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고진(高辰)을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삼다.
서기전120년 신유년(辛酉年)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이 없었다.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수비토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城柵)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右渠)를 대비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삼았다.
당시 위씨조선의 3대왕인 우거의 세력이 강했던 것이 되는데, 지금의 요하가 되는 서압록 지역을 고진(高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여 공을 세우니 고구려후로서 제후로 봉한 것이며, 일명 고리군왕(槀離郡王)이라고도 한다.
고리(槀離)는 구려(句麗:구리)와 같은 소리를 나타낸 글자이며, 서기전1285년 이후에는 고씨(高氏)의 구려국(句麗國)이므로 또한 고구려(高句麗)라 하는 것이 되고, 후대에 구려국(句麗國)을 고리군(槀離郡)이라 부른 것이 된다.
고주몽(高朱蒙) 성제(聖帝)의 고구려(高句麗)라는 국명은 가깝게는 해모수의 북부여(北扶餘)가 구려국 출신인 해모수(=고모수)의 나라이므로 일명 고구려이며, 멀게는 서기전1285년 고씨 단군 천왕이 다스리던 구려국에 고씨 천왕족(天王族)이 봉해져서 고구려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 해성(海城) 이북 50리를 우거(右渠)에게 빼앗기다.
서기전118년 계해년(癸亥年)에 우거(右渠)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海城) 이북 50리의 땅을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이때 우거왕이 동쪽으로 서압록(西鴨綠)이던 지금의 요하(遼河)를 건너와 장당경(藏唐京) 남쪽에 위치한 해성(海城) 평양의 북쪽 50리 땅을 차지하였던 것이 된다.
다. 해성(海城) 수복 실패
서기전117년 갑자년(甲子年)에 천왕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달이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라. 해성(海城) 격파
서기전115년 병인년(丙寅年)에 천왕께서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海城)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니 구려하(九黎河)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고우루 천왕께서 친히 군사 5,000을 거느리고 해성(海城)을 습격하여 우거(右渠)의 군대를 격파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살수(薩水) 유역을 수복하니, 우거의 군대가 물러나고 구려하의 동쪽이 북부여에 귀복하였던 것이다.
여기 구려하(九黎河)가 정확이 어느 강인지는 이름으로만 보면 불명하나, 서압록의 서쪽에 있는 강이 될 것이며, 구(九)라는 글자가 있어 아홉 갈래의 강이라고 보면 아마도 지금의 요하의 상류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인데, 소위 열하(烈河)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보이며,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던 구려국(句麗國)이 동서로 걸쳐 있는 지역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구려하(九黎河)는 서안평(西安平) 부근에 있는 강으로서 지금의 서요하(西遼河) 상류 지역이 분명하게 된다. 한편, 요동반도 바로 서쪽에서 남으로 굽어 흐르는 요하 즉 서요하의 중하류 지역은 서압록(西鴨綠)이라 불렸으며,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東鴨綠)이 불렸다.
마. 좌원(坐原)에 목책(木柵)을 설치하다.
서기전114년 정묘년(丁卯年)에 목책(木柵)을 좌원(坐原)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南閭)에 두어 이로써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
남여성(南閭城)을 수복한 것이 되는데, 서압록이 되는 지금의 요하 서편에서 남쪽에 위치한 성이 된다. 남여성은 진번(眞番)의 남쪽 지역이 되는 임둔(臨屯) 땅에 있었던 것이 될 것이다.
바. 위씨조선(衛氏朝鮮) 멸망
서기전108년 계유년(癸酉年)에 한(漢)나라 유철(劉徹)이 평나(平那)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郡)을 두고자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한(漢)나라 유철(劉徹)은 한무제(漢武帝)를 가리키며, 평나(平那)는 위씨조선 땅의 중심지를 가리키는 것이 되고, 소위 한사군의 땅이 된 지역은 위씨조선 땅으로서 낙랑(樂浪), 번조선(番朝鮮) 땅, 진번(眞番), 임둔(臨屯), 구려(句麗)의 일부가 되며, 낙랑을 포함한 번조선 땅이 소위 낙랑군(樂浪郡)이 되고, 낙랑의 서북지역 중 구려의 일부가 현토군(玄免郡)이 되며, 낙랑군의 동쪽에 진번군, 진번군의 남쪽에 임둔군이 있었던 것이 된다.
사. 한(漢)나라가 위씨조선 땅에 군(郡)을 설치하다.
