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모수는 웅심산(熊心山)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빈(蘭濱)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용광(龍光)의 칼(釰)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녔다. 따르는 종자들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더니 이에 즉위하였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이다.
해모수가 북부여 시조가 된 때 23세였으며, 고주몽이 북부여(졸본부여) 단군이 된 때가 23세였다.
웅심산(熊心山)은 곰맘산으로서 고마산이며, 고마산은 즉 개마산(蓋馬山)을 다르게 나타낸 글자가 되는데, 이 개마산은 지금의 백두산이 있는 동개마산이 아닌 북개마산(北蓋馬山)으로서 지금의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에 있는 산이 될 것이며, 상춘(常春)에 있는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 가까운 산이 될 것이다.
나. 해모수 천왕랑의 3월 제천(祭天)과 연호법(煙戶法) 제정
서기전238년 3월 16일에 해모수 천왕랑(天王郞)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연호법(烟戶法)을 제정하더니 오가(五加)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을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연호법은 묘(墓)나 릉(陵)을 관리하고 제사지내는 등의 법(法)을 가리킨다. 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호태황이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의 연호법을 제정하여 시행한 것으로 광개토황비문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다. 단군조선 오가 공화정 철폐, 해모수가 천왕(天王)으로 즉위하다.
서기전232년 기사년(己巳年)에 해모수 천왕랑(天王郞)이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五加)들을 회유하여 마침내 공화정치를 철폐하였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檀君)으로 즉위하여 천왕(天王)이 되었으며, 이에 북부여(北扶餘) 시조라 한다.
여기서 옛 도읍은 장당경(藏唐京)을 가리킨다.
공화정치는 공동화백(共同和白) 정치를 가리키는데, 서기전238년 3월 16일에 고열가(高列加) 천왕이 오가들에게 정치를 맡긴 이후 서기전232년까지 오가(五加)의 공화정(共和政)이 시행된 것이 되며, 이를 해모수가 철폐시키고 나라를 접수함으로써 천왕의 자리에 정식으로 오른 것이 된다.
라. 기비(箕丕)를 번조선왕으로 삼다.
서기전232년에 해모수 천왕은 그동안 명령을 받들어 열심히 보좌하였던 번조선왕 기윤(箕潤)의 아들인 수유후(須臾侯) 기비(箕丕)를 번조선왕(番朝鮮王)으로 삼고 상하(上下)의 운장(雲障)을 지키게 하였다.
상하(上下)의 운장(雲障)은 패수(浿水)였던 지금의 난하(灤河) 중류 지역의 바로 동쪽에 있었던 것이 되는데, 서기전209년에 연제조(燕齊趙)의 망명인들을 살게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마. 태교(胎敎) 시행 - 공양태모법(公養胎母法)
서기전232년 겨울 10월에 해모수 천왕(天王)은 공양태모법(公養胎母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胎敎)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태교는 태아 즉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철학은 태아를 사람으로 보는 것이며, 태어나자마자 한살로 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한살로 계산하는 법은 한국의 독특한 나이 계산법으로서 다른 나라의 계산법과 확연히 차이가 있는데, 다른 나라는 태어나면 0살이며 만 1년이 되어야만 한살로서 만(滿)으로 계산한다.
태교를 하는 이유는 태아를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바. 북막의 약탈질
서기전229년 임신년(壬申年)에 북막(北漠)의 추장(酋長)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寧州)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크게 약탈질하고 돌아갔다.
북막은 서기전248년에 추장 아리당부가 단군조선에 연나라를 치자고 요청하였다가 거절당하자 그때부터 조공국(朝貢國)에서 일탈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며, 이에 이르러 북부여를 침공하여 약탈질한 것이 된다.
영주(寧州)는 북부여의 서쪽이자 번조선의 서북쪽 변경이 될 것인데, 옛 구려국의 남쪽 땅으로서 현재의 고하(沽河)의 중상류 부근이 될 것이며, 후대에 거란의 땅이던 영주(營州)이거나 그 부근이 될 것이다.
사. 기준을 번조선왕으로 봉하다.
서기전221년 경진년(庚辰年)에 번조선왕 기비(箕丕)가 죽으니 아들 기준(箕準)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왕으로 봉하였으며, 관리를 보내어 병사를 감독하고 연(燕)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
기준왕은 서기전195년에 위만(衛滿)을 박사로 모셨으나 서기전194년에 위만이 배신하여 나라를 빼앗았는데, 이에 기준왕은 배를 타고 마한 땅으로 가서 평양(平壤, 낙랑)을 거쳐 다시 남쪽의 금마(金馬)에 정착하여 서기전194년에 제1대 마한왕(馬韓王)이 되었다.
아. 백악산아사달 제천
서기전220년 신사년(辛巳年)에 명을 내리어 백악산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자. 366간 천안궁
서기전220년 가을 7월에 백악산아사달에 새로운 궁궐 366간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366이라는 숫자는 4년마다 계산되는 1년의 완성된 숫자인데, 낱자를 모두 합하면 3+6+6=15 여기서 1+5=6이 되어 음양의 사람을 나타낸 숫자가 되어 창조의 뜻을 가지게 되는데, 1년은 주기적으로 무한히 되풀이 되는 것이다.
북부여의 본궁인 신궁(新宮)이 백악산아사달에 지어진 것이 된다. 북부여의 첫 수도는 웅심산(熊心山) 난빈(蘭濱)이다. 이후 북부여의 수도는 고무서 천왕이 졸본(卒本)을 수도로 삼은 서기전59년까지 백악산아사달이 된다.
