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암의 신교관
헌효왕(獻孝王28세, 충혜왕의 시호) 복위5년(단기 3677, 서기 1344) 3월에 행촌 이암이 어명을 받아 참성단에 천제를 드릴 때 백문보(白文寶)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덕으로 신을 수호하는 것은 오직 믿음에 있고, 영재를 길러 국가를 지키는 일은 그 공이 서원을 세우는 데 있느니라.
신은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람 역시 신에게 의지하여야 백성과 국가가 길이 편안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제사 드리는 정성은 결국 근본에 보은(報恩)하는 정신으로 돌아감이니 그길을 인간 세상에서 찾음에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
*백문보(白文寶, 1303~1374)~고려 공민왕 때의 충신, 우왕의 사부, 1374년에 직산군 백문보가 공민왕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우리 동방은 단군으로부터 지금에 으르기까지 이미 3600년이 지나(고려사절요, 권29, 공민왕 23년 12월조)라는 구절이 있다. 단군조선을 명뱍한 실존 역사로 인정하였음을 보여준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37~739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고려국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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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암의 역사의식과 고려 권신의 사대주의(11-1)
일찌기 시중(侍中, 고려 때 국정을 총괄하는 대신) 행촌 이암(1297~1364, 단군세기의 저자, 호는 행촌, 시호는 문정, 이맥의 현조부)이 상소하여 국호(國號)를 폐하고 행성(行省,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 간섭을 위해 설치한 정동행성)을 세우고자 하는 의논을 저지하였다. 그 상소문은 대략 이러하다.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각기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으로 삼고 제 풍속으로 민속을 삼으니, 나라의 경계를 깨뜨릴 수 없으며 민속 또한 뒤썩이게 할 수 없는 일이옴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환.단(桓檀, 환국~배달국~단군조선) 시대 이래로 모두 천상 하느님의 아들(天帝子, 天子)이라 칭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음니다. 그러나 자연히 분봉을 받은 제후와는 원래 근본이 같을 수가 없음니다. 비록 지금은 일시적으로 남의 굴레 밑에 있으나 뿌리가 같은 조상(一源之祖)에게 물려받은 정신과 육신을 소유하고 있음니다. 이것으로 배달의 신시개천(神市開天)과 고조선의 삼한관경(三韓管境)이 천하 만세에 대국으로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 것임니다.
우리 천수(天授) 태조 왕건께서는 창업의 자질을 갖추시고, 고구려의 건국 이념인 다물정신을 계승하여 세상을 평정하시어 국가의 명성을 크게 떨치셨음니다. 간혹 이웃에 강적이 생겨 승세를 타고 횡포를 부려서 유주(幽州, 하북성 북경 일대)와 영주(營州, 지금의 조양일대)의 동쪽이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음니다. 바로 이것이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분발하여 자주와 부강의 계책을 꾀하는 까닭임니다. 그런데도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 같은 간악한 무리가 감히 멋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임니다.
*다물정신~'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말로 "옛 땅을 되물린다.
"배달, 단군조선의 옛 땅을 다시 찾는다"는 뜻이다.
*오잠과 류청신~고려 후기의 간신인 오잠과 류청신은 왕위를 노리는 심양왕(瀋陽王) 고(暠)에게 붙여 충선왕을 모함하려했다. 또 원의 황제에게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 국가를 폐하여 원나라의 내지(內地)와 똑같이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기는 하나 어찌 국호를 폐할 수 있으며, 임금의 힘이 비록 약하나 위호(位號)를 어찌 낮출 수 있겠사옴니까?
이제 이러한 거론은 모두 간사한 소인배가 죄를 감추고 도망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일 뿐, 결코 나라 사람들의 공언(公言)이 아닌 줄로 아옴니다. 마땅히 도당(都堂, 의정부의 옛이름)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할 것이 옴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3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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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촌 이암의 3대저서(11-2)
행촌 시중(侍中, 고려 때 국정을 총괄한던 대신)이 지은 저서가 3종이 있다. '단군세기'를 지어 시원국가의 체통(국통 맥)을 밝혔고, '태백진훈'을 지어 한.단(桓檀) 시대부터 전수해 온 도학(道學)과 심법(心法)을 이어받아 밝혔다.
