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계통의 민족들이 최초로 서방에 이동했던 것은『단군세기(檀君世記)』에 인용되는 ‘우화충의 난’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바이칼에서 카스피 해 지역으로 이동한 민족이 있었는데 이들이 원래 바르히얀에서 발원한 사르마트(Sarmat)였다. 이들은 기존의 전차와 철제 무기를 가지고 빠른 기동력으로 카스피 해 지역을 복속시킨 다음 코끼리 부대를 손에 넣었다. 강력한 무력으로 스키타이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이후 사르마트인들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사이에서 정착했고 일부 사르마트인들은 고향인 바르히얀과 대흥안령산맥 지역으로 돌아왔다.*
* 鄭吉善,「サルマート系統の西ヨーロッパの移住の人類学的考察」, 西洋史硏究會, 2001, pp. 48~50.
사르마트인들이 선비족이라 확신하는 것은 사르마트 이동 당시의 유적들인 적석총들이 선비의 적석총이 남아 있는 삼연문화와 같다는 점,* 그리고 유구와 선비족 특유의 순장 풍습,목곽의 형태와 인골의 연도 측정 및 DNA 분석 등을 토대로 하여 사르마트가 선비의 조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적석총에 나타난 흉노와 선비의 순장 풍속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 흉노의 적석총과 순장 풍습
- 목곽관 주위의 동물 뼈가 보이지만 인골뼈는 보이지 않는다.
- 목곽 내부에 고인이 안치되어 있고 부장품은 발 아래에 위치해 있다.
- 고인은 항상 왼쪽 벽에 안치되어 있고 주변에는 흙으로 턱을 쌓아 고인이 있는 세계와 부장품을 분류했다.
ⓑ 선비의 적석총과 순장 풍습
- 목곽관 주위의 동물 뼈가 있고 흙으로 덮은 뒤 중간층에 인골 뼈가 보인다.
- 목곽의 턱 상위 쪽이 높고 하위 쪽이 낮으며, 상위 쪽이 넓고 하위 쪽이 좁다.
- 부장품을 넣되, 고인이 직접 쓰지 않는 물건은 태우거나 파기하여 봉분에 뿌려져 있다. ; 태운 재와 파기품 일부를 C14로 측정하여 연도를 파악한다.
* David Carlsberg, (1995), DNA analysis of ancient tombs indicators Sar-Mart, World Historic Landmark Research Institute, 참조.
사르마트 이후, 선비는 단 선비, 모용선비 등이 성장하여 남하했고 4세기 말에 전연이 전진에 의해 멸망하자 일부 모용선비의 황족들과 전진에 복속되기를 거부한 일부 독발, 걸복선비의 씨족들과 오르혼 강(Orhon)유역에서 욱구려씨(郁久閭氏)족의 목골려(木骨閭)를 수장으로 세우고 유연을 건국했다.* 그리고 세력 확충을 위하여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기 시작했는데 흉노의 만노부(彎奴部)와 독로부(獨魯部)를 병합했다. 그리고 철불부(鐵佛部)도 유연의 세력 하에 들어오면서 산서성(山西省)지역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 유연(중국어: 柔然, 병음: Róurán)은 4세기 말부터 6세기 말까지 중국 북쪽 경계 지역에 존재했던 유목민족의 국명이다. 5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몽골고원을 지배한 몽골계 유목민에 의해 세워진 국가의 중국식 통칭이다. 연연(蠕蠕), 여여(茹茹), 예예(芮芮) 등으로도 표기 된다.
뒤를 이은 사륜(社崙)은 서방과 북방 정벌에 나서 고차(高車)를 복속시키고 타림분지 일대를 지배하면서, 북위와 맞서게 되었다. 북위를 압박하기 위하여 동족인 토욕혼과 동맹을 맺었고 고구려와도 동맹을 구축하여 북위의 북쪽 국경 지대를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또 사륜은 사상 최초로 ‘가한’(可汗)의 호칭을 사용했으며 서북쪽으로 들어오는 실크로드를 장악하여 북위로 들어가는 교역물품에 훼방을 놓자 북위는 재정적으로 타격을 입었고 국가적으로 위기감이 돌게 되었다.
