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장군과 소손녕의 담판(7)
거란의 성종(요나라 6세왕, 982~1031)이 장수 소손녕(거란의 장수, 동경유수)을 보내어(성종12, 단기 3326, 993) 봉산(蓬山, 지금의 평북 태산과 구성의 중간)을 함락시키고 우리 선봉을 물리쳤다. 성종(고려 6세왕, 981~997) 문의대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의논할 때, 어떤 사람은 항복하자하고, 어떤 사람은 땅을 떼어 주자고 하였다. 중군(中軍) 서희(徐熙)가 홀로 아뢰었다.
"지금 적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 급히 서경(지금의 평양) 이북을 떼어 넘겨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옴니다. 더구나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의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요구해 온다면 그대로 다 내어 줄 수 있음니까? 하물며 지금 땅을 떠어 준다면 진실로 만세의 수치가 될 것이옴니다. 원컨대 도성으로 돌아가시어 신 등으로 하여금 한 번 싸우게 한 뒤에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옴니다."
서희가 국서(國書)를 받들고 거란 진영에 들어가 상견의 예를 물었다. 소손녕이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는 마땅히 뜰에서 절하여야한다"라고 하였다. 서희가 "양국의 대신으로 어찌 이와같이 할 수 있는가"라고 하니 소손녕이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는 신라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고구려땅은 우리 거란의 것이다. 너희가 이를 침략하였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도 바다 건너 송(宋)을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전쟁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 고려가 요나나를 상국으로 섬기고 사신을 왕래하며 교류한다는 것)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이에 서희가 말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옛 고구려의 땅이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하였다. 만약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귀국의 동경(東京, 요령성 요양시)도 모두 우리 땅에 있거늘, 어찌 침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여진을 쫒아버리고 우리 옛 땅을 돌려준다면 어찌 감히 수빙(修騁, 극진히 예를 갖추어 웃사람이나 귀인을 찾는다는 뜻)하지 않겠는가?"
말과 얼굴빛이 강개하므로 손녕이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병력을 거두기로 결정하고 연회를 베풀어 위로한 뒤에 서희를 전송하였다.
*서희(徐熙, 942~988)~고려 초기의 장군, 거란이 침입하자 중군사(中軍使)로 북계로 나가 적과 대진하였다. 싸움이 불리해지자 일부 신하들이 서계(西界, 평안도 지방)의 땅을 할양하고 화친하고자 주장하는 데 반대하고, 스스로 적자 소손영 진영에 가서 담판하여 무사히 해결하였다. 다음해에 여진을 몰아내고 압록강 이남,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사후에는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15~716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고려국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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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여진정벌(8-1)
•고려의 북방영토
도원수(都元帥) 윤관(尹瓘)은 여진을 쳐서 무찌르고 선춘령(先春嶺)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언이(彦颐)를 임금에게 보내어 표(表)를 올려 하례하게 하였다.
그런데 평장사 최홍사.김경용과 참지정사 임의와 추밀원사 이위 등이 선정전(宣政殿)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만하였다. 윤관, 오연총, 임언 등은 망령되어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전쟁에 패하고 나라를 해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 될 수 없음니다.
간관 김연, 이재 등도 역시 계속 탄핵하였다. "임금이 땅을 차지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기르고자 함인 데, 지금 성을 다투며 싸워 사람을 죽였으니,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을 편히 쉬게 함만 못하옴니다. 지금 돌려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틈이 생길 것임니다." 임금이 물었다. "무엇 때문인가?" 김연이 아뢰었다.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을 때, 거란에 고하는 표문에 "여진의 궁한리(弓漢里, 여진족이 살던 땅이름)는 우리의 옛땅이다. 그 거주민 또한 우리 백성인 데, 근래에 도적들이 변방에 끊임없이 침입하였기 때문에 다시 수복해서 성을 쌓는다"고 하였음니다. 표문의 내용은 이러하나 궁한리 추장은 거란의 관직을 많이 받은 자이니 거란이 우리 주장을 망언이라 책망할 것임니다. 이제는 우리가 만약 동쪽으로 여진을 방비한다면, 신은 9성이 우리 삼한에 복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옴니다. 간의대부 김인존도 역시 옛 땅을 돌려 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16세 예종)께서 유시(諭是)하셨다. "두 원수(도원수 윤관과 오연총)가 여진을 친 것은 선제(先帝, 15세 숙종)의 유지를 받고 짐이 몸소 말한 일을 행한 것이니라.
