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생각건대 옛적에 시조 추모왕(鄒牟王, 1세 고주몽성제)께서 우리 고구려을 창건하셨다. 추모왕은 북부여(北夫餘)에서 출생하셨고, 고구려의 추모왕이 천제지자(天帝之子)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뜨리고 탄생하여 날 때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추모왕이 길을 떠나 수레를 몰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데 길이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경유하시게 되었다.
이때 추모왕이 나룻가에서 외치기를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我是皇天之子),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1세 고주몽성제)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의 떼를 뜨위서 물을 건너게하라"하였다. 말이 끝나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세상의 왕위를 즐기지 않는 무렵에(不樂世位) 하늘에서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홀본성 동쪽 언덕에서 황룡이 왕을 업고 하늘로 올라갈 때, 세자인 유류왕(儒留王, 2대 유리명제)을 돌아보고 명령하여 당부하기를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려라(以道與置)"하셨다. 대주류왕(大朱留王, 3세 대무신열제)은 선왕의 유지(遺旨)를 받들고 도로써 나라를 다스려 왕업을 계승 발전시켰다.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17세를 내려와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열제19대 태왕, 재위 391~413))이 십 팔세(391)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 하였다. 호태왕(好太王)은 그 베푼 은덕이 하늘에 미치고 불의를 바로잡는 위무(威武)는 사해(四海)를 뒤엎었다. 부정한 무리를 쓸어 없애시니 백성은 직업에 안정되었다.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은성(殷盛)하고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아니함인지 삽십구세(412)에 세상을 버리고 나라를 떠나셨다.
갑인(甲寅)년 9월 29일에 옮겨져 산릉(山陵)에 모시고 비(碑)를 세우고 훈적(勳績)을 새겨 기록하여 뒷 세상에 보이려 한다.
*즉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는 데, 우리 아버지 광개토대왕은 원시조로부터 17세손이고, 고주몽할아버지로부터는 13세손이다.
*추모왕은 북부여 출생이며, 천제국(단군자손)의 자손이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642
#광개토왕비는 학자에 따라 견해야 다르니 각자 입장에서 되새기시길 바람니다.
한자원문 해설은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을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 해석(2)
영락 5년 을미에 패려(稗麗)가 순종하지 않아 왕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고 가서 정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빈산(貧山)을 지나 염수(鹽水) 위에 이르러 그 구(丘)에 있는 부락 육, 칠백의 영(營)을 깨뜨리고 소, 말, 양 등을 사로잡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여기에서 수레를 돌려 • 평도(平道)를 경유하여 동쪽으로 •성(城)과 역성(力城), 북풍(北豊)에 돌아오며 여러 지방을 왕이 고루 순수(巡狩)하셨고, 관경(管境)을 순행하고 사냥하며 돌아오셨다.
백잔(百殘, 백제)과 신라(新羅)는 본시 속민(屬民)으로서 옛적부터 조공(朝貢)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 이래로 매양 바다를 건너 백잔과 ••와 신라를 파(破)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으려 하므로 이에 광개토태왕 영락 6년 병신에 태왕이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왜적(倭賊)과 잔국(殘國, 백제)을 토벌하심에 군대가 먼저 왜적과 과구(窠臼, 소굴)에 이르러 십팔성을 공격하여 취하셨다. 그리고 구모로성, 각모르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리성, 수••, ••성, 개이야라성, 전성, ••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민성, 입성, •성, ••••••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성, •고로성, 구천성, •••••기국성, 잔(殘, 백제)은 정의에 굴복하지 않고 감히 모든 싸움에 나섰다. 왕이 진노하여 아리수(阿里水)을 건너서 성(城)을 압박하시니 백제의 군대가 제 소굴로 도망치므로 이어 그 성을 에워싸 공격하셨다. 백제왕은 당황하고 다급하여 남녀 포로 일 천명과 세포(細布) 천필을 바치니 왕에게 귀순하여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부터는 노객(奴客)이 되겠음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그들이 처음에 잘못한 허물을 널리 용서하시고, 뒤에 순종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고 기록하셨다.
그리하여 58개의 성과 700개의 마을을 얻고, 백잔(백제) 임금의 아우와 대신 열 사람을 데리고 군대를 철수하고 수도에 돌아오셨다.
8년 무술에 일부 군대를 파견하여 식신(息愼, 숙신)의 토곡의 정황을 탐색하고 바로 공격을 개시하여 막•라성, 가태라곡에서 남녀 삼백여인을 포로로 잡아가시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식신은 조공을 바치고 복종하여 섬겼다.
*염수의 위치~혼하설, 태자하 상류설, 요하 상류 시라무렌하 유역의 염호인 광제호 일대를 보는 설 등이 있는 데, 요하 상류 일대로 보는 견해가 합리적이다.
