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7만여년 전 마고성에서 백소씨족의 지소씨에 의해 "오미의 변(五味의 變)"이 일어나고 4개 지파 황궁씨족, 청궁씨족, 백소씨족, 흑소씨족은 마고대성의 보호를 위해 출성하게 된다. 그 후 황궁씨에게서 유인씨에게로 전달되어진 복본의 맹세는 수천년간 한국과 배달국을 거쳐 단군조선에 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단군조선에 이르러 또 한번 오미의 변과 같은 대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요(堯)와 순(舜)에 의해 저질러진"오행의 화(五行의 禍)"이다.
이 대목을 부도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요가 곧 9주(九州)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5중에 사는 제왕이라 칭하여,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와 대립하였다. 때에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부문(負文)과, 명협(蓂莢)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신의 계시라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역(曆)을 만들고, 천부(天符)의 이치를 폐하여 부도(符都)의 역을 버리니, 이는 인세 두번째의 큰 변이었다. -<중략>- 이에 임검씨가 그것을 심히 걱정하여, 유인씨(有因氏)의 후손 유호씨(有戶氏)의 부자로 하여금 환부(鰥夫)와 권사(權士)등 100여인을 인솔하고 가서 그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위 내용에서 부도는 단군왕검께서 계신 조선을 말하며 유호씨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유인씨와 마고성 4개 지파의 장손인 황궁씨를 일컫는다. 또한 임검씨는 단군왕검, 단군임검을 일컫는 호칭이다.
위 내용을 살펴보면 요의 행동에 크나큰 문제가 되는 부분이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채 근본 이치를 무시한 역을 만들고, 마고성에서 부터 지켜온 부도의 이치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옛말과 같이 "요"가 선무당이 되었다는 소리다.
오행(五行)은 사상(四象)을 뭉게고 그 위에 세워서는 안되는 개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숫자에는 단순한 명칭을 넘어서 아주 많은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데, 특히 1~9까지의 자연수는 숫자들 마다 고유한 개념이 내포되어 있는 세상이치를 기호로서 표현해 놓은 한의 모습들이다.
그리고 숫자가 나열되는 순서 역시 마찬가지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차적으로 오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가을이 봄이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셋에서 넷으로 가는 것이 순서이며, 생명이 생성되어 가는 최초 과정도 하나에서 둘,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여덟으로 배열되어 가는 것이 자연적 원칙이다. 홀수에서 짝수로 변화되는 과정은 최초 "하나"에서 "둘"로 갈라진 경우외에는 줄곧 짝수에서 짝수로 갈라져 나갈 뿐이다. "하나"에서 "둘"로 갈라진 이후 부터는 홀수에서 짝수로 갈라지는 경우는 없다.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여덟으로 여덟에서 열여섯으로 분열되어가는 것이 세포분열의 원칙이다. 물론 최초에 하나에서 둘로 갈라진 그 원칙은 바탕에 깔린체 갈라져나간 하나들이 계속적으로 둘이 되는 원칙은 변함이 없다.
이는 우리 인간의 최초 생성 과정인 생식세포의 형성과정에서 일어나는 세포 분열인 감수분열의 이치로 잘 나타나있는 자연의 순리라 하겠다.
감수분열의 예를 보아도 알수있듯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는 흐름의 순서가 있다. 이런 자연적 원칙을 개무시한 학문이 음양오행론이다. 음양, 즉 하나에서 둘로 갈라져서 넷이 되어야 이치상 맞는 이치인데, 넷을 뭉게고 다섯을 부각시킨 학문이 음양오행 이라는 말이다.
그런 어긋나는 이치를 가지고 세상을 혼탁하게 하니 유인씨(有因氏)의 후손 유호씨(有戶氏)가 요와 순에게 대노(大怒)한 내용이 부도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유호씨가 수시로 경계를 하였으나, 순은 예, 예, 하고 대답만 하고는 고치지 않았다. 그는 끝내 요의 촉탁을 받아들여 현자를 찾아 죽이며, 묘족(苗族)을 정벌하였다. 유호씨가 마침내 참지 못하여 꾸짖고, 그를 토벌하니, 순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요는 몸을 둘 땅이 없으므로, 순에게 양위하고, 자폐(自閉)하였다. 유호씨가 이르기를, 오미의 재앙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시 오행(五行)의 화를 만들었으므로, 죄는 땅에 가득하고, 북두성은 하늘을 가리어, 수사(數事)가 많이 어그러져, 인세(人世)가 곤고(困苦)하여 졌다. 이는 불가불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알지 못하고 범하는 자는 혹 용서하여 가르칠 수도 있으나, 알고 범하는 자는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하고 곧 차자(次子) 유상(有象)에게 명하여 권사(勸士)를 이끌고 무리를 모아 죄를 알리고, 그를 치게 하니, 수년 동안 싸워서, 마침내 당도(唐都)를 혁파(革罷)하였다. -<중략>- 이 때에 우가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유호씨에게 항거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였다.