몸소 적의 칼끝과 화살을 무릎쓰고 적진에 깊이 들어가서 베고 포로로 잡은 자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고, 천 리 땅을 개척하고 9주에 성을 쌓아 국가의 치욕을 씻었으니 그 공은 가히 크다 하리로다.
그러나 여진은 인면수심으로 그 변덕이 심하다. 그 남은 무리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추장이 항서를 바치고 화친을 청해오니, 신하들이 모두 편하게 여기고, 짐 또한 차마 하지 못하겠다.
유사(有司)가 법을 따져서 자못 탄핵하는 말이 많으므로 급히 그들의 직책을 박탈하려 하나, 짐은 끝까지 이를 허물로 삼지 아니할 것이다. 맹명시(孟明視)가 다시 황하를 건너 공을 세운 것과 같이 하느니라.
*윤관의 9성과 선춘령 동북 9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두만강 북쪽 700리, 길주 이남, 함흥평야라는 세가지 학설이 있다. 길주는 진흥왕순수비를 윤관비로 오인하면서 생겨났다.
일제가 우리역사를 왜곡하는 호재로 사용하여 9성을 함흥까지 끌어내리는 근거가 되었다. 우리 교과서도 함흥평야설을 따르고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윤관과 오연총이 여진을 쫓아내고 9성을 설치하였다.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라고 하여 공험진과 선춘령은 같은 지역으로 기록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흥에서 공험진까지 700리, 동북쪽으로 선춘현까지 700리가 된다"라고 하여 공험진은 서쪽에, 선춘령은 동쪽에 있다. 공험진 남쪽에는 영고탑과 돈화가 이웃한다고 하였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17~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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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의 땅을 돌려주다(8-2)
예종 문효대왕 4년(단기 3442, 1109) 가을에, 9성에서 철수하고 여진의 옛 땅을 돌려주었다. 이에 앞서 여진이 요불(•弗), 사현(史顯) 등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이렇게 상주하였다. "옛날에 저희 태사 영가(盈歌, 여진 완안부의 추장)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출생하였으니 자손대에 이르서도 마땅히 귀부(歸附)함이 옳을 것이라'고 하였음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 여진 완안부의 추장,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형)께서도 역시 대국(고려)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음니다. 갑오 연간에 이르러 궁한촌 사람들이 스스로 난리를 일으켰으나, 본래 태사가 지휘한 일이 아니었음니다. 국조(고려)에서는 죄를 물어 이들을 토벌하였으나 다시 수호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저희는 이를 믿고 조종을 끊지 않았음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군사를 일으켜 저희 늙은이와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하였음니다. 이에 태사가 저희를 보내 이 땅을 되돌려 주실 것을 청원하게 하신 것임니다."
또 재추(宰樞, 고려 시대에 재부인 중서문하성과 추밀원을 가르키는 말로 이 양부가 합좌해 국가의 중요 정책을 의논하고 결정), 어사대(정치의 잘잘 못을 논의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관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일을 맡은 관청), 판사(어사대 판사)와 중서 문화성(고려 시대 국정을 총괄하던 최고결정 기관) 성재(省宰, 고려 시대의 내사성.문화성.상서성 등에 소속된 2품이상의 관리), 지제고(知製고, 고려시대의 관직으로 조서.교서 등을 작성하는 곳), 시신(侍臣), 도병마판관과 문무 3품 이상을 소집하여 다시 9성을 돌려주는 것에 대하여 가부를 물으니 모두 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여진이 세운 금(1115~1234)나라의 정사인 '금사 세기'를 보면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 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라고 하였다.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준(今俊)이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 평주의 승려 금준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았는 데 이 사람이 금나라 선조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평주 금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여진으로 들어가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고을(古乙)이라 불렀는 데, 금나라 시조 아골타가 그의 후손이다. 최근에는 함보가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라는 설이 통용되고 있다. 그 근거로 제시된 것이 '만주원류고 부족의 편집자 주'에는 "신라 왕의 성 김씨가 수십 세 전해졌고 금이 신라로부터 왔으니, 의심할 바 없이 그가 세운 나라의 이름도 마땅히 여기서 취한 것이다. '송막기문'에도 "여진 추장은 신라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국경, 만주 선춘령(8-3)
옛 사서에는 "두 장군이 선춘령에 비를 세우고 "이곳이 고려의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선춘령은 두만강에서 700리 밖, 송화강 근처 땅이 있다"라고 하였다.
