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의 망명자 기자가 패한 군사와 난민을 이끌고 부도의 서쪽으로 도망하여 왔다. 명예를 위하여 당우의 법을 행하고 오행삼정(오행과 하늘.땅.사람에 대한 바른도리)을 써서 홍범무함을 시행하였다. 천웅의 도와는 절대로 서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기자~은나라 주왕의 숙부이다.
B.C1122년 은나라가 망하자 주 무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고조선으로 왔다고 하는 데, 조선땅에 살다가 죽었다. 그가 살던 활동하던 산동성, 하남성 등은 조선땅이다.
기자 무덤~산동성 하택시 조현
기자 사당~하남성 학벽시 기현
*당우~중국의 도당씨와 유우씨, 요순 시대를 함께하는 말
*홍범~모범이 되는 큰 규범
★은의 군민이 무력으로 부도의 유증(남겨진 무리)을 억압하므로 유증이 명지(밝은 곳)의 단을 봉해버리고, 동해의 물가로 피하여 살았다. 즉 옛날의 사례벌의 공지(빈땅)였다.
★사례벌은 길다란 깃발, 광야에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내걸고 저녁에 거둬들여, 먼 곳에 살면서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곧 6촌을 설치하고, 인접의 제족과 분담하여, 함께 지키되, 각각 한이라 하고 보위하였다.
★북의 마한과 남의 변한과 동의 진한의 삼한이 부족의 자치를 행하고, 선세의 도를 굳게 지켜, 이후 천년 사이에 기자의 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보위 방비하는 일에 전념하여, 거의 여력이 없었다.
★이 때 하토(하나라 땅)의 쟁탈 바람이 점차 격심하여 동요와 혼란이 삼한에 파급되므로, 6촌의 사람들이 서로 모의하고, 서쪽의 화(재앙)가 점차 임박하여, 지켜내가가 장차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이 통합 방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고, 마침내 경계를 정하고, 요새를 세워 혁거세(빛나는 인간으로 살아감)를 추대하여, 다스리는 일을 위임하였다.
★여러 부족들은 수령을 추대하고, 방비하게 되니, 남은 백제요. 북은 고구려였다. 고구려가 곧 북쪽 성의 땅을 회복하여, 서침하는 사람들을 쫒아버리고, 그 지역을 완전하게 지켜내었다.
*삼한인 마한, 변한, 진한, 삼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짐잖게 하는 대목이다.
#송준희 번역.주해, 신라박제상의 부도지, 우리역사연구원, pp1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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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도지 28장
★이보다 먼저, 육부의 촌장들이 약을 캐는 날에 모여서 선도산 단묘의 성모가 알에서 나았다는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가서 보았다. 동쪽의 우물을 보고 덮어 가리고, 껍질을 벗겨서, 남아를 얻었다. 몸에는 빛이 나고, 귀가 부채만큼 컸다.
*선도산~중국에는 선도산이 있다.
*성모~동신성모, 박혁거세의 어머니
★곧 박으로써 성을 삼고, 이름을 혁거세라고 하였다. 박은 단의 어음이 박달이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여 성을 삼았으며, 혁은 빛나니, 즉 광명으로써 암흑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뜻이다.
★육촌의 사람들이 함께 양육하니, 점차 자라면서, 신령스런 기운이 빼어나게 밝고, 대인의 도가 있었다. 13살에 여러 사람이 추거하여 거서간이 되니, 거는 거요. 간은 방이요, 장이다. 즉 서방에 의거하여, 경계하는 방어장이라는 뜻이다. 서방은 즉 저들이 서침하여 사도를 행하는 자들이다.
*삼국유사 "감통제7"편에 따르면 선도산 신모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었다.