우가 마침내 부도를 배반하고 도산(塗山)에 단(壇)을 설치하였다. 서남 제족을 정벌하여, 제후(諸候)라 하고, 도산에 모이게 하여, 조공을 받았다. 이는 부도 제시(符都際市)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으나, 폭돌(暴突)한 것이었다. 이에 천하가 시끄러워, 부도로 도망하여 오는 자가 많았다. -<중략>- 유호가 곧 권사(權士)를 보내, 우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요는 천수(天數)를 몰랐다. 땅을 쪼개서 천지를 제 멋대로 하였다. 기회를 틈타 독단(獨壇)을 만들고, 사사로이 개나 양을 기르기 위하여, 사람을 몰아낸 후, 자칭 제왕이 되어, 혼자서 처리 하였다. 세상은 토석(土石)이나 초목처럼 말이 없고, 천리(天理)는 거꾸러 흘러, 허망에 빠져버렸다. 이것은 거짓으로 천권(天權)을 훔쳐, 사욕의 횡포를 자행한 것이다. 제왕이 만약 천권을 대행하는 것이라면, 능히 일월(日月)을 개폐(開閉)하여, 만물을 조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제왕이란 수의 요체(數諦)요, 사람이 거짓으로 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으로 칭하면, 다만 사기와 허망의 나쁜 장난이 될 뿐이다. 사람의 일이란 증리(證理)요, 세상의 일이란 그 증리한 사람의 일을 밝히는 것이니, 이 이외에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도의 법은 천수의 이치를 명확하게 증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무(本務)를 수행하게 하고, 그 본복(本福)을 받게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비록 선후는 있으나, 높고 낮음이 없으며,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비록 친숙하고 생소한 것은 있으나, 끌어들이고 몰아내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해가 평등하며, 제족(諸族)이 자행(自行)하는 것이다. 오직 그 오미(五味)의 죄책을 보속(報贖)하는 것과, 대성의 일(大成之業)을 회복하는 것은, 언제나 일인 희생의 주관아래 있는 것이요, 여러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이 일은 예로부터 세상 일(人世之事)에 섞이지 아니하였다. 황궁(黃窮)씨와 유인(有因)씨의 예가 바로 이것이다.
또 그 소위 오행(五行)이라는 것은, 천수(天數)의 이치에 이러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방위(方位)의 중앙 5는 교차(交叉)의 뜻이요, 변행(變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하는 것은 1로부터 9까지 이므로, 5는 언제나 중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9가 윤회하여, 율(律)과 여(呂)가 서로 조화를 이룬 후에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니, 이는 기수(基數)를 이르는 것이요, 그 5,7이 크게 번지는 고리(大衍之環)에 이르면, 그 자리가 5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4,7이 있는 것이다. 또 그 순역(順逆) 생멸(生滅)의 윤멱(輪冪)은 4요, 5가 아니니, 즉 원수(原數)의 9는 불변수이기 때문이다. 또 윤멱이 한 번 끝나는 구간은 2X4=8 사이의 7이요, 5가아니다. 또 그 배성지물(配性之物)은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다섯 중에서 금(金)과 토(土)를 왜 따로 구별하는가. 그 약간의 차이 때문에 구별을 하고자 한다면, 기(氣)풍(風)초(草)석(石)따위는 어찌 같이 들지 않는가. 그러므로, 다 들자면, 수가 없는 것이요, 엄별해서 들자면, 금,목,수,화 혹은 토,목,수,화의 넷이요, 다섯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 물성(物性)을 어떤 이유로 수성(數性)에 짝지우는가, 수성지물(數性之物)은 그 원수가 9요, 5가 아니다. 그러므로 5행의 설은, 참으로 황당무괘한 말인 것이다. 이로써 인세를 증리(證理)하는 일을 무혹(誣惑)하여, 곧 천화(天禍)를 만드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또 그 역제(曆制)는, 천수(天數)의 근본을 살피지 못하고, 거북이나 명협의 미물(微物)에서 근본을 취하였으니, 요는 또 무슨 속셈인가. 