차. 창해역사 여홍성의 진시황 저격
서기전219년 계미년(癸未年)에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이 한(韓)나라 사람 장량(張良)과 함께 진(秦)나라 왕 정(政)을 박랑사(博浪沙) 가운데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진시황을 호위하던 부차(副車)를 박살냈다.
카. 연제조(燕齊趙) 사람들의 망명귀순
서기전209년 임진년(壬辰年)에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秦)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사람들이 도망하여 번조선(番朝鮮)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上下)의 운장(雲障)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하여 감독케 하였다.
서기전221년에 진시황(秦始皇)이 통일하였으나 진승(陳勝)의 반란이 일어나 진나라에 망하였던 연, 제, 조 나라의 사람들이 진나라 땅을 벗어나 번조선으로 들어와 망명하였던 것이다. 이때 망명귀화한 사람들이 동으로 남으로 이동하여 마한(馬韓) 땅인 한반도의 남쪽으로 들어가 살기도 하였던 것이 된다.
타. 소백림(蘇伯琳)이 마한 땅 동쪽에서 진한(辰韓)을 세우다.
서기전209년 임진년(壬辰年)에 소백손(蘇伯孫)이 마한 땅 서라벌에 이르러 진한(辰韓)을 세웠다. 소백손은 소백림(蘇伯琳)이라고도 적힌다.
원래 소씨(蘇氏)는 풍이(風夷)의 후손으로서 소성(蘇城)에 봉해져 소씨성을 가지게 된 것이 되는데, 이 소성은 단군조선 초기에 도산회의(塗山會議)를 계기로 단군조선의 영역에 편입되었던 것이 되고, 후대에 단군조선이 망하자 유민(遺民)들이 동으로 이동하여 한반도로 유입되었던 것이며, 그들 중 소백손(蘇伯孫)이 서기전209년에 단군조선의 제도를 본떠 진한(辰韓)을 건국한 것이 된다.
이 때 남쪽에는 변한(弁韓)이 세워진 것이 된다. 남쪽의 변한은 진한(辰韓)과 같은 계통이 되는 바, 함께 변진(弁辰)이라고도 부르는 것이 된다.
파. 한(漢)나라와 패수(浿水)를 국경으로 삼다.
서기전202년 기해년(己亥年)에 한(漢)나라의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다시 요동(遼東)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로써 경계선을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灤河)이다.
한(漢)나라는 유방(劉邦)이 세운 나라인데, 유방은 요임금의 후손으로 서기전206년에 군사를 일으켜 한왕(漢王)이라 불리고, 서기전202년에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격파하고 중원 천하를 통일하여 한고조(漢高祖)가 되었다.
여기서 요동은 한나라에서 본 요동이 되는데, 원래의 대요수(大遼水)였던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의 동쪽을 가리키며, 북부여에서 보면 패수의 서쪽 지역이므로 요서(遼西)지역이 된다.
서기전281년에 연나라 진개가 만번한(滿番汗)을 국경으로 삼은 이후 다시 동쪽으로 국경이 이동한 것이 된다.
이후 요동과 요서의 구분은 우리 역사기록에서는 대진국 시대까지 패수인 난하를 기준으로 하고, 고대중국의 기록으로는 한(漢)나라 때까지는 대요수(大遼水)인 영정하(永定河)가 요동과 요서의 기준이 되고, 이후 하북성에 존재하였던 북방국들은 그들의 정책에 따라 요수(遼水)를 대요수인 영정하에서 동쪽으로 이동시켜 고하(沽河, 白河), 난하(灤河, 원래의 浿水), 대릉하, 지금의 요하(遼河, 원래의 西鴨綠) 등으로 설정하였던 것이 된다.
특히 지금의 요동반도 서편으로 흐르는 지금의 요하는 서기980년경 거란의 요(遼)나라가 대진국(大震國)을 멸망시킨 후 동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요하(遼河)를 이동시킨 결과로 생긴 것이다. 원래 거란의 요하는 서안평(西安平) 부근에 남북으로 흐르던 강으로서 소요수(小遼水)이며, 대요수인 영정하의 중상류 지역에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합류하는 지금의 청수하(淸水河)가 된다. 즉 원래 요동과 요서의 구분은 소요수(小遼水)와 대요수(大遼水)를 기준으로 한 것이 된다.
서기668년에 고구려가 망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大震國)은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의 요서(遼西)지역을 포함하여 지금의 발해만 유역을 차지하였던 것으로 인하여 발해(渤海)라는 이름이 남겨진 것이 된다. 대진국은 당나라를 공격하여 등주(登州) 등 산동지역에 발해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하.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의 번조선 망명
서기전195년 병오년(丙午年)에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하였으나 해모수 천왕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천왕께서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衛滿)을 박사(博士)로 모시고 상하운장(上下雲障)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서기전195년 병오년 겨울에 최숭(崔崇)이 낙랑(樂浪)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의 서울 왕검성(王儉城:백아강:평양)에 이르렀다. 아마도 서기전194년 바로 이후에 낙랑홀(樂浪忽)이 위씨조선에 들어간 것이 될 것이다. 낙랑홀은 패수가 되는 난하 중상류의 동서에 걸친 지역으로서 번조선의 북쪽, 구려의 남쪽 사이에 끼인, 보통 크기의 군(郡)과 비슷한 넓이인 지름 약 100리의 땅이 될 것이다.
거. 태자 모수리 즉위
서기전195년 겨울에 해모수(解慕漱) 천왕께서 붕하시어 웅심산(熊心山)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태자 모수리(慕漱離)가 즉위하였다. 웅심산은 해모수 천왕의 근거지였는데, 연고지(緣故地)에 장사를 지낸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