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뿌리는 정말 있는 것인가?
우리 국민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상은 무엇이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미래는 과연 가능성 있는 것일까? 생각을 가진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작금의 현실에 빗대어 떠올려 보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어느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정치판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고 교육이 그렇고 분야가 얼른 떠오르지 않는 것은 매일매일 접하는 정보들이 삿됨으로 가득하기 때문이요. 먹고 사는 일에 치중하다 보니 그만큼 사사건건 이면을 들여다볼 여유로움을 잃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니, 배달민족이니 하는 이야기는 한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반만년이면 자그마치 5천년 전인데 지금은 서기2005년이니 이것하고는 상관 없는 것 같고, 배달민족하고 한민족 하고는 또 무슨 연관이 있을까,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오늘의 현실을 뒤집어 보고 해결점의 실마리가 있음직해서 꺼내본 단어다.
제목에 언급한 것처럼 성리학에 대한 몇 마디를 해보고자 하는 것인데 정말로 원인은 그것이었노라고 주장하고 싶다. 성리학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유교나 도학은 아마들 들어 보셨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놈이 다 그 놈이다. 성리학은 중국의 사상적 근간을 이루는 주류인 유교가 사회 체제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 혹은 종교적으로 사상적인 면이 가미되면서 철학적 체계를 갖춘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주자학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이理와 기氣의 개념 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우주의 생성과 구조, 나아가 인간의 심성연구, 인간사회의 이상 理想을 이루기 위한 형이상학적 실천 철학이었다.
춘추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는 공자의 노력에서 시작되어 맹자와 송·명 시대를 거치며 다듬어지고 고쳐져 체계적으로 정리 되었다. 현재 중화사상의 밑그림이 기도한 성리학은 태극설, 이기설, 심성론, 성경론 등으로 세분되어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말 충렬왕때 원元에서 안향이라는 사람이 가져온 讀聆愍紈를 연구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조선조 성균관 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체계로 인식하여 고려 불교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조선조 기득권자들에 의해 유교를 국시로 삼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를 지지하여 조선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 하륜 권근등이 숭상의 대상으로 까지 끌어올려 법전의 재정과 기본정책이 설정되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 또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수용 할 것을 주장하기 도 하였다. 그 외 조광조를 거쳐 이퇴계, 이율곡으로 이어져 더욱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물론 성리학과 달리 유학은 인간성회의 큰 틀을 이야기 하고 성리학은 理와 氣를 가지고 형이상학적인 知的차원을 연구하는한 부류로 간주하는 것 이라고는 하지만 그 뿌리가 지극히 같고 우리 것이 아닌 다른 민족의 정서와 관점을 원초적으로 가진데에 우리민족의 그것과는 괴리가 생긴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그래도 이만큼이나 먹고 살만큼의 문명을 누리는 데에는 조선의 실학사상(퇴계,율곡의 성리학적 기조가 실직적으로 성장한 것, 다시 말해 국방력강화, 경제적 부강, 사회성의 구현 등의 현실적 도입부가 채용된 것)이 일조한 것도 인정해야한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반대적 폐해를 더욱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다. 성리학을 도학유교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형이상학인 도학이 불교의 참선參禪사상과 도교의 신선神仙사상의 영향을 받고 태어난 사상이다 보니 비현실적인 논리 전개에 따른 경직성으로 점점 비 생산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해갔다. 얼핏 보기에 이상적이며 신비스러워 보이나(모든 이론이 그렇듯이)현실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곤 하였던 것이다. 비현실적인 논리에 매여 마치 갖가지 복잡한 문제에 사로잡혀 자아를 상실한 보통의 인간족속과는 차원이 다른 신인류 처럼 앨리트족 행세를 하곤 하였다.
예를 들어 자기가 속한 파벌의 공통적 지향노선에 목숨을 걸기도 하고 잘못된 줄 알면서도 오악지심惡惡知心이 없는 자신의 지도자를 무조건 따라 나서기도 하였으며 반대파와의 시시비비를 일생을 걸고 논쟁하다 보니 정치적인 실무엔 늘 박자가 맞지 않았던 예가 허다 했다. 늘 시끄러웠던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전조증상이 이미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도리와 이치가 다 그러하지는 않을 진대, 대국大國 운운하고 성인의 지도력을 과대 포장하여 마치 자신의 이론이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실무와는 동 떨어진 고담준론이나 탁상공론으로 일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또한 기득권자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수많은 예절법과 신분의 상속을 위한 갖가지 제도가 채택되었으며 선현의 추모개념이었던 제사가 숭배적 음사로 변질된 것 또한 이때의 일들이었다. 가문의 명예와 뜻을 굽히지 않는 의리의 중시로 진실을 외면하고 제 욕심에 눈이 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 두 가지의 문제점만으로 고도의 철학적 학문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 같아 드러나는 몇 가지를 더 추가해보자. 우리의 역사적 진실 속에는 배달신시倍達神市라 했던 세계유래가 없던 유수민족 한웅의 시대를 빼더라도 단군이래 4400여 년에 이르는 최고도의 문화가 있다.
고조선, 고구려(신라,백제), 발해(통일신라), 고려로 역사가 이어지는동안 합리적인 민주주의가 시행되고 있었으니 지금의 허례허식과 남녀관계의 불평등 과학기술 등의 실용학문을 천시하여 국력쇄퇴. 당리당략 논쟁, 자주적 주권의 중국 예속, 무력武力을 천시해 끝없는 외침의 빌미제공, 근대화의 물결에서 뒤처짐, 복잡하고 쓸데 없는 존칭, 예속관계의 성행 등의 갖가지 성리학적 폐해가 생길리 만무했다. 그러나 기회도 있었다. 이런 문제를 짚어낸 사람이 실학자 정약용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성리학자들에게 밀려났고 실학의 배척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들 정서적 밑바탕에 뿌리깊게 깔려 있게 된 것이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위도상으로 한강을 넘기 힘들 것이라는 쌀의 재배지를 두만강 너머 까지 끌어올린 부지런한 민족이 한민족이다. 그런데 환상적 이론에 사로 잡혀 일은 한하고 공론(회의)만 한다. 모두 '나와는 생각이 다른 너'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즉리性卽理라는 이론체계 즉,성리학으로는 안된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모든 이론은 재정립 되어야 한다. 아니 신인처럼 살았던 우리 역사 속 선조들의 진실된 지혜를 모두 복원해야 한다. 그러면 대한민국도 살고 한민족도 정신차리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