*선춘령(先春嶺)~윤관 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쌓은 9성의 영역에 대하여 '고려사 지리지'에는 "두만강 밖 700백 리 선춘령에 '이곳에 이르러 고려의 국경을 삼는다'는 윤관 비가 있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00백 리, 선춘령이 두만강 동북 7백 리"라고 하여, 고려 9성이 두만강을 넘어 만주 깊숙이 있다는 '태백일사'의 기록과 일치된다. 그런데 식민학자들은 이 동북 9성을 함흥 일대로 본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21~723
#한자 원문해설은 태백일사 고려국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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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북방영토(9-1)
• 윤언이의 자해표
광주목(廣州牧) 윤언이가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는 글(自解標, 自明表)을 올려서 이렇게 주장했다.
"중군(中軍, 김부식)이 아뢴바를 보면, '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사당(死黨)을 지어 크고 작은 일에 함께 의논하였다'하고, '임자(단기 3465, 1132)년에 임금께서 서경을 순행하셨을 때 아국이 독자적으로 건원칭제(建元秤帝)하기를 청하였다' 하며, 또 '국학생을 넌저시 꾀어 앞의 일(건원칭제)을 상주하게 하였는 데, 대개 그 의도는 대국인 금나라를 격노시킬 일을 일으키고 틈을 타서 자의로 반대자들을 제거한 후 외인과 붕당을 만들어 반역을 꾀하고자 한 것이니, 이는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신이 이 글을 두세번 거듭하여 읽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었음니다.
신이 건원칭제를 청한 것은 임금을 받드는 충정에 근본을 둔 것임니다. 고려에도 '태조와 광종의 고사'가 있고, 옛 기록을 상고해 보면 신라와 발해가 비록 연호를 만들어 썼으나 주변 대국이 일찍이 이를 문제 삼아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작은 나라는 감히 그 과실을 따져 의논조차 하지 않았음니다. 어찌 지금의 성세(聖世)에 이것이 참람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음니까?
신이 일찍이 이 문제를 논의한 바 있으니, 죄라면 이것이 죄일 것임니다. 사당(死黨)을 지었다거나 대금(大金)을 격노시키려 했다는 말은 비록 엄청나나 본말(本末)이 서로 맞지 않음니다.
왜냐하면 가령 강한 적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면 막아 내기에 겨를이 없을 터인 데 어찌 틈을 타서 일을 처리할 수 있겠음니까? 대체 그 붕당이라 지목된자는 누구이며, 제거하고자 한 자는 어떤 인물이옴니까?
무리가 만약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우더라도 곧 패하여 몸 둘 곳조차 없을 터인 데, 어찌 방자한 뜻을 품어 그런 일을 꾀하겠습니까?
임금님의 명철하심을 믿고 거듭 생각하건대 신이 지극한 자질로서 서경전역(西京戰役)에 종사하여 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사옴니다. 이것이 마땅한 도리임니다. 서경 정벌의 성사는 모두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니, 이제 제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족히 말할 수 있겠사옴니까?"
*태종과 광종의 고사~건원칭제한 사실을 말한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정통정신과 법통을 이은 후계자"라는 뜻에서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또한 4대 광종은 개경을 황도라 하고, 연호를 광덕이라고 하였다.
*서경전역~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으로 인한 싸움,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조선 역사상 1천 년 이래 제일 대사건"이라했다. 그는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만일 묘청이 승리하였다면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전진하였을 것이다 하며 김부식의 승리를 통탄하였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23~725
#한자 원문해설은 태백일사 고려국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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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에 전하는 조위총의 난(9-2)
'금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세종 대정(大定) 15년(단기 3508, 1175) 9월에, 고려 서경 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서언(徐彦)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자비령 서쪽과 압록강 동쪽 땅을 가지고 내부(內附)하려 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조위총~정중부. 이의방을 치고자 반란을 일으킨 인물, 1174년(명종 4) 병부상서 겸 서경유수인 조위총이 임금을 폐위하고 문신을 학살하여 전횡을 일삼던 '무신의 난'(1170)의 주역인 정중부.이의방을 타도하고, 자신과 서경(평양)인의 세력을 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자 절령(岊嶺)이북 40여 성이 내응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차레 토벌군을 보내 치자 불리해진 조위총은 금나라에게 절령 이북 40성을 가시고 내부한다는 조건으로 응원군을 요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사에 실패하였다.
