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모든 언어는 천지인 가림토에서.. 제발 정신차리자!!!
훈민정음 알면 중국어는 그냥
중국은 1911년 이후 생긴 나라다 대조선만 있을뿐
++ 한글의 기원 ++ (1편 / 총2편中)
한글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5914년전 배달국 건국 시조 거발한(居發桓) 환웅천황(桓雄天皇)이 신지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신획이라는 기호를 처음으로 창제하였는데 이 신획의 기호가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글과 영어 알파벳의 기원이 된 것이다.
영어도 한국어와 시원이 같은 언어이고 사투리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영어 알파벳 28자 또한 모두 신획(가림토)의 기호와 모양도 똑같고 음가도 똑같으며 자모의 이름까지도 똑같다.
그러나 지금껏 영어와 한글이 서로 다른 글자라고 여겨왔던 것은 한글은 붓으로 써서 글자의 본획과 끌림획이 명확히 구별되어 본획대로 온전히 전수되어 왔지만 영어는 펜으로 흘려서 쓰는 흘림체였기 때문에 글자의 본획과 끌림획이 구별이되지 않고 한 덩어리 글자로 인식되어 왜곡된 채 전수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어의 필기체에서 펜끌림획만 걷어내면 모두 한글과 똑같은 모양의 글자가 된다. 본래 한글과 영어는 모두 혁덕이 만든 신획을 쓰고 있는 것이며 기원이 같은 문자인 것이다.
신획은 거발한 환웅천황이 천산에서 내려와 배달국을 건국하면서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혁덕이 만든 기호이다. 여기서 신지(神誌)는 고대 환웅과 단군시대의 관리 또는 사관과 같은 관직명이고 혁덕이 이름이다.
혁덕이 기호를 만들게된 과정에 따른 일화가 전해지는데 실로 극적이다.
글자 만들기를 고심하던 혁덕은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가 암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 활을 쏘려고 하였으나 순간 사슴이 돌아쳐 달아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그에 달아난 발자국을 쫓아 헤메었는데 강기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어지럽게 찍혀있는 사슴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머리를 숙여 발자국의 방향을 살피다가 불현듯 방향성이 문자 만들 방법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발자국은 어지럽게 찍혀 있었지만 향하는 쪽은 절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옳지..! 이것이 기록으로 보전하는 방법이 되겠구나"
"이와같이 방향대로 가르면 되겠어"
"발자국 방향으로 사슴이 향한 쪽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처럼 글자의 뜻을 방향으로 표시하면 되겠어...!"
이렇게 해서 혁덕은 그날로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만물 운행 현상을 도식으로 나타낸 태극순환 그림 위에 다섯방향을 표시한 기호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 모음인 ( ㅗㅓㅏㅜㅡㅣ)인 것이다. 이는 또한 사슴 발자국의 방향을 보고 착안하여 만들어진 기호문이라 해서 녹도문(鹿圖文)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동안 인터넷 등에서 "녹도문은 사슴뿔의 모양을 보고 만든 문자라느니... 갑골문(한자)의 시원이 되었다느니..."하면서 근거없는 낭설만이 널리 퍼졌었는데 이들은 모두 사실이 아닌 왜곡된 정보들이다.
암사슴을 쫓았다고 했는데 사실인 즉슨 암사슴은 뿔이 없다. 따라서 사슴의 뿔을 보고 뿔모양의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치에도 닿지않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또한 발자국의 방향을 보고 깨우침을 얻어서 방향을 가르는 기호문자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방향성도 없는 글자를 녹도문이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방향성이 드러난 문자에서 녹도문의 근거를 찾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에 보면 "훈민정음은 옛 전자(篆字)를 본뜬 것이다."라고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한 전자(篆字)라는 글자가 바로 녹도문이요, 혁덕이 만든 신획을 말하는 것이다.
신획이라는 기호는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렸는데 신전이라고 불리고 신서라고도 불리웠으며 또한 신부라고도 불리운 글자이다. 이를 정리하면 신획은 신을 나타내는 획이라는 뜻으로 "ㄱㄴㄷ~~ ㅓㅏㅗㅜㅡㅣ~~"등의 자획을 이르는 말이고 신전은 이들 자획을 조합하여 음절을 나타낸 "가나다~~ 각난닫~~"와 같은 글자를 이르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신획의 기호로 쓰는 글자를 신전이라 하였으며 신전을 전자 또는 전문이라고 했던 것이다. 참고로 신부는 신을 나타내는 부호라는 뜻이고 신서는 신을 나타내는 글씨라는 뜻이다.
여기서 글자들이 모두 신을 나타낸다고 했는데 그 신이라는 의미는 삼신오제사상에서 말하는 우주의 입자에 포함되어 있는 삼신의 기운을 말하는 것이다. 삼신은 (음-,양+,중0) 삼일신의 기운을 말하는 것인데 삼일신이란 뜻은 하나의 속에는 셋의 기운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셋의 기운을 풀어 설명하면
수렴하여 머금는 (음)의 기운과
발산하여 내뿜는 (양)의 기운과
음양을 주관하여 교역하는 (중)의 기운이다.
이 세가지 기운이 서로에게 드나드는 작용을 일으키며 현상계가 운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에 포함된 삼신의 기운이 현상계에 발현되고 운행해 가는 그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이 삼신오제사상인데 오제란 삼신의 작용을 다섯가지 주제로 설명 했다는 말이다.
