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이 발달하지 못했던 원시시대에 인류는 셈을 하는 도구로 자기 손가락을 사용하였다.
왼 손에 다섯 개, 오른 손에 다섯 개.
양쪽 손의 손가락을 모두 합하면 열 개가 되므로 자연 10을 기준으로 셈하는 십진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럼 왜 사람의 손에는 모두 열 개의 손가락이 있을까 ?
일곱 개나 아홉 개, 열 세 개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
기원전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가
인간은 물고기 모양의 조상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부터 2천년이 더 지난
1859년 찰스 다윈(1809~1882)이 자연선택설을 중심으로 한 진화론을 발표하면서 과학계의 혁명이 시작되었고
그 이후 다양한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
진화에 관한 이론은 다양할 수 있지만 진화라는 사실 만큼은 이젠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로 사회 전 분야에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학자들의 연구결과 인간에게 모두 열 개의 손가락이 있는 까닭도 밝혀지게 되었다.
고생대는 약 5억 8천만년 전인 캄브리아기부터,
오르도비스기, 실루리아기, 데본기, 석탄기, 페름기의 2억 2,500만 년 전까지를 말하는데,
이중 네 번째 시대에 해당하는 데본기(약 4억 1천만년 ~ 3억 6천만년 전)의 물고기가
지느러미에 열 개의 지골을 가지고 있었고 바로 그 물고기로부터 인간이 진화한 까닭이다.
즉,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에 이르는 대진화(大進化)의 흐름중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한 물속에서 생활하던 어류에까지 인간의 진화연결 고리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최근 근본주의적 기독교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지적설계론은
생명체가 우연히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지적 존재에 의해 의도적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이 핵심인데
논리의 근거로 기독교 성서를 거론하지 않았을 뿐이지 과학적 언어로 포장된 또 다른 옷을 입은 창조론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냐 진화냐를 논하는 대다수의 이론들이 본론적인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진화의 흔적이나 화석의 존재유무 같은 물증적이고 지엽적인 부분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창조론의 변형태인 지적설계론의 주장처럼
“지적 존재” 가 존재론적으로 별도 설정되고 “의도적” 설계라는 심리적 가설이 동원된다는데에
토론상 모순이 이미 들어있는 것이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동일한 현상을 보고도
종교인은 神이 인간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반면,
인간외부에 또 다른 초월자를 개입시키지 않는 무신론자는
만유인력이라는 자연법칙에 따른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창조”와 “진화”라는 개념속에 이미 두 주장이 대립될 수 밖에 없는 先在개념이 개입되어 있고
특히 창조를 주장하는 유신론적 사유체계속에는 인간이외의 어떤 또다른 존재,
우주창조주의 개념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평면적인 창조,진화의 우열논쟁은 그 의미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理知가 발달되지 않았던 고대인류에게 자연환경이 주는 위협은 거의 공포수준이었다.
지진, 해일, 홍수, 폭풍우, 천둥, 번개에다 각종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생명현상 앞에서
인간은 무력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무시무시한 공포를 달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그리고 자기존재의 의미성을 이해하고
합리화하려는 일종의 방어기제에 의하여 우주자연을 움직이는 초월적인 존재를 가정하고 해석하게 되었으니
인류가 발전시켜 온 각종 다신사상과 유일신사상이 그것이다.
이처럼 까마득히 오랜 옛적부터 우주역사를 창조로 보는 시각이 이미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삼스레 이제와서 창조냐 진화냐를 논할 건덕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신개념이 초월적이고 외재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주역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부분에 있어서 독단적이고 비합리적인 부분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지난 번 “[4] 신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라는 글에서
최근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범재신론의 개념을 피력한 바가 있다.
汎在神論의 신개념은 기존 서구정신사가 소유했던 초월적, 타자적 유일신론을 넘어서
피조물의 영역인 우주 자연만물은 물론 인간까지도 자기 세계에 포함시키는 폭 넓은 신개념을 지니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주역사의 흐름에 자기자신도 참여하고 있는 시간성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서
거의 혁명적인 사상적 발전을 이룬 것이다.
그건 왜일까 ?
그 시간성이라는 의미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
시간성이란 단순히 역사에 대한 참여로 끝나지 않는다.
시간에 발을 들여놓으면 발을 들여 놓은 존재 자신도 그 시간의 흐름에 속해야만 하고
시간에 속하게 되면 그 시간이 파생시킨 시공간의 영역에 자기자신도 영향과 제한을 받게되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이기 때문에 인류역사의 흐름이란 바로 자기자신이 움직이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기존 역사흐름의 방식외에 또다른 행위방식을 설정할 수 없고
더더군다나 홍해바다를 가른다든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인다든지 하는
시공간적으로 국소적이고 개별적인 사태 , 즉 다시말해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주자체인 신이 우주역사의 자기흐름을 타고 있다면
없었던 형체와 사건이 새로 생기는 것을 시간적 최초의 시점에서 바라볼 때는 창조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물질간의 법칙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자연현상을 시간적 과정의 시점에서 바라 볼 때는 진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변화를 유도하는 우주실체의 의지는 시공간상의 어느 한 부분에만 영향을 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역사의 흐름 전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창조가 진화고 진화가 창조다.
또 동일하게 창조도 아니며 진화도 아니다.
창조하는 존재가 진화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창조냐 ?...진화냐 ?..라는 논쟁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