그 시초는 신모가 진한에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자를 낳고 동국의 왕이 되게 하였는 데, 대략 혁거와 알영 두 성인이 나타난 것이다. 계룡.계림.백마 등이라고 부르는 닭(계)는 서쪽 옛 땅에 해당되는 것이다. 신모가 여러 천선들을 시켜 비단을 짜고 붉게 물들여 관복을 짜서 그들 남편에게 주도록 함으로써, 나라 사람들이 신모가 신험하였다는 것을 되었다.
#송준희 번역.주해, 신라박제상의 부도지, 우리역사연구원, pp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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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도지 제29장
★혁거세씨는 천성은 신과 같고, 지혜는 성인과도 같았다. 또 어진 왕비 알영을 맞이하니, 그 때 사람들이 그들을 가르켜 두 성인이라 하였다. 능히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의 도를 행하며, 제시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에 천부소도를 건설하였다.
*남태백산~신시의 중경이 간직된 회계산을 말하는 것 같다. 한웅시대의 신시와 단군조선 아사달의 유습을 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로 보면 삼척에 태백산이 있다.
★중대에 천부단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돈대와 보단을 설치하여, 계불의 의식을 행하고, 대인으로 하여금, 금척의 이치에 따라 천지시원의 근본을 증리하며, 옥관의 음을 내어 율여화생법(율로 려를 변화시켜 태어나는 법)을 수증하였다.
*보단~마고대성의 피라미드형 축성 유습, 강화도의 마니산 첨성단 같은 것이다.
*계불~수계제불을 말함
삼세에 있어 수계제불은 천사(하늘에 올리는 제사), 지제(땅에 올리는 제사), 인향(조상에 올리는 제사)에 선행되는 계제인바, 이는 요사함을 제거하고, 제불(부정을 제거하여 깨끗하게 함)하여 삼신께 나아가는 길을 실현할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다.
각 종교에서는 목욕재계, 계욕, 세례 등의 의식으로 남게 되었다.
★해마다 10월에 백의제를 행하였으니, 이는 황궁씨의 속신 백모지의를 따르는 것이었다. 달구에 조시를 베풀고, 율포에 해시를 열어, 육해 교역의 제도를 수립하였다.
*백모지의~황궁씨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른이었으므로, 곧 백모를 묶어 마고 앞에 사죄하여, 오미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복본할 것을 서약하였다
황궁씨는 권속을 이끌고 춥고 위험한 땅 천산산맥으로 출성하였다.
백모~띠풀을 말한다.
*달구는 대구, 율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강동면지역을 말하나 지명이 이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착한 일을 크게 일으켜, 여러 사람과 함께 그 고락을 같이 하고, 밖으로는 방패와 창을 쓰지 아니하며, 더불어 평화를 보전하였다.
★한 마음으로 복고하고 중건하는 일에 전념하니, 경내가 도가 있어 옛날에 흡사하였다. 이 때에 변진(변한과 진한) 제족이 합동하여 협력하니, 비록 경계를 두고 방비하나, 나라를 칭하지 아니하고, 또 왕을 칭하지 아니하였다.
★경내를 다스리는 일은 선세의 법을 준수하여, 제회에서 의결되지 아니하면, 일찍이 한가지의 일도 행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우두머리를 이는받는 법(영수계위법) 역시 혈계를 한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현명한 사람을 택하여 우두머리를 삼았다.
*세습이 아니라 무리 중 현명한 사람을 추대하였다. 모두가 평등한 가운데 하늘을 대표할 대표자를 뽑은 것이다.
*환단고기 고구려국 본기에는 '회계산은 본래 신시의 중경이 간직된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이 남태백산이 아닐까? 이것이 다시 한반도로 삼척 태백산으로 이동되지 않았을까?
#송준희번역.주해 신라박세상의 부도지, 우리역사연구원, pp117~120
#원문해설은 인터넷 부도지 한자원문해설을 참고바람니다!
소부도지 30장
★남아 나이 20살이 된, 아름답고 말을 잘하는 사람을 택하여 마랑이라는 직을 주고, 명령을 받들어 원행(멀리 다님)하게 하였다.
