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열가 단군의 재위 원넌은 병인(BCE 295, 단기 2039)년이다.
재위 14년 기묘(BCE 282, 단기 2052)년에 백악산에 단군왕검의 사당을 세워 유사(有司)로 하여금 계절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시고, 임금께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친히 제사를 드리셨다.
재위 44년 기유(BCE 252, 단기 2082)년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신년 하례를 올렸다.
재위 48년 계즉(BCE 248, 단기 2086)년에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이 해 북막 추장 아리당부(阿里當夫)가 연나라를 정벌하는 데 출병해 주기로 청하였다. 임금께서 응하지 않으시자, 원망하여 이후로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일어남
재위 57년 임술(BCE 239, 단기 2095)년 4월 8일에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으로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다. 해모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이다.
*고리국~藁는 동방에 떠오르는 해 속에 삼신이 깃든 모습, 離는 태양, 밝다는 뜻이다.
재위 58년 계해(BCE 238, 단기 2096)년 임금께서 어질고 인자히시나 우유부단하여 명령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리하여 여러 장수가 자신의 용맹을 믿고 화란을 자주 일으켰다. 나라 살림은 쪼들리고 백성의 기운도 더욱 쇠약해졌다.
★단군조선의 몰락과 북부여 시대의 개창
3월 제천을 행한 날 저녁에, 임금께서 오가(五加)와 더불어 의논의 말씀을 하셨다.
"옛날 우리 성조들께 처음으로 법도를 만들고 법통을 세워 후세에 전하셨노라. 덕을 펴심이 넓고도 멀리 미쳐 만세의 법이 되어왔느니라. 그러나 이제 왕도가 쇠미하여 모든 왕(칸)이 세력을 다투고 있도다. 짐이 덕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능히 다스릴 수 없고, 이들을 불러 무마시킬 방도가 없으므로 백성이 서로 혜어져 흩어지고 있느니라. 너희 오가는 현인을 택하여 단군으로 천거하라"
옥문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 모든 포로를 석방하셨다.
★오가의 고도기 공화정 시대
이튿날 임금께서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산으로 수도하여 선인(仙人)이 되셨다. 이에 오가(五加)가 6년(BCE 232, 단기 2096)동안 국사를 공동으로 집행하였다.
이에 앞서 종실(宗室)인 해모수가 수유국(須臾國)과 약속을 하고, 옛 도읍지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거한 뒤에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셨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두 해모수의 명을 따랐다.
★북부여가 발흥한 배경과 고구려 호칭의 기원
이 때 해모수께서 모든 장수를 봉하면서 수유후(須臾候) 기비(箕丕, 번조선의 74대 왕으로 기준의 부왕)를 올려 번조선의 왕으로 삼아(BCE 232, 단기 2102) 상.하 운장을 지키게 하셨다.
*상하운장~국경 요새인 상운장과 하운장으로 장새(障塞)가 있었던 곳이다. '사기 위만열전'에는 위만이 북부여의 제후국인 번조선에서 망명할 때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 거주하였다. 이 상.하 운장은 지금의 난하 서쪽 연안에 있었다. 위만이 번조선 마지막 왕 기준에게서 봉지로 하사받은 서쪽 변방 100리 땅이 이곳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해모수가 태어난 고향이므로 북부여를 또는 고구려라고도 불렀다.
*단군기원 원년 무진(BCE 2333)년부터 지금의 주상(고려 공민왕)께서 보위에 오르신 이후 12년 째 되는 계묘(단기 3696, 서기 1363)까지가 무릇 3696년이라. 이 해 10월 3일 홍행촌수(紅杏村叟)가 강화도 해운당(海雲堂)에서 이 글을 쓰노라.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 2012, pp173~175)
#한자원문 해설은 이암의 단군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자랑스런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