할 수 없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단군조선의 정세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귀방과 서북의 땅은 당시 단군조선의 서남쪽 또는 서쪽에 해당하며 단군조선의 봉군후국(封君侯國)인 구려(句麗)와 몽고리(蒙古里) 그리고 한국시대부터 자치세습의 조공국인 선비(鮮卑) 등의 땅이 되는데, 우현왕(右賢王)의 우(右)는 곧 서방(西方)을 나타낸다.
두막루(豆莫婁)라는 말은 “큰마루, 큰머리”를 이두식으로 표기한 글자가 되는데, 서기전108년에 졸본(卒本)의 천자(天子)이던 한(汗)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동명(東明)이라 칭하며 위씨조선을 멸망시킨 한(漢)나라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북부여를 부흥시킨 고두막(高豆莫)의 두막(豆莫)이 곧 “큰마루, 큰머리”를 표기한 것으로 두막루(豆莫婁)의 약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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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원 9218년 · 배달개천 5918년 · 단기43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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