*마랑~단군조선의 천지화랑, 신라의 화랑으로 전수된 것 같다. 중국 묘족들이 미혼의 남성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혹 성생월식의 옛 땅에 나아가며, 혹 운해 천산의 여러 지역에 가니, 이 원행은 부도 수신의 유제(유산된 제도)였다. 동해에 피하여 산지 천여 년 사이에 제시의 회를 열지 못하여, 서로 내왕이 오래 끊어지고, 또 봉국재탈(봉건국가의 싸움)의 풍조가 사해에 만연하여, 제족이 각자 나라를 칭하고, 오랜 세월에 전란이 반복하니, 겨레가 종횡으로 나뉘고, 말이 잡다하게 변하였다.
*생성주~별이 뜨는 곳, 파미르고원(티벳)의 남쪽, 인도 및 동남아지역
*월식주~달이지는 곳, 파미르고원의 서쪽, 중근동 지역
*운해주~파미르고원의 동쪽, 중원지역
*천산주~파미르고원의 북동쪽, 천산산맥의 박격달봉 인근
*5호 16국 시대를 말하는 것 같다.
★천부는 거의 망각하기에 이르고, 혹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도 다 변형하여, 음이 다르니, 마랑들이 원행이 심히 어려워, 순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마랑들이 만리 원행에서도 절조를 지켜, 능히 굳은 뜻을 가지고, 백난(어려움)을 극복하여 사명을 완수하니, 그 거룩한 인격이 진실로 호매(호탕하고 영매함)하였다.
*천지화랑~환단고기 13세 홀단 단군, 무술20년 BC1763년에 소도를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거기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이들을 국자랑이라 하였다. 국자랑은 길을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고 다녀서 사람들이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천지화랑이 신라의 '화랑'으로 전수되었다.
★장하게도 귀환하면, 반드시 직사(직책의 일)에 임명하여, 천문과 지리와 역수와 박물을 공부하게 하니, 이는 선세에 사해를 통화하여, 인세를 하나의 법에 맞추는 유업(선대로부터 물러받음)이었다.
#송준희 번역.주해, 신라박제상의 부도지, 우리역사연구원, pp12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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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도지 제31장
★서례벌을 창도한 후로, 어느 덧 삼세를 지나니, 백여년이 되었다. 세상의 풍조가 크게 변하여 보수(지켜 보전함)이 어려웠다. 이에 국왕을 세워, 대권을 행사하게 하자는 여론이 대두하여, 이러니저러니 하고 시끄러웠다.
★그 반대자들은 '선세의 율법이 밝고 밝게 천부를 비추니, 지금 비록 시대가 어려우나, 보수하고 튼튼히 방비하여,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어찌 사단(실마리를 속임)에 굴종하고 스스로 소자(어린 자)가 되어, 사리에 어긋난 가운데 모독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이와같이 된다면 의롭게 목숨을 바쳐, 진도(참다운 도)후세에 남기는 것만 같이 못하다'고 하였다.
★그 찬성하는 사람들은 '외세가 긴박하여 파동이 격심하니, 어떻게 방비를 하겠는가. 담장 안에서도 이반하여 시끄러움이 그치지 아니하는 데, 어떻게 지켜낸 단 말인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같이 경쟁하는 마당에 뛰어들어, 부강하게 한 뒤 후에, 유업을 회복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지금 사해 제족이 거짓의 도(허도)에 미쳐 날뛰어, 봉사(눈먼 소경)가 된지 오래되었다. 우리가 자멸하여 누가 참다운 도를 드높이며, 후세에 누가 있어, 이를 누가 알것인가? 만약 능히 방비하여, 보수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고립되면, 새 백마리 가운 데 백로 한마리가 되어, 오히려 이도(이치가 어긋난 도)가 되고 세상에 존립할 수 없게 될 거이니, 장차 또 그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 같은 것이 옳지 못하여, 오직 택한 바는, 나라를 세우고 왕을 높여, 대권을 집행하며, 군마를 호령하여, 파죽지세로 전진하고, 부도의 전역을 회복하는 것 뿐이다. 부도를 다시 세워, 그 근본을 명시하면, 제족이 비록 완강하더라도, 반드시 각성하여, 근본으로 돌아올 것이다.