그러자 명원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유연 정벌에 나서 유연을 격파하고 가한인 사륜은 전사했다. 수장을 잃은 유연은 고비사막 이북으로 잠시 물러갔으나 이내 명원제 사후, 다시 남하하여 남송, 하나라, 북량, 북연, 고구려, 토욕혼과 연합하여 북위에 대한 포위망을 다시 좁혀왔다. 하나라, 북량, 북연은 곧 북위에 의해 멸망당했지만 유연은 세력을 계속 유지해 토욕혼과 송과 연계를 취하였다.
북위의 태무제는 429년, 449년 두 차례에 걸쳐 친정을 하여, 유연의 본거지를 함락시켰으며, 가한은 도주 중에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은 강세를 계속 유지해, 북위도 남조와의 관계 때문에 북쪽에만 관심을 가질 수는 없었다. 유연이 강세를 떨친 이유는 실크로드의 중계권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연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약화된 것은 485년, 486년에 지배하에 있던, 고차가 독립한 이후이다. 고차의 반란은 수습하여 고차의 일족들을 모두 참형에 처했지만 유연의 주변국에서는 항상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그러한 반란들은 곧 실크로드까지 위협하게 되자 탄탄하던 유연의 재정은 궁핍한 상태가 되어 국가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이런 악조건 속에 효문제가 무리한 한화정책으로 인해 반발한 탁발씨들이 유연으로 도주하게 되고 탁발씨로 인해 다시 유연이 강성해져 각종 반란들을 진압하고 사산 조 페르시아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북인도의 굽타 왕조까지 굴복시킨 뒤 이들의 조공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북위에 지나친 신경 집중이 돌궐의 강성을 불러왔고 552년 돌궐의 이리가한(伊利可汗)과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아나괴(阿那壞)가 전사하고 만다. 유연의 잔당은 북위에 원조를 요청하였지만, 돌궐의 요청에 의해 살해당하고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이후 유연의 다른 잔 부족들은 서방으로 이동하였고 이들은 곧 카프카스 지역으로 이주했다. 카프카스에서 게르만 제 부족들의 동족 전쟁에 간섭하여 롬바르드 족과 연합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과 동맹을 맺은 게피다이 족을 정복하고 그들의 영지를 취하여 정착했다.
그리고 흑해를 건너 판노니아 지역을 공격하고 도나우 강과 티소 강 사이에서 아바르 제국을 건설했다.그리고 원주민인 슬라브인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이곳에 이동해와 있던 부여계 훈족 · 불가르족과 게르만계 여러 부족을 거느리며 통치했다. 특히 바얀왕 시대에는 판노니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엘베 강, 북으로는 발트 해, 동으로는 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프랑크 왕국, 비잔틴제국과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624년 두 번째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실패한 이래 점차 쇠퇴하기 시작, 770년 프랑크 왕 카를에게 패한 후 그의 아들 피핀에 의해 796년 본거지인 판노니아를 함락 당했다. 9세기 초에 불가리아 족에게 격파되어 그 후 완전히 멸망하였다.이후 마자르 족에 병합되었고 후일 러시아 카프카스 지역으로 다시 내려와 다게스탄 공화국을 세우고 오늘까지도 러시아연방의 일원이 되어 있다.
선비계 민족들은 이후 투르크계에 흡수되었지만 서유럽과 동유럽에 용맹을 떨쳤다. 그리고 선비계열들은 인류학계에 정식 민족계통으로 인정되었던 것은 유라시아 에 큰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선비계열의 서방 진출에 대한 연구는 추후연구로 지속되어야 하는 숙제를 남겼다. 그것은 한민족의 일원이 다시 한 번 유라시아를 도모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