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
“나”라고 인식하며 살고 있는 이 존재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스러져 사라지는 것일까 ?
아니면 종교에서 얘기하는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영원토록 저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것인가 ?
불교에서는 이 “나”라는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無我論”을 주장하였으므로
이 생명에서 저 생명으로 윤회전생하는 변치않는 존재의 실체는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경에 보면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불법이란 즉 불법이 아닌 것이라고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으니
세상의 그 어느 종교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이런 고차원의 생각을 가졌겠는가 ?
불법이 바로 불법이 아니라는 자기부정은 불교에서 얘기하는 모든 내용이 결국 方便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없다는 무아론도 진정으로 내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요
그 무엇인가를 강조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개체적 존재에게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인간의 욕망과 아집을 깨뜨려 주기위해
“나”라는 개체실체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역설적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 개체적 존재를 철저하게 깨뜨림으로써 얻게 되는 결과적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
생명체이든 아니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고 “내”가 있음으로 “네”가 있다는
존재사이의 관계의 긴밀함, 즉 緣起의 실상을 대신 얻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그 무엇도 단독자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이 연기의 깨우침은
모든 존재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망으로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며,
“나”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인연에 따른 결과일 뿐이라는 얘기는
“나”라는 개체의 욕망이 참으로 헛되고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체의식의 박탈을 통하여 중생들이 얻게 되는 희소식이 바로 “전체의식”입니다.
저 사람의 아픔이 바로 내 아픔이고,
내 기쁨이 저 사람의 기쁨이고,
저 사람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요,
내 모습이 바로 저 사람의 모습입니다.
얽히고 설킨 인연의 고리속에서,
전체속에 들어있는 자기 개체존재의 전체성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원한 인연의 고리는 어찌하여 만들어졌는가 ?
불교에서는 無明이라 합니다. 그것은 깨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깨침이 없다함은 존재의 전체성을 알지 못하고 개체의 욕망과 아집에 붙잡히는 것이니
이로인해 12가지 인연이 돌고 돌아 끝도없는 육도윤회의 어지러움속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이 깨치지 못한 “나”라는 존재는 왜 만들어졌는가 ?
“[생각 1] 존재하는 이유” 라는 지난 번 글에서,
우리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느끼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주실체의 “느끼기 위한” 충동의 발현때문이라고 했으며
자기 자신과 같이 이 우주를 직접 느낌으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출현을 목표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체성으로 존재하고 있던 우주실체가 어떤 순간 “느끼고 싶은” 강력한 충동에 휩싸였고
그 충동은 우주실체의 에너지가 물질화하여 수없이 결합을 하는 과정에서 원자, 분자등의 복합물질을 생성하였고
기나긴 진화역사를 통하여 유기체인 생명의 역사를 만들었으며 결국 유인원의 진화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유인원의 두뇌가 점차 진화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등
이 우주의 모든 느낌을 골고루 느낄 수 있게 진화된 구조와 기능를 갖추게 되었을 때,
그 개체 유인원은 우주의 전체성을 구현한 小宇宙가 되어 우주실체가 가진 것과 동일한 생명의 속성을 따라 가지게 되었는데........
히브리성서 창세기에 하느님이 진흙을 빚어 사람을 만든 후 그 코에 生氣를 불어 넣으니 生靈(생령)이 되었다 라고 하는
설화적 표현이 이것을 뜻하는 것이며 이 생기라는 것이 종교계에서 얘기하던 영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진화를 거듭하던 유인원에게 비로소 영혼이 생김으로써
이 유인원의 육체가 느끼는 느낌은 그대로 그 유인원의 영혼이 느끼게 되었고,
그 영혼의 느낌은 곧바로 우주실체에도 전달이 되었으니 우리 몸과 몸을 이루고 있는 한 개 세포의 관계처럼
한 유인원의 영혼과 우주실체는 원래 한 덩어리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우주실체를 궂이 하느님이라 한다면 새로 생기게 된 그 영혼은 “개체하느님”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東學에서 人乃天이라 .........사람이 곧 하늘이라 말한 이유도 바로 이런 뜻과 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즉, 한 유인원에게 생긴 영혼으로 인하여 우주실체는 비로소 이 우주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차후 수 없이 많이 생기게 된 개체영혼들을 통하여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우주의 느낌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초 우주실체는 시작도 끝도 없이 존재하던 유일한 전체성의 존재였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에 느끼고 싶은 충동을 일으켜 삼라만상 아름다운 우주자연을 탄생시켰고
개체인간의 구체적인 느낌을 통하여 이 우주를 자각하게 되었으니
이 우주실체의 느끼고 싶은 충동은 언제쯤 완전히 만족을 느끼고 기나긴 우주역사를 그칠 것인가 ?
우주가 탄생한 지 137억년,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팽창우주의 지름은 940억 광년,
지구의 자전속도는 초속 447미터,
지구의 공전속도는 초속 29.77킬로미터,
태양계의 공전속도는 초속 220킬로미터,
태양계가 우리 은하계를 공전하는 시간은 2억 2,500만년.
이러한 은하계가 이 우주에 수 천억개 이상....
우주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 넓고도 광활하며 무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인간의 개체영혼이 아무리 많이 생긴다 해도 이 무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느끼고 싶은 우주실체의 본능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습니다.
충족대상인 개체수가 무한값에 영원히 모자르기 때문에 ....
이처럼 우주실체의 느끼고 싶은 충동이 영원히 존속할 수 밖에 없으므로
그 목표대상인 인간의 개체영혼도 영원히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소상하게 밝히지 않은 無明, 즉 우주탄생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인생의 전부일 것이라 착각하고 있지만,
몸은 죽어도 우리의 영혼은 살아남아서 또 다른 몸과 생을 만나고 우주실체에게 그 느낌을 영원토록 전달할 것입니다.
(다만, 새로 태어나는 몸에 생기게 될 새로운 영혼의 탄생을 위해서 다른 이의 몸을 빌리는 윤회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이 필요함....
이 문제는 윤회에 있어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 를 포함하여 다음 기회에 소상히 소개할 예정)
끝없이 존재하게 될 우리의 영혼과 삶이라는 것 앞에 서 보았을 때
우리가 따라가고자 하는 현실적인 욕심과 치우친 아집등은 지극히 소소하고 무가치한 것이 아닐까요
“나”라는 개체의 한계에서 벗어나 전체를 보고 듣고 깨닿는 전체성의 경지와 인생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
그래서 다시 하는 말.........
“나”는 영원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