천지의 만물이 다 수에서 나와, 각각 수를 상징하고 있는데, 하필 거북과 명협 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물사(物事)에, 각각 그 역(曆)이 있으니, 역이라는 것은 역사(歷史)다. 그러므로, 요의 역제는, 즉 거북과 명협의 역이요, 인간의 역이 아니니, 그것이, 인세(人世)와 불합(不合)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삼정(三正)을 번복하여, 구차스럽게 맞추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마침내 하늘의 죄를 끌여들였다. 역(曆)이라는 것은, 인생증리(人生證理)의 기본이므로, 그 수는 몸소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역이 바르면, 천리(天理)와 인사(人事)가 증합(證合)하여 복이 되고, 역이 바르지 못하면, 천수에 어긋나 화가 되니, 이는 복은 이(理)가 존립(存立)하는데 있고, 이는 정증(正證)에 존립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역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은, 인세 화복(禍福)의 발단이니, 감히 삼가 하지 않을 것인가. 옛날, 오미(五味)의 화(禍)가, 한사람의 미혹에서 나와서, 만대의 산사람(生靈)에게 미치고 있는데, 지금 또 다시 역의 화가, 장차 천세(天世)의 진리에 미치고자 하니, 두렵기만 하구나.
천도(天道)가 돌고 돌아, 종시(終始)가 있고, 종시가 또 돌아, 4단씩 겹쳐 나가, 다시 종시가 있다. 1 종시의 사이를 소력(小曆)이라 하고, 종시의 종시를 중력(中曆)이라 하고, 네 번 겹친 종시를 대력(大曆)이라 한다. 소력의 1회(回)를 사(祀)라 하니, 사에는 13기(期)가 있고, 1기에는 28일이 있으며, 다시 4요(曜)로 나뉜다. 1요에는 7일이 있고, 요가 끝나는 것을 복(服)이라 한다. 그러므로, 1사에 52요복이 있으니, 즉 364일이다. 이는 1,4,7성수(性數)요, 매 사의 시작에 대사(大祀)의 단(旦)이 있으니, 단과 1은 같기 때문에 합하여 365일이 되고, 3사의 반(半)에 대삭(大朔)의 판(?)이 있으니, 판은 사의 2분절이다. 이는 2,5,8법수(法數)요, 달이 긴 것이 1일과 같기 때문에, 제 4의 사는 366일이 된다. 10사의 반(半)에 대회(大晦)에 구가 있으니, 구는 시(時)의 근원이다. 300구가 1묘(?)가 되니, 묘는 구가 눈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9633묘를 지내서 각(刻), 분(分), 시(時)가 1일이 되니, 이는 3,6,9의 체수(體數)다. 이와 같이, 끝나고 또 시작하여, 차차 중력(中曆)과 대력(大曆)에 미쳐서, 이수(理數)가 곧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저 요의 이 세가지 잘못은, 허위(虛僞)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가히 부도 실위(實爲)의 도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허위는, 안에서 이(理)가 불실하여, 마침내 멸망에 이르고, 실위는, 이(理)가, 나를 언제나 만족하게 하여, 스스로 함께 존립한다."
아주 먼 옛날 옛적 전설과 같이 취부되어버릴 일이겠지만, 요와 순에 의해 자행된 "오행의 화"는 오늘날 중국의 세계 중심 국가가 되는 욕망으로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간 중화사관과 일제식민사관으로 인해 한민족 역사가 송두리째 왜곡되고 천부경, 삼일신고와 같은 우리의 경전을 공부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인 것은 모두 "오행의 화"로 인한 우리 민족 정신적 재앙이라 할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국가 체제들 역시 "오행의 화"로 인한 폐해로 빚어진 세상이기에, 민주주의건 사회주의건 음양오행의 중심자적 역할자 즉 세상의 중심으로 인식하기에 국민 위에서 굴림하는 것이다.
그러나 홍익사상에 입각한 체제는 사상의 중심에 놓인 중심자적 개념이 아닌, 감수분열의 예와 같이 "하나"에서 "둘"로 나뉘고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여덟"으로 나누어져 팽창되어져 극을 이루어 생성된 "하나"라는 것이다. 즉 순리에 따른 모든 개념이 어우러져 완성된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음양오행에서의 중심자리 "하나"는 "하나"로서의 개념은 사상철학과 다르지 않으나, 순리적으로 팽창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중간에 개입함으로 순리대로 진행되지 못하게 하는 "하나"와는 크게 다르다.