"농상집요(農桑輯要)는 세상을 다스리는 실무 관련 학문을 담은 것이다. 문정공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서문을 붙였다.
'무릇 입을 거리와 먹을 거리를 넉넉하게 하고, 재물을 풍족하게 하며, 씨뿌리고 모종하고 싹을 자라게 하는 방법을 분야별로 나누고 같은 것끼리 묶어 자세히 분석하고 촛불이 비추는 것처럼 명료하게 기록하였다. 진실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 좋은 책이 되리라."
*이색~고려말의 대학자, 호는 목은, 시호는 문정,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이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33~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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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암의 벗 이명과 범장(11-3)
행촌 선생이 일찍이 천보산(天寶山,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유람을 하다가 태소암(太素庵)에서 묵게 되었다. 그곳에 소전(素佺)이라 하는 한 거사가 기이한 옛 서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范樟)과 함께 신서(神書)를 얻었는 데, 환단시절부터 내려온 역사의 진결(眞訣)이었다.
*이명~청평사람이다. 진역유기(震域留記)을 저술하였는 데, 조선 숙종 때 북애자가 발견되어 규원사화의 저본이 되었다.
*범장~범장의 호는 복애(伏崖)로 전라도 금성(지금의 나주)사람이다. 북부여기를 지었다.
★삼신의 원리로 전하는 진리의 말씀
세속의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고사(古史)에 박식한 행촌의 학문은 그 뛰어남이 칭찬받을 만하였다.
그 참전(參佺)의 계율을 닦는 법도는 삼신으로부터 받은 성(性)을 응결시켜 지혜(慧)을 이루고, 삼신으로부터 받은 생명(命)을 응결시켜 힘(力)을 이루는 것이다.
우주에 삼신(三神)이 영원히 존재하시고 인물에 삼진(三眞)이 불멸하는 것은, 마땅히 하늘 아래 영원한 대정신(우주정신)과 혼연일체가 되어 생성과 변화가 무궁하기 때문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도가 하늘에 있으면 삼신(三神)이 되고, 도가 사람에게 삼진(三眞)된다. 그 근본을 말하면 오직 하나일 뿐이다.
오직 하나가 되는 것이 도요, 둘이 아닌 것이 법이다.
위대하도다. 환웅천황이시여! 뭇 사람 중에 먼저 나와 천도의 근원을 체득하시고 대광명의 가르침을 세우시니, 신시개천의 의미가 비로소 세상에 크게 밝아졌도다.
지금 우리는 글을 통해 도를 구하고, 전(佺)에 참여하여 계(戒)을 받아 우리의 가르침을 받들고 있으나, 아직도 계발하지 못하고 있다. 또 온갖 가르침을 듣는다 해도 여전히 이해가 어렵나니, 늙어감이 한스럽다!"
선생은 시중 벼슬에서 물러나 강화도(江都, 지금 강화) 홍행촌에 들어가 호를 홍행촌수(紅杏村叟)라 하고, 마침내 행촌삼서(杏村三書)를 저술하여 집에 간직하였다.
*행촌삼서~단군세기, 태백진훈, 농상집요
*강도(江都)~몽고의 침입으로 도읍을 옮겼는 데, 고종19년(1232)년 6월부터 원종 11년(1270)년 5월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임시수도였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35~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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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상 이야기(12)
정지상(鄭之祥)은 하동 사람이다. 누이동생으로 인해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경효왕(敬孝王, 공민왕의 시호)를 만나 대궐에 들어가 수종들며 공로가 있었다. 임금이 즉위하자 곧바로 뽑혀서 감찰지평(監察持平, 사헌부에 딸린 5품관직)에 이르렀는 데 일을 처리함에 큰소리를 내지않았다.
일찍이 전라도 안렴사(按廉使, 고려때의 지방장관)가 되어 경내로 들어가, 세도가가 권세를 부리는 것을 보면 즉시 잡아다가 매질하고 문초하여 모든 군에 알리니 온 도 사람의 마음이 섬뜩하였다.