*초기 일본의 비문 연구자들이 소위 말하는 임나일본부설에 상기 신묘조를 끼워 맞추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즉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의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등 전설에서 말하는 대로 일본이 백제, 신라, 임나(가야)을 통치했다는 근거자료로 활용하였다. 조선반도 식민지화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다음 인터넷, 광개토대왕비 해석)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다. 일본서기.고사기도 가공소설에 지나지 않고, 위에 일어난 사건은 반도가 아니라 대륙에서 일어난 일들을 반도에 짜집기를 한 것이다.(이강산 견해)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641~643
#광개토태왕비문 해석은 여러 견해가 있으니 잘 읽어보시고 자기 견해를 찾으시면 됨니다.
이곳의 지명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함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반도로 규정하고 있는 데, 대륙에서 찾아야 옳다고 봄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 해석(3)
9년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고구려와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和通)하여 친선을 맺었다. 호태왕이 순시차 평양(平壤)에 가셨는 데 신라(新羅)에서 사절을 보냐와 왕에게 고하기를 "왜인(倭人)이 그 영토(신라)에 가득히 들어와서 성(城)과 못을 파괴하고, 노객(奴客, 신라인)을 왜의 민(民)으로 삼고자 함니다"라고 고하며 호태왕(好太王)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호태왕은 그들의 충성을 동정하여 사절을 다시 보내어 그 요청을 허락하셨다.
10년 경자(庚子)에 보병과 기병 오만(五萬)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 남거성(男居城)을 경유하여 신라성(新羅城)에 들어가니 그 안에 왜병이 가득했는 데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倭賊)이 퇴각하였다. ••••••• 왜의 뒤로 돌아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에까지 이르러 계속하여 성(城)을 함락하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이에 안라인 수병(戍兵)으로 하여금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 관군이 신라성, 신성(晨聖)을 함락하니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성내(이하원문십육자결......십구(十九), 왜적과 함께 모두 물리치고 신라인 수병에게 맡기어 안돈(安頓)시켰다.
(...원문오십자결(이도 역시 관군이 백잔과 왜구를 공파(攻破)한 기록으로 추측된다. 안라인수병이 두 번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삼면 이행에 나오는 안라인 수병도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옛적에 신라의 임금이 친히 와서 영사(聆事, 잘 따르며 섬기는 행위)를 한적이 없었는 데••••광개토경호태왕이 •••(오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도와준 연고로) 신라 임금이 친히 가복(家僕)을 데리고와 고구려왕(호태왕)에게 조공하였다.
14년 갑진(甲辰)에 왜가 부당하게 대방(帶防, 산동성 연성시 추정, 김진경지음, 백제 900년의 비밀 관미와 고평, 어드북스, 2015)지역을 침입함에 잔병(백제의 군대)과 화통, 연합하여 석성을 침입해오니, 호태왕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매, 평양(고구려의 수도 현 산동성 제남시, 김진경추정)•••에서 격전을 하게 되니 왕의 군대가 들이치시니 왜구가 궤패(潰敗)하여 흩어지고 전사한 자가 헤아릴 수없이 많았다.
17년 정미(丁未)에 보병과 기병 오만명을 파견하여 •••••••••왕사(광개토태왕 군대)가 ••와 합전(合戰)하여 적군을 섬멸하여 죄다 없애시고 갑옷 일만 여벌을 위시하여 군수물자와 장비를 노획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면서 사구성, 누성, 우유성, •성, ••••••성을 깨뜨렸다.
20년 경술(庚戌) 동부여는 옛적 추모왕의 속민이었는 데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그래서 호태왕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러 가셨다. 군대가 부여성에 도착하니 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을 헌납하였다. 왕의 은혜가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오는 데 또 그들 중에서 왕의 덕화(德化)을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들은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이다. 공격하여 함락시킨 성(城)의 수가 육십사(六十四)이고, 촌(村)의 수가 일천사백(一千四百)이다.
*국연~국강상에서 실질적인 수묘 활동에 종사했고, 간연은 농경활동을 통해 국연의 수묘 활동을 보장하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국연과 간연은 30가와 300가로 비율로 10대 1이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647~pp649
#한자원문은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을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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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파소의 참전계(4)
을파소가 국상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뽑아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삼았다.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參佺)이라 하는 데, 무리 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皂衣)라 하는 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잘 지켜, 나라의 일을 위해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일찍이 을파소가 무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시시대에 신교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칠 때는, 백성의 지혜가 열려 나날이 지극한 다스림이 이르렀으니, 그것은 만세에 걸쳐 바꿀 수 없는 표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전이 지켜야 할 계율을 두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고 백성을 교화하며, 한맹(寒盟)을 행함에도 계율을 두어 하늘을 대신해서 공덕을 베푸나니 모두 스스로 심법을 바로 세우고 힘써 노력하여 훗날 세울 공덕에 대비하라."