결과적으로 사상의 중심은 비어있는 공(空)의 공간, 허공(虛空)이라는 말이다. 중심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라고 해야 더 맞을듯 싶다. 없는 자리를 억지로 만들어 들어앉으려하니 탈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유호씨가 순에게 위의 내용으로 호통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순리를 어긋나게 하고 역행함으로 돌아야 할 개념은 돌지 못하고, 두 개념이 서로 쌍방 교차로 흘러야 할 경우는 중앙에 버티고 있음으로 흐르지 못하게 하고 정지시킴으로 죽을 자리를 만들어 놓은 화가 바로 "오행의 화"라 할 것이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순리에 맞지않은 중심 자리에 들어가려고 야단들이다. 어리석은 짓이다. 그 자리는 자리라고 할 수 없는 역행의 공간으로서 인간으로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리다. 살려면 순리에 맞게 다른 요인들과 함께 팽창하여 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을 잘 보라. 사람을 이루는 구조 중에서 절대적인 중심이 있는가.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사람으로서 삶을 사는데 옳곧게 살 수 있겠는가. 이처럼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사람은 살려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 어느 존재들이건 "한"의 삶을 좌지우지 할 권한은 없다. 다수가 순조롭게 가기위한 질서는 존중하고 따라야 하겠지만, 사람을 우상으로 우러르고 그 사람으로 인한 삶이 조정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는 그 옛날 포도를 먹음으로 타생명을 취함에 일어난 "오미의 변(五味의 變)"과 함께 천기를 흐트러뜨린 "오행의 화(五行의 禍)"에 대한 폐해이고 대재앙이라 할 것이다.
끝으로 사상적 개념이 정리되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사례가 있어 그 내용을 덧붙이고 끝맺으려 한다. 배달문화연구원의 배달전서에 따르면 "옛조선 44대 구물단군 재위 10년(을축년) BC 416년에 서백원(徐伯元)이 태양(太陽), 태음(太陰), 소양(小陽), 소음(小陰)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저작하여 올리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후 오행의 화로 인하여 점차적으로 사장되어 흘러오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이씨조선에 이르러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선생에 의해 다시금 정리되어 진다. 이제마(李濟馬)선생께서 활동하던 이씨조선 역시 음양오행이 주된 학문으로 여겨지고 있었기에 사상으로 정리된 사상의학(四象醫學)은 그리 주목받지 못하였다.
우리가 또 한번 사상에 대해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제마선생의 임종 때 남긴 말이다. 이제마선생은 후대를 위해 동의수세보원, 사상인변증론(四象人辨證論)등을 저술하고, 1900년 6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면서 "나는 이제 가지만 백년 후에 온 세상은 사상의학으로 귀일(歸一)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로부터 120년이 흘러온 서기 2020년 지금, 이제마선생의 마지막 말씀과 같이 사상에 대한 잘못된 사관을 바르게 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인지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껏 공부하면서 배달문화원 임보환 원장은 "사상은 의학적 개념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도 깊고 광범위하다며 사상은 철학이다"라고 말을 한다.
부도지는 "오행의 화"가 일어난 이후 어둠속으로라는 소제목으로 신라의 탄생과 함께 끝을 맺는다. 여기서 어둠이란 "오행의 화"로 사상의 이치가 어긋나고, 어긋난 이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두워진 의식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곧 정신의 어두움을 뜻한다. 정신이 어두위지면 몸도 마음도 어두워지고 영혼 마저 어두운 영혼이 생기게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혼탁하고 정신없이 혼란스러운 세상이 되어 왔었다는 소리다.
그럼 어둠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본래의 빛을 보면 될 일 아닐런가.
개천 홍익사상의 치침서 천부경, 삼일신고, 인간삼백육십육사!!!
옛 말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던가. 천부경, 삼일신고, 인간삼백육십육사는 새 술을 담기 위한 새 부대이다.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핵심이라는 말이다.
"천부경", "삼일신고", "인간삼백육십육사" 공부하자!!!
그리하여 오행적 개념에서 본 사상이 아닌 개천 홍익적 개념으로 본 사상을 복본(復本)시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