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성품을 보았다느니, 성품을 통했다느니, 견성을 했다고들 하는데 '눈 떴다'는 차원의 표현은 일단 틀림없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 나름대로 얻어진 결과는 그 사람의 수행력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조금씩 다를 수는 있어요.
그냥 일반적인 우리들 눈으로 어떠한 상태를 보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얼마나 멀리 보고, 얼마나 폭 넓게 보고, 또한 얼마나 깊게 보는지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요?
그러나 성품을 통했다고 해서 곧바로 공완(功完)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칼을 만들었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휘둘러서는 안되는 거예요. 허공을 향해 걸맞지도 않은 칼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사람들이 지금까지 계속 성장해 오면서, 특히나 수행자랍시고 공부하는 자들의 독특한 망상하는 습관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두부 자르듯이 싹둑 베어지는게 아니에요.
본인 스스로 올바르게 체크하지 않으면 얼마만큼 젖어있는지 모릅니다. 여유를 가지고 담담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면 됩니다.
육조혜능(六祖慧能)은 스승을 떠나 조계산에서 15년 이상 때를 기다렸다 하잖아요. 있는 그대로 모든것을 지그시 미세하면서도 깊숙이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 눈으로 보는 것처럼 바라본다는 것은 아니예요. 의식의 눈으로 분별심 없이 그저 그냥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여기서 한 가지, 필히 정신줄 놓지 않고 생각해야 할 포인트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내가 따로 가지고 있는 마음의 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주에 꼭차있는 한얼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볼까요?
한얼은 한의 나툼을 통하여 3.1의 원리로 한알, 한얼, 한울로써 역할은 다르지만 하나의 에너지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그 에너지를 통하여 현상계가 드러났으며 모든 현상계는 3과 6의 원리로 창조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우리들 몸의 구성은 3의 원리인 몸과 마음과 기운으로 만들어졌으며 만들어진 몸과 마음과 기운은 각기 박혀있는 뿌리들이 6개씩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얼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마음의 뿌리인 6개의 작용과 몸의 뿌리인 6개의 작용과 기운(숨)의 뿌리인 6개의 작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거예요.
특별히 정할 것도 없지만 인연 따라 찰나찰나 만나는 대로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의 뿌리인 6가지는 두려움, 기쁨, 슬픔, 싫어함, 탐냄, 성냄을 말합니다.
몸의 뿌리인 6가지는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살갗을 통해 느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짝짓기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의 행위를 통한 느낌이 라고 하는게 좋을 듯해요.
기운(숨)의 뿌리인 6가지는 2개의 콧구멍과 우리들의 피부에 빼곡히 열려있는 털구멍과 땀구멍을 통해서 숨을 쉬며 느끼는 거예요. 향기로움, 독한 냄새, 더움, 추움, 습함, 메마름(건조)
이 모두를 합치면 18가지이며, 다른 말로 18경계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내 마음이 아닌 한얼의 마음으로 통째로 통찰하며 지그시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할 때 어느 날 문득 '한을 통해서 통째로 통한다'라고 문구가 눈앞에서 아른아른 할 거예요.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매일매일 잠을 잤습니다. 자면서 꿈을 한 번도 안 꾸어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꿈을 꾸지 않는 날도 많다는 거예요.
간밤에 꿈을 꾸었거나, 안 꾸었거나 그 날 하루 생활하는데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요. 다시 말해 꿈을 꾸어도 그만, 안 꾸어도 그만이라는 거예요. 평생 꿈을 한 번도 안 꾸어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에게 왜 꿈을 꾸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인간에게 꿈을 통해 뭔가를 느끼고 깊게 생각해보라고 주는 힌트입니다. 잠에서 깨어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밤 꿈들이 어렴풋이 아른거리다 그만 지워져버리지요.
우리는 꿈들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꿈 속에는 실제처럼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현실과 똑같이 말입니다.
우리가 꾸고 있는 꿈은 꿈 속의 꿈이나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 세계도 역시 꿈 속 세상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들의 옛 어른들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 했지 않아요?
보통 수행을 해서 달라졌다고 하는 것을 꿈 속에서 깨어났다고들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꿈 속을 벗어났을까요? 더러는 착각을 하고 있어요. 꿈 속을 벗어났다고 말입니다.
아니에요. 꿈 속을 벗어났다한들 역시 꿈 속 세상인 거예요.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 속에 머물러있되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하고 알고 있는 거예요.
단 하나, 알고서 꿈을 꾸고 있다는 점이 꿈인 줄 모르고 계속 꿈을 꾸고 있는 사람과 다른 거예요.
꿈 속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의 실체가 있나요? 깨달음 역시 깨달을 대상의 실체가 없는 거예요. 온갖 꿈 속에서 어우적대다 꿈놀음의 착각 속에서 깨어난 상태를 이름하야 '깨달음'이라고 표현할 뿐이지요.
이제는 우리들 모두 내가 만들어 놓은, 내가 꾸어진 꿈 속에서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요?
공완(功完)이라는 것은 공덕을 쌓는 일이라 생각하면 될 거예요. 몸뚱이 인연 다하는 날까지요. 죽는 그 날까지 인연 닿는 데로 산이면 산, 시장이면 시장, 농촌이면 농촌, 바닷가면 바닷가, 도시면 도시…
죽는 그 날까지를 완(完)이라고 하지만 사실 완(完)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죽고난 다음에도 실물의 그림자를 통해서 법(法)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공덕을 쌓고 있잖아요. 언제까진지도 모르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