야사불화(埜思不花, 원나라에서 귀화하여 공민왕때 국가의 제사때 향을 관리하는자로서 고려에 와서 가는 곳마다 횡포를 부리다가 정지상에게 체포됨)라는 자는 본래 고려국 사람인 데, 원나라에 들어가 순제(順帝)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 형 서신계(徐臣桂)는 육재(六宰, 육부판사 가운 데 하나인 판공부사)가 되었고, 아우 응려(應呂)가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세력을 믿고 위세가 당당하게 복을 누리던 터라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야사불화가 강향사(降香使)라는 직함을 받고 본국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방종과 횡포를 일삼았다. 이때 존무사(存撫使)와 안렴사가 많은 치욕을 당하고 욕을 먹었지만 감히 거술러서 어길 수가 없었다.
전주에 이르자 정지상이 공손하게 맞이하였으나, 야사불화는 심히 거만하게 대하였다. 반접사(伴接使) 홍원철(洪元哲)이 정지상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나 정지상이 듣지 않았다. 홍원철이 격노하여 야사불화에게 "정지상이 천자의 사신을 업신여긴다"라고 하자, 야사불화가 정지상을 결박하였다. 정지상은 크게 분노하여 크게 소리를 지르고 주(州)의 관리를 속여 이렇게 말했다.
"국가에서는 이미 기씨(奇氏, 원나라 순제의 황후인 기황후의 권세를 믿고 세도를 부리던 기철 등의 그 일족)를 주멸하고 다시는 원나라를 섬기지 않기록 하였다. 재상 김경직(金敬直, 고려의 재상)을 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런 정도의 사자를 제압하기는 쉽거늘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나를 구하지 않느냐? 정차 너희 주(州)가 강등되어 작은 현이 되는 꼴을 보게 되리라." 이에 읍리가 소리를 치며 달려 들어와 결박을 풀고 부축하여 나갔다.
정지상이 드디어 무리를 거느리고 야사불화.홍원철 등을 잡아가두고, 야사불화가 차고 있던 금패를 빼앗아 가지고 말을 달려 서울로 돌아왔을 때, 공주를 지나다가 응려를 잡아다가 철추로 며칠 만에 죽었다. 정지상이 와서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임금께서 깜짝 놀아 순군부(巡軍府)에 내려 하옥시키고, 해성원외랑 정휘(鄭揮)어게 명령하시어 전주목사 최영기(崔英起) 와 읍리 등을 체포하였다. 또 차포온(車蒲溫)을 보내시어 어주를 하사하여 불화를 위로하게 하시고 금패를 돌려주셨다.
원나라에서는 단사관(斷事官, 원의 관직명으로 政刑을 맡은 벼슬) 매주(買住)을 보내어 정지상을 국문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기씨를 모두 죽이고, 정지상을 석방하고 순군제공(巡軍堤控)을 삼으셨다. 이후 다시 옮겨 호부시랑, 어사중상이 되었고, 벼슬이 판사(判事)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성품이 엄격하여 모든 육사죄(사형에 해당하는 죄)에는 정지상을 파견하였다.
정지상의 아내는 홀로 담양에 거주하다가 왜적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아들 종(從)은 박위(朴葳, 고려말의 장군으로 우왕 때의 김해부사, 경상도 도순문사가 되어 전함 백 척을 인솔하여 대마도 정벌 )를 따라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였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39~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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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 때 천제를 찬양한 노래(13)
*신교 낭가의 저항 정신(13-1)
문대(文大)는 고종 안효대왕(安孝大王, 23세) 18년(단기 3564, 1231)에. 낭장(郎將, 고려 때 2군 6위의 정6품 관직)으로서 서창현(瑞昌縣)에 머물다가 몽골군사에게 사로잡혔다. 몽골군사가 철산성(鐵山城, 평안북도 서북부 해안) 아래에 이르러 문대로 하여금 고을 사람들에게 '진짜 몽골군이 왔으니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그러나 문대가 소리 높여 "가짜 몽골군이니 항복하지마라"라고 하였다.
이에 몽골 사람이 문대를 참수하고자 하다가 다소 소리 치게 하였다. 다시 전과 같이 하므로 드디어 죽였다.
몽골군이 성을 몹시 급하게 공격하니, 성중에 양식이 떨어져 더 지킬 수가 없었다. 곧 함락되려 하므로 판관(判官) 이희적(李希績)이 성안에 부녀자와 어린이를 모아 창고 속에 들어가게 한 후 불을 지르고 장정들을 이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경효왕(공민왕)12년(단기 3696, 1383) 3월에, 밀직사(密直使, 고려때 왕명의 출납)이 어명을 받들어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렸다. 이어서 시를 지어 나무판에 새겼는 데, 시는 이러하다.