서기전108년에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고 서기전107년에 현토군(玄兎郡)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소위 낙랑군은 서기전108년에 설치하였다 하고, 현토군은 서기전107년에 설치하였다 하며, 진번군과 임둔군에 대하여는 정확한 기록이 보이지 아니한 바, 서기전108년에 낙랑군과 함께 설치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아마도 토착인의 자치에 맡겨진 것이 될 것이다.
한(漢)나라는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서기전108년에 단군조선의 낙랑홀 자리이던 곳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서기전107년에는 단군조선의 구려국 땅의 남부지역의 일부에 현토군을 설치하였던 것이 된다. 낙랑과 현토는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있던 지명으로서 한(漢)나라가 군명으로 그대로 사용한 것이 된다.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은 서기전194년 위만이 번조선을 뺏은 후 위씨정권이 침공으로 차지한 것이 되는데, 서기전108년에 한나라가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이전부터 사용하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진번군, 임둔군이라 명명한 것이 되며, 서기전82년에 북부여가 수복함으로써 서기전42년에 소서노(召西奴)가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이곳으로 와서 개척하여 어하라국(於瑕羅國)을 세워 서기전31년에 고주몽 성제(聖帝)로부터 제후로 봉해진 것이 된다.
아. 졸본의 고두막한이 동명(東明)이라 칭하며 다물업을 열어 북부여를 부흥시키다.
서기전108년 계유년(癸酉年)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漢)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북부여의 부흥을 위하여,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고두막한을 고열가(古列加)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두막한(高豆莫汗)은 졸본(卒本)의 한(汗) 즉 북부여의 제후이다. 졸본은 단군조선 시대에 제후국 중의 하나이다.
여기 동명(東明)은 고두막한이 세운 동명국(東明國)이기도 하며 고두막한이 한(汗)에서 나아가 왕(王)을 칭하여 동명왕(東明王)임을 나타낸다. 왕(王)은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므로 명을 받아 군사권을 수행하는 비왕(裨王)인 한(汗)과는 다르다. 굳이 왕이라 하는 것은 그냥 제후가 아닌 독자적으로 군사권을 가진 것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고두막한의 고(高)는 고씨라는 성씨가 되고, 두막(豆莫=豆莫婁 : 콩마루=큰마루)은 “큰 머리”라는 뜻을 소리로 표기한 글자가 되며, 한(汗)은 단군조선 시대의 지방 천하왕(天下王)인 군후(君侯)를 가리킨다.
즉 한(汗)은 지방의 천하왕으로서 고대중국의 천자(天子)에 해당하는 작위(爵位)가 된다. 작위체계상으로 세분하면, 군(君)>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앞에 천국(天國), 천조(天朝)에서 명을 받은 봉작(封爵)이라는 의미로서 천(天)이라는 글자를 붙이면, 천군(天君)>천공(天公)>천후(天侯)>천백(天伯)>천자(天子)>천남(天男)이 되는데, 천자는 끝에서 두 번째 봉작이 되고 단군조선의 한(汗)은 천군(天君)에서 천남(天男)을 통칭한 것이 된다. 반면, 진한, 마한, 번한의 한(韓)은 특별히 일반적인 한(汗)보다 한 단계 위가 되는 천왕격(天王格)으로서 천제(天帝), 천왕(天王)의 비왕(裨王)이 된다.
서기전108년에 졸본 출신의 고두막한(高豆莫汗)이 펼친 북부여(北扶餘) 부흥의 다물업(多勿業)은, 서기전59년에 동부여(東扶餘)에서 졸본(卒本)으로 오면서 오이, 마리, 협보, 재사, 묵거, 무골의 의인(義人)을 얻은 고주몽(高朱蒙)에 의하여 단군조선 구려(高句麗) 부흥의 다물업으로 계승된다.
자. 동명왕 고두막한이 한(漢)나라를 격파하다.
서기전106년 을해년(乙亥年)에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으며,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의 의병이 모여 한(漢)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고, 이에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한(漢)나라 도둑들은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렀으니 바로 옛 고리국(槀離國)의 땅이었다.
동명왕 고두막한이 스스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침략자인 한(漢)나라 군사와 전쟁을 한 것은 단지 북부여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애국심(愛國心)의 발로로서 북부여의 부흥(復興)을 꾀한 것이 된다. 물론 서기전87년부터 서기전86년에 걸쳐 북부여의 천왕 자리를 내놓으라고 고우루 천왕과 해부루 천왕을 위협하였던 것은 자신을 지지하는 막강한 군사력(軍事力)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된다.