#송준희번역.주해, 신라충신박제상의 부도지, 우리역사연구원, pp12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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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도지 제32장
★이에, 중론이 결정되었으므로 인망(인간들의 바램)이 왕국 수립을 주장하는 석씨에로 돌아갔다. 석씨는 동쪽 작은성 유배인의 후예로, 옛날부터 바닷가에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체격이 장대하고 지략이 있으므로, 남해씨가 딸을 주어 아내가 되게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중의 여망에 따라, 자리를 이어 탈해왕이라 칭하니, 즉 보수(지켜 보전함)의 질곡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또 서라국이라 칭하고, 비로소 방패와 창을 사용하여 경내를 평정하였다. 용병을 과도하게 하여, 필경은 배척을 당하였다. 다시 박씨의 보수계로 돌아오니, 이에 박씨가 다시 계승하고, 왕국의 칭호를 폐지하였다.
★4세를 지나, 중론이 또 석씨(탈해이사금, 신라4대국왕, 재위 57-80)에게로 돌아갔으나,
단 정벌하는 일을 원치 않으니, 이에 석씨가 다시 계승하여 무리에게 서약하고 정벌을 행하지 않으니, 이에 벌휴씨였다. 석씨 4세 사이에 정벌이 다시 시작하니, 중론이 김씨의 중화로 돌아왔다.
김씨는 원래 부도에서 동쪽으로
옮겨와 살던 씨족으로, 따뜻하고, 겸손하고, 후덕하여, 지마씨가 손녀를 주어 아내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자리를 이으니, 이가 미추씨였다. 이 때를 당하여 서북에서 계속해서 우환이 일어나되, 하나도 조치된 바가 없으므로, 중론이 다시 석씨에게로 복귀하였다.
★이에 석씨가 다시 자리를 이어, 3세 사이에 전쟁이 허다하여 백성과 물자를 탕진하므로 크게 시대의 배척을 받았다. 중론이 다시 김씨에게 돌아가니, 이에 김씨가 다시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석씨 1세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일치하나 출신지에 대한 기록은 일치하지 않는다. 왕비가 남해왕의 딸임을, 나라 이름이 서례벌에서 서라국으로 바뀌었다.
#박씨 4세(부도지 32장)
*삼국사기
ㆍ5세 박 파사 이사금(80-112 유리왕의 2자) 왕비는 허루갈문왕의 딸 김씨
ㆍ6세 박 지마 이사금(112-134 파사왕의 맏이)왕비 마제갈문왕의 딸 김씨
ㆍ7세 박 일성 이사금(134-154 유리왕의 맏이, 혹은 일지 갈문왕의 아들)왕비 지소례왕의 딸
ㆍ8세 박 아달라 이사금(154-184 일성왕의 맏이)왕비 지마왕의 딸 박씨
#석씨 4세(부도지32장)
*삼국사기
ㆍ9세 석 벌휴 이사금(184-196 탈해왕의 아들 각각 구추의 아들) 왕비 지진내례부인
ㆍ10세 석 나해 이사금(196-230 벌휴왕의 손자)왕비 조분왕의 누이 석씨
ㆍ11세 석조분 이사금(230-247 벌휴왕의 손자, 아버지는 갈문왕, 어머니는 갈문왕의 딸 옥모부인) 왕비 내해왕의 딸
ㆍ12세 석 점해 이사금(247-261 조분왕의 아우)
*석씨 4세의 기록과 다음 왕권이 김씨에게로 넘어감
#김씨 1세 부도지 32장
*삼국사기
ㆍ김 미추 이사금(261-284) 왕비 조분왕의 딸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미추)
*김씨 1세 후에 다시 석씨에게로 왕권이 옮겨간 것은 일치하나 왕비의 출신이 일치 하지 않음
#석씨 3세(부도지32장)
*삼국사기
ㆍ14 석 유례 이사금(284-298 조분왕의 맏아들)
ㆍ15 석 기임 이사금(298-310 조분왕의 손자)
ㆍ16 석 을해(310-356 내해왕의 손자)
*석씨 기록은 일치한다.