★예종의 영토회복의지(9-3)
'고려사(高麗史)'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종 11년(단기 3449, 1116) 3월 을미초하루에, 임금께서 요나라의 내원(來遠)과 포주(抱州) 두 성(城)이 여진에게 공격당해 성중에 식량이 다 떨어졌다는 말을 전해 듣고, 도병마록사 소억(邵億)을 시켜 쌀 1천석을 보냈다. 그러나 내원성의 통군(統軍)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내원과 포주~지금의 요령성 봉성현.단동시 지역, 고려의 국경을 넘어 압록강변에 위치, 현재 번역된 고려사절요에는 내원성은 압록강 검동도, 포주성은 평북 의주라고 했다.
8월 경진에, 금나라 장수 살갈(撒喝)이 요나라 내원과 포주 두 성을 쳐서 거의 함락할 지경에 이르자, 그곳 통군 야율녕(耶律寧)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려 하였다.
임금께서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韓噭如)를 보내어 야율녕을 불러 효유(曉喩, 깨닫도록 일러줌)하게 하셨는 데, 야율녕이 임금의 전지(傳旨, 전하는 요지)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한교여가 급히 보고하자 임금께서 추밀원에 명하여 차자(劄子,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문서 또는 상관이 아랫 사람에게 보내는 공문서)를 갖추어 보내려 하셨다. 재신과 간관이 이뢰기를
"저들이 임금의 전지를 요구하는 뜻은 알기 어려우니 그만두게 하옵소서" 하였다. 임금께서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어 "포주는 본래 우리 옛 땅인즉 돌려주기를 원하노라"라고 청하셨다. 금나라 임금이 아국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직접 빼앗으라" 하였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25~726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고려국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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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비의 역사의식과 낭가의 자주독립정신(10-1)
후암(厚庵) 이존비(李尊庇, 단기 3566~3620, 1233~1287)는 고려 경효왕(景孝王, 25세 충렬왕) 때 사람이다. 일찍이 서연(書筵, 왕세자가 글을 배우는 곳)에서 자주와 부강의 정책을 논하고 또 이렇게 아뢰었다.
"우리나라 환단(桓檀).조선.북부여.고구려 이래로 모두 부강하였고 자주(自主)를 유지하였음니다. 또 연호를 정하고 황제라 칭한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실행하였으니, 지금은 사대(事大)의 주장이 주장이 국시로 정해져 상하가 굴욕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방법을 도모하지 않으니,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보전하는 것은 진실로 훌륭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천하 후세의 비웃음은 어찌하겠사옴니까? 또한 왜와 더불어 원한을 쌓고 있으나(여몽연합군이 1274년과 1281년에 일본을 정벌한 일을 말한다) 만약 원나라 왕실에 변고가 생긴다면 장차 무엇을 믿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음니까? 황제라 칭하는 일을 이 시대에 꺼리고 기피하여 갑자기 회복하기는 진실로 곤란하나 자강(自强)의 계책은 강구하지 않을 수 없사옴니다".
상주한 것이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들은 자마다 옳다고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뒤에 왜(倭)에 대비하는 다섯 가지 계책(五事)을 말하는 데,
첫째, 호구를 상세히 파악하여 전 백성을 병사로 만드는 일
둘째, 병.농(兵農) 일치의 제도를 만들어 바다와 육지를 함께 지키는 일
셋째, 군량을 저장하고 전함을 만드는 일
넷째, 수군을 확장하고 육조(陸操, 육군을 부림, 육군도 잘 길러야 한다는 뜻)도 겸하여 익힐 일
다섯째, 지리를 상세히 알아두고 인화(人和)를 확보하는 일이라 하였다.
일찍이 회당상인(晦堂上人, 고성 이씨족보에는 이암의 셋째 아우 이징이 출가하여 회당화상 이라했다)에게 준 시 한 수를 전하니 이러하다.
사물은 아름다움과 추함을 떠나서 쓰임이 있나니
누가 쓴 오얏나무에 열매가 많다고 싫어하리오.
맏자식은 오랫동안 조정에서 천자를 모시고
둘째는 새로이 절간에 출가하였네.
임금의 충성함은 신하의 직분이지만
애착 끊고 새간을 벗어남 또한 어떠하리.
노웅은 오히려 체념하고 웃을 수 있으니
내 영혼은 꿈속에서 하늘 끝에 올라 아득히 헤메이네.
*이존비(1233-128)~고려 충렬왕 때 문신으로 초명은 인성(仁成)이다. 원종초 문과에 급제하여 국학박사 직한림(直翰林)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하고, 충렬왕 때 좌승지. 밀직부사를 거쳤다. 정직하고 청렴하던 이존비가 죽으니 세자가 슬퍼하였다. 단군세기를 쓴 이암, 태백일사를 쓴 이맥, 환단고기를 교열한 해학 이기의 직계선조이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727~729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고려국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