*을파소~9세 고국천열제 때의 재상, 압록곡 사람으로 2세 유리명열제 대신이었던 을소의 손자
*한맹~고구려에서 10월에 행한 신교의 제천의식이다. 일명 동맹(東盟), 동명(東明)이라고도 한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춘판(2012), pp563~565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조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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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 해석(5)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생존시에 말씀하시기를 "조왕(祖王)과 선왕(先王)께서는 원근의 여러 지방에 사는 구민(舊民, 본토인)만이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기었으나, 나는 이들 구민이 차차 몰락하게 될 것을 염려한다. 만일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무덤을 편히 수호할 자들은, 내가 돌아다니며 직접 데리고 온 한족(韓族)이나 예족(濊族)이니 그들에게 수호하고 소제하는 일을 맡게 하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한족과 예족 이백이십가(二百二十家)를 데리오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법을 잘 모를 것을 염려하여 다시 구민 일백십가(一百十家)을 데려왔다. 새로 온 사람과 전부터 있던 자를 합하면 수호하는 호수는 국연(國煙)이 삼십가(三十家), 간연(看煙)이 삼백가(三百家) 모두 합하여 삼백삼십가(三百三十家)이다.
상조 선왕(上祖 先王) 이래로 능묘(陵墓)위에 비석을 갖추지 못하여 무덤을 지키는 가호(家戶)들이 잘 못하는 사태가 생기게 되었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은 조선왕(祖先王)의 무덤 위에 비명(碑銘)을 세우고 그 가호(家戶)들로 하여금 잘 못하는 일이 없게 하셨다. 또 제도를 제정하여 무덤을 수호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후로 서로 팔아 넘기지 못하게 하고, 아무리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마음대로 사 가지 못하게 하셨다. 만일 법령을 위반하고 파는 자는 형벌에 처하고, 사는 사람도 법을 마련하여 그로 하여금 무덤을 수호하게 하셨다.
(끝)
★광개토왕릉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의 동쪽인 국강상에 있는 광개토왕릉 동쪽 편에 세워졌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를 줄여서 '호태왕'라고도 한다. 비가 있는 곳의 현재 지명은 압록강 북안(北岸)인 길림성 집안현 통구진 태왕향 태왕촌이다. 주변에는 대형고분과 성터를 비롯한 많은 고구려 유적이 있다.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으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으로 된 4면비로, 남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세워져 있다. 높이는 6.39미터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 부분은 약간 좁다. 문자는 4면에 모두 새겨져 44행 1,755자로 이중 마멸되어서 전혀 판독할 수 없는 것이 약 140여 자에 이른다.
중국학자 왕건군(王健群)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1면은 11행 449자, 제2면은 10행 410자, 제3면은 14행 574자, 제4면은 9행 369자이다. 각 문자는 당시에 통용되던 예서체에 가까운 서체로 장중하고도 위엄이 있어 고구려의 독자의 것으로 할 만큼 독특하다.
비가 발견된 이후 집안현의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비각을 설치하고, 이 비각이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해서 철거되고, 1982년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비각이 세워져 오늘에 이른다.
*연구 활동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조선 전기 문헌에서 간혹 언급은 있었으나 비문을 확인한 적이 없었다.
•17세기 봉금제도가 해제되고 회인현(懷認縣)이 설치된 뒤 1880년을 전후에서 재발견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 탁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질러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켰다.
비문 해석하고 연구를 독점한 것은 일본인이다.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 수집활동을 수행했던 포병중위 사쿠오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해독작업을 진햇했고, 1888년에 아시아협회 기관지인 '회여록(會餘綠' 5집에 실려 일반인에게 알려졌다. 이후 연구물이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대부분은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와 일본서기(日本書記)'의 4세기 후반에는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전설적 내용을 관련지어 그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연구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었다. 1913년 세키노 이마니시가 자세한 조사를 실시했다. 1935년에는 이케우치를 비롯한 조사단이 현지에 가서 고분을 비롯한 유적을 조사했다.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1907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고, 1909년 박은식, 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신채호가 1914년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조선상고사'에서 "결자에 석회를 발라 첨작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는 그 진(眞)을 실(失)함을 한(恨)한다"고 언급했다.
정인보는 1930년말 무렵에 집필된 것으로 신묘년 기사에 대해 일본인과 다른 새로운 해석을 했다. "고구려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하여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1966년에 김석형이 '초기 조.일 관계사 연구'를 간행하여 일본식민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해 온 임나일본부설을 전면 부정했다. 삼한 삼국의 이주민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해 분국을 수립했다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해, 이후 북한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1970년초에 제일 연구자 이진희(李進熙)는 1900년 전후에 참모본부에 의해 비문의 문자가 석회로 조작되었다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일본학계의 일부는 근대 일본 역사학의 체질 문제를 거론하여 자기반성을 행하기도 하고, 일부는 반론을 펴기도 하였으나 자체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즈음에 국내에서도 비로소 정밀한 검토가 이루어져 신묘년 기사는 왜가 주체가 아니라 고구려가 주체가 된 것이라는 전제 아래, 비문 속의 왜는 백제나 가야의 활동에 종속적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