#김씨(부도지 32장)
*삼국사기
ㆍ17 김 내물 이사금(356-402 갈문왕의 손자) 왕비 미추왕의 딸 김씨
ㆍ18 김 실성 이사금(알지의 후손으로 대서지 아찬의 아들) 왕비 미추왕의 딸
ㆍ19세 김 눌지 마립간(417-458 내물왕의 아들) 왕비 실성왕 딸
#부도지 28장~32장에 나타난 신라왕의 계보, 삼국사기와 비교, 다음 인터넷, 흰모님, 네티즌 자유계시판
#송준희 번역.주해 부도지, 우리역사연구원, pp132-133
#한문원문해설은 인터넷 부도지 원문해설을 참고 바람니다!
소부도지 33장
★오직 근본을 지키는 우리 종족들이 동해에 피하여 살면서 , 방비하고 보수한 지 삼 백여년 사이에 중론의 번복이 이와 같으니, 가히 바깥지역의 풍운이 어떤지를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또 가히 천부의 진리가 사단(사악함)의 세상에서도 의연(굳세고 자연스럼)하게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세 중론이 반드시 이 도가 무너지지 않는 것에 근거하여, 역대 영수(우두머리)가 오히려 중론의 소재에 부흥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과격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능히 조절하여, 보수를 크게 전하였으니,
★마침내 오늘의 사람들로 하여금 가히 천부의 실재를 알게하며,
★또 장차 후인으로 하여금 때를 만나 그것을 행하게 하여
★능히 부도를 다시 건설하고, 사해를 통화하며, 인세가 복본(근본뿌리를 회복)하여, 진리를 명증(명확히 밝힘)하게 하면, 당시 석씨의 주장이 과연 불행 중에서 행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시~징심헌시
신라 눌지왕 2년에 박제상이 왜국에 들어갈 때 지은 것이라고 했다.(영해박씨)
*관설당(빛나는 몸집을 나타내다)
아지랭이 초초하게 흐르는 걸 바라보니
나그네의 마음도 가을처럼 지는구나
세간의 견백(춘추전국시대 공손룡이라는 사람이 내건 일종의 궤변)도 유유한 일도
장강(징심헌 앞에 흐르는 강)을 대하고 근심을 잊는다.
ㆍ견백은 단단하고 흰 돌을 눈으로 보면 흰 것을 알 수 있으나 단단한 것은 모르며, 손으로 만지면 단단한 것만 알 수 있을 뿐 흰 줄은 모르므로, 단단한 것과 흰 것은 다르다는 이론, 억지를 써서 옳은 것을 그르다라고, 그른 것을 옳다 하며, 같은 것을 다르다고 하는 궤변을 견백석과 같은 말이다.
ㆍ장강은 박제상 생전 당시의 신라 영토는 무궁화가 자생지인 근화향과 관련이 있고 그 지역이 양자강 중심도시 무한 인근이다. 장강이 어디인지 연구대상이다.
*조선의 정통성을 이은 진한의 후예가 서라벌로 옮기면서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삼는다.
혁거세는 부도의 법에 맞춰 제시의 법을 부흥하고 금척의 이치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오면서 부도의 법을 잊어버리고 문화 침투를 당해 오행의 화가 노출되어 민족정기에 큰 손상을 가져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과 같은 사대주의 학자는 그 뿌리를 잊어버리고 모화 사상에 쌓여 우리의 역사를 왜곡시켜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니 제 역사를 알고자 해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