봄바람 속에 만물정취가 짙어가는 데
왕명 받들어 떠나온 길 멀기도 하여라
이른 새벽 말을 달려 구중궁궐 떠났는 데
노 젓는 저녁 무렵, 흰 갈매기는 파도 위를 날아 오르네.
하늘 복판에 솟은 산은 푸른 빛깔 뽐내고
골짜기엔 봄기운 완연해 풀이 절로 꽃을 피우네.
묻노니, 신선 사는 봉래산은 그 어드메뇨.
사람들은 이곳이 바로 선가(仙家)라 하네.
마음은 고요하고 몸은 한가로워 체골조차 신선이 되려하네.
멀리 인간사 생각해 보니 참으로 아득하구나.
자리 깔고 약소한 제물이나마 올리는 것은 홍건적 물리친 뒤이지만
돌로 쌓은 영기 서린 제단은 태곳적 것이라네.
눈앞에 천리 강산 훤히 보이고
이내 몸, 구중 하늘에 오른 것 같아라.
이번 길에 서로 의탁할 짝이 업지만
적을 물리치고 환도한 첫 해를 기억이나 하자구나.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4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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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학 권근의 제천문(13-2)
강릉왕(江陵旺) 우(禑) 5년(단기 3712, 1379) 3월 신미(辛未)에, 사자를 보내어 참성단에서 천제 드릴 것을 명하셨다. 대제학 권근(權近, 고려말 조선초 학자이며, 입학도설, 동국사략의 저서가 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명에 따른 응제시가 있다)이 지은 서고문(誓告文)을 지어 올렸는 데, 그 글은 이러하다.
•초헌
바다 가운데에 산이 높으니 인간 세상의 번뇌와 시끄럼에서 멀리 떠났음니다. 제단 중앙은 하늘에 닿을 듯하니 신선의 수레를 타시고 강림하시는 삼신님을 맞이하옴니다. 초촐한 음식을 올리오니 밝으신 삼신께서 계시는 듯하옴니다.
•이헌(二獻)
삼신께서 미혹됨이 없이 들어 주시나니 이 사람을 감싸 안고 베풀어 주십니다. 하늘은 사사로움 없이 덮으시고 인간 세상을 굽어보십니다. 예를 극진히 하여 섬기나니 삼신께서 감응하시어 성신이 통하기를 축원하옴니다.
곰곰히 헤아려 보건대 마리산은 단군왕검께서 천제를 지내시던 곳이옵니다. 성조(聖祖) 이래로 백성을 위한 법도를 세우고, 옛 법통을 계승하여 아름다움을 드리우셨음니다. 고종에 이르러 오랑캐(몽골)를 피해 도읍을 옮기고 또한 이곳에 의지하여 국본을 보전하였음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국통이 끊어지지 않았고, 소자(우왕)가 이를 계승하여 더욱 공경하옵나이다.
하늘이시여! 어찌 외구(外寇)가 개같이 좀도독질하여 우리 백성을 어란(魚爤)의 지경에 이르게 하시옴니까? 비록 변방이 침략을 받았으나 오히려 표문(表文) 올리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어찌 그 고을이 침략 당하는 것을 보기만 하시옵니까? 어찌 밝은 위엄의 징없이 없으시겠습니까만 실로 부덕한 소치이니 진실로 남에게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요. 오직 자책할 뿐이옴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약 그 하는 일이 편안히 여기지 않는다면, 삼신께서도 장차 돌아가실 곳이 없을 것임니다. 이에 옛 법을 좇아 감히 지금의 환란을 고하오니, 조촐한 저의 정성이지만 기꺼히 받으시고 밝게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바다에는 큰 파도가 일지 않게 하시어 배를 타고 멀리서도 몰려들게 하소서.
하늘이시여! 천명을 내려 주시어 사직(社稷, 나라를 처음 열면 먼저 토지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도록 보살펴 주옵서서.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43~745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고려국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1만년의 한겨레의 정체성을 찾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