여기서 요동(遼東)은 북부여(北扶餘)의 요동으로서 패수(浿水)가 되는 지금의 난하(灤河)의 동쪽 지역이자 소요수(小遼水)가 되는 지금의 청수하(淸水河)의 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청수하는 지금의 영정하 중상류 지역에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합류하는 강이며 이 합류지점에도 요(遼)와 관련된 지명이 있었다.
서안평(西安平)은 요동에 있는 땅인데, 소요수가 되는 청수하의 동쪽에 위치한 것이 되며, 패수가 되는 난하의 최상류지역에 위치하는 것이 된다.
고리국(槀離國)은 곧 단군조선 전기의 군국(君國)이던 구려국(句麗國)을 가리키는데, 고리(槀離)라는 말과 구려(句麗)라는 말은 같은 말을 나타낸 표기가 되는데, 구려의 려(麗)를 땅이라는 의미로서 구리라 읽으면 같은 말임이 드러나게 된다.
서안평(西安平)은 서쪽에 위치한 안평(安平)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원래의 안평은 대요수가 되는 지금의 영정하 동쪽에 위치한 땅이며, 여기 서안평은 대요수(大遼水)와 소유수(小遼水)의 동쪽에 있어 요동 땅에 위치한 것이 되는데, 구려하(九黎河)의 최상류지역 부근에 있는 서안평은 곧 소요수의 바로 동쪽에 위치한 땅이 되어 구려국 즉 고리국 땅에 있었던 것이다.
서안평(西安平)은 고구려의 요새이기도 하며 후대에 거란(契丹, 遼)의 수도가 된 곳으로서 원래의 거란의 요하(遼河)가 되는 소요수(小遼水)가 있는 곳이고, 구려하(九黎河) 즉 지금의 서요하(西遼河) 상류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된다. 신(新)나라의 왕망(王芒)은 서안평을 북안평(北安平)이라 불렀는데, 상대적으로 남쪽에도 안평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이 된다.
차. 고두막한이 배천(裵川)의 한(漢)나라 도둑들을 격파하다.
서기전87년 갑오년(甲午年)에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장수를 보내어 배천(裵川)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遺民)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漢)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 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하였다.
배천(裵川)은 진번(眞番)이나 임둔(臨屯)의 땅에 있었던 작은 강으로 추정되는데, 진번국(眞番國)의 유민(遺民)이자 번조선(番朝鮮)의 유민(遺民)이며 위씨조선(衛氏朝鮮)의 유민(遺民)이 되는 사람들과 합세하여 한(漢)나라 군사를 물리친 것이 되고, 실제로 서기전82년에는 진번과 임둔 땅을 수복한 것으로 된다.
카. 동명왕 고두막한이 천제자(天帝子)라 칭하며 나라를 비키라 하다.
서기전87년 갑오년(甲午년) 10월에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은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자(天帝子)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王)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라고 하니, 고우루 천왕은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고우루 천왕은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실제로 동명왕 고두막한은 졸본의 제후인 한(汗)으로서 단군 고열과(高列加) 천왕의 후손이며, 돌아가신 단군천왕을 높이면 천제(天帝)가 되어, 고두막한 자신은 현재는 천왕(天王)은 아니지만 천왕이 될 자격을 가진 천제자(天帝子)가 자연스레 되는 것이다. 즉 천제자(天帝子)는 천왕(天王)과 동격이라 보면 된다.
고우루 천왕은 서기전120년에 고진(高辰)을 고구려후로 봉하여 위씨조선을 방어하게 하였고, 이후 우거왕의 군사들이 동침하여 해성(海城) 이북의 50리를 잃고서 서기전115년에 수복하기도 하였으나, 북부여의 군사력이 약화일로에 있었던 것이 되는데, 서기전108년에 한나라가 위씨조선을 멸망시킬 때 북부여 조정이 속수무책으로 있어 졸본의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한(漢)나라와 대적한 것이 된다.
이로써 보면, 당시 북부여의 세력은 약화되어 있어 고두막한이 동명왕이라 칭한 것을 제지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어서 고우루 천왕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시기가 된다. 이리하여 걱정만 하다가 병사한 것이 된다.
타. 아우 해부루 즉위
서기전87년 갑오년(甲午年)에 고우루(高于婁) 천왕께서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의 위협에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하시니, 고우루 천왕의 아우 해부루(解夫婁)가 즉위하였다.
태자나 아들의 세습이 아니라 형제세습이 되는데, 이는 고우루 천왕에게 태자나 아들이 없었거나 어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