또 다섯가지 주제는 오제와 오령으로 나누었는데
오제는
하늘이 주제한다는 다섯가지 기운인데 (생-장-염-장)한다는 것이며 천하대장군이 주제한다고 상징화 하였다.
오령은
땅이 수령한다는 다섯가지 기운인데 (집-회-귀-함)한다는 것이며 지하여장군이 주제한다고 상징화 하였다.
여기서 집-회-귀-함은 삼신의 기운으로 발현된 하나가 일생을 운행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잡을 집은
우주의 기운을 잡고 하나로 발현되어 뽐아져 나오면
모을 회는
우주의 기운을 모으고 여름을 열고 난 뒤에는
돌아갈 귀는
뽐아져 나온 기운은 근본으로 돌아가 깨끗이 가시며
머금을 함은
음방에 머금키어 한 번 순환을 거르며 다시 개벽할 때를 기다린다는 논리이다.
이와 같은 삼신오제사상을 하나의 도식으로 나타낸 그림이 태극이다.
그래서 글자 만들기를 고심하던 혁덕은 사슴 발자국에서 방향기호로 글자 만들 것을 깨달은 뒤에 우주의 기운이 운행하는 이론을 정립해 놓은 삼신오제사상에서 핵심도식인 태극 그림의 다섯 방향에 배정된 (집-회-귀-함)의 방향을 표시하는 방향기호로 신획을 만든 것이다.
신획은 이와같이 우주의 기운이 삼신으로 작용하여 운행하는 원리를 방향기호로 나타낸 글자이기에 그 이름을 신이라고 정의하여 이름하였던 것이다.
++ 한글의 기원 ++ (2편 / 총2편中)
세월이 흘러 가륵(嘉勒) 단군 때에 와서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언어혼란이 심해져서 민족이 서로 뿔뿔히 흩어져 가고 있었다. 이에 가륵 단군은 그것을 방지하고자 대대적으로 말소리를 통일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삼랑 을보륵에게 말소리 통일작업을 위해 국문을 정선 할 것을 명 하였다. 그리하여 을보륵이 난해한 국문에서 바른소리 38자를 정선(精選 = 정밀하게 골라 뽑음)하였는데 그것이 환단고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가림토(加臨土=加臨多) 38자인 것이다. 여기서 삼랑(三郞)은 삼신시종랑(三神侍從郞)의 줄임말로써 삼신(三神)을 모시고 제사(祭祀)를 지내는 재상급(지금의 국무총리) 정도의 벼슬이라고 전해진다.
그 이후 세종대왕은 대륙의 정세가 혼란해져 대륙에 있는 한양(지금의 산동성 제남시)에서 한반도에 있는 한경(지금의 서울시)으로 천도를 단행했는데 한반도에 와서 보니 똑같은 한자를 사용하지만 중국(대륙조선의 수도권)에 있을 때와 한반도 원주민이 사용하는 발음차이가 심하여 언어소통이 원만치 않아 고심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 말소리 통일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징심록(澄心錄)에 쓰여져 있는 가림토 38자 언문을 보고 훈민정음을 제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대륙에서 한반도로 천도해 왔기 때문에 원주민들이 쓰는 언문(말소리 글자)의 정확한 발음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대군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그들도 모르기는 매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먼저 한반도 전라도 정읍으로 시집을 와 있었던 정의공주(세종대왕의 세째딸)에게 물어 보았는데 공주는 즉시 그 발음을 풀어 진상하였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너무 기뻐한 나머지 정의공주에게 크게 칭찬하며 노비 수백을 하사품으로 내려줬다는 기록이 '죽산 안씨 대동보'에 남아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세종이 방언을 할 줄 몰라서 고민하다가 훈민정음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작업을 혼자 완성했다기 보다는 박연이나 신미대사 그리고 정의공주 등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작업을 진행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죽산 안씨 대동보 +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
대동보를 해석하면, 세종대왕이 중국에서 쓰던 한자와 한반도의 한자가 서로 발음 차이가 큰 관계로 언어소통이 어려운 것을 심히 고심하다가 훈민정음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한자의 변음(변한 소리)에 토착(한자에 발음기호를 붙임)하는 작업을 끝내 마무리 지을 수 없어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그들 또한 모두 풀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의공주에게 내려 보냈더니 공주는 즉시 풀어서 진상하였다. 이에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이렇듯 세종은 각고의 노력 끝에 잊혀져가던 우리민족의 말소리문자 가림토 38자를 취해서 그 기호의 바른소리를 찾아내시고 그 소리의 이치를 밝혀서 28자로 제정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놓고 문자해설집을 만들라고 명하여 이에 집현전 학사 정인지 등이 해설집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훈민정음해례본(훈민정음 해설본)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훈민정음해례본의 절반은 세종이 손수 편찬하였고 나머지는 집현전 학자들이 편찬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종대왕은 잊혀졌던 배달국시대의 '신획(가림토)' 언문을 계승 발전하여 백성들이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실용화 시킨 한민족의 위대한 성군이다.
<김용성 태극한글연구소장의 강의를 듣고서 청류 홍삿갓이 정리하여 씀.> 2017-10-15-0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