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주몽 성제가 재위하실 때 말씀하시기를 "만약 적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자신의 두 아들(비류와 온조)에게 이롭지 못한 것을 염려하다가 경인(단기 2292, BCE 42) 3월에 사람들에게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진.번(옛 진한과 번한)사이에 있는 바다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렀다.
*패대~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지역이라는 뜻으로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일대이다.
*'삼국사 백제본기 온조왕'(서기전 18~28년) 1년(서기전 18년)의 기록에 따르면 고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새나라를 세우는 과정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인 데, 혹은 주몽이라고 한다. 추모는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로 오게 되는 데, 졸본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다. 왕은 주몽을 보고서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 데, 맏아들을 비루라 하였고, 둘째 아들을 온조라고 하였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유리)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내려갔는 데, 따라오는 백성들이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고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고자 하니 열 신하가 모두 "이 강의 남쪽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大海)가 막혔으니, 어떻게 하늘이 내려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임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않음니까? 라고 간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江)남쪽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대의 성제(性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하게 살 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와서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곳으로 내려올 때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나중에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또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상기한 '삼국사' 기록에 따르면 비류와 온조는 졸본부여에서부터 남쪽으로 내려갔는 데, 한산.부아악.한수.미추홀.위례성 등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에 상기 기록 뒷부분에 이어서 부기 되어 있는 기록에 따르면 "비류는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졸본부여는 북쪽에 있어야 하고, 남쪽으로는 패수와 대수를 건너면 한산과 미추홀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한수(漢水)를 남쪽으로 건너면 하남위례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산의 부아악의 위치가 반드시 한수 이북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한수 이남까지 내려와서 '이 강(江)의 남쪽 땅'까지 둘러보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의 기록 자체로만 볼 때, 한산은 한수의 이북에 있다고 볼 수 있고 한수 이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의 남쪽 땅'에서 지칭하는 '이 강은' 한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패수와 대수의 남쪽에 한수에 해당하는 강이 있어야 하는 데. '이 강'이 한수(漢數)로서 황하(黃河)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남평양은 현재의 산동성 덕주 인근 지역이어야 하며, 그 남쪽에 오경하(烏頸河)를 삼국시대의 패수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수가 현재의 산동성 오경하로 추정하는 것이 올바르면, 오경하의 남쪽에서 오경하와 팽행으로 흐르는 현재의 도해하(徒駭河)를 대수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남쪽에는 현재의 황하를 삼국시대의 한수라고 볼 수 있다. 또 한산의 부아악은 현재의 태산(泰山)으로 추정한다.
(김진경지음, 백제 900년의 비밀, 관미와 고령, 어드북스, 2015), pp66~69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613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
★소서노의 어하라 피봉된 비류의 계승(22-2)
그곳에 산지 10년 만에 밭을 사서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 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는 대수(帶水)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는, 5백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그리고 주몽제(朱蒙帝)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려 섬기기를 원한다고 했다. 임금께서 매우 기뻐서 칭찬하시고 소서노를 책봉하여 어하라(於瑕羅)라는 칭호를 내리셨다. 어하라 재위 13년 임인(단기 2315, BCE 19)년에 이르러 소서노가 세상을 타나고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패대~패수와 대수지역으로 하북성 난하 부근 일대이다.
*어하라~백제 건국 과도기에 고주몽 성제가 책봉한 왕의 명칭. 백제는 고구려의 제후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그 뒤에도 백제왕을 어하라라 불렀는 데, 이것은 고구려가 백제를 제후국으로 거느린 황제국가임을 내외로 과시한 것이다. '주서 백제전'에 "백제왕의 성씨는 부여씨이고, 왕호는 어라하인데,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 불렀다".라고 하여 본서와 어하라와 기록상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백제왕을 부르는 칭호이다.
*백제의 시조가 소서노, 비류, 온조라는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남위례성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백제라고 칭한 왕은 온조이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613
#이맥의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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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백제의 건국(22-3)
이때 마려(馬黎) 등이 온조(溫祚)에게 이르기를 "신이 듣기로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다 하니 가서 도읍을 세울 때라 생각하옵니다"하니, 온조가 '좋다'라고 하셨다. 이 때 배를 만들어 미추홀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다녀보았으나 텅 비어 사람이 없었다. 오랜 뒤에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그때 마려(馬黎), 오간(烏干) 등 신하 열명이 간하였다. "오직 이곳 하남(河南)땅은 북으로 한수(漢水)을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자리잡고,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열리고, 서쪽으로 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음니다. 이처럼 천연적으로 험준한 지형과 지리적인 이로움은 얻기가 쉽지 않은 형세이오니, 마땅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임니다. 다른 곳을 더 찾지 마옵소서".
온조가 신하 열 명의 의견을 좇아 드디어 하남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百濟)라고 하였다. 백 사람이 건너왔기 그렇게 부른 것이다. 뒤에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하와 백성이 그 땅을 바치며 복종했다.
*지명 관계 앞에 것은 현 학계, 뒤에 것은 대륙에서 보는 입장(김진경지음, 백제 900년의 비밀, 관미와 고평, 2015)
*미추홀(지금의 인천, 현 산동성 연성시로 추정)
*한수(한강을 말함, 현황하)
*한산 부아악(지금의 서울 북한산, 현 산동성 태산)
*하남위지성(송파구의 풍납토성, 산동성 제남시 추정)
*'삼국사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서기전 6년)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입하면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에는 요사스런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말하였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으로 백성을 이주시켰다. 또 8월에 마한에 사신을 보내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장하였는 데, 북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또 9월에 성과 대궐을 수축하였으며, 그 다음해(서기전 5년)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또 2월에 왕이 부락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하였다. 또 가을 7월에 한수 서북방에 성을 쌓았다. 그곳에 한성(漢城) 주민을 나누었다.
상기 기록에 따르면, 낙랑.말갈.한수.한산.마한.패하.웅천.주양 등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상기 김진경 책, pp76~77)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613~615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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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기원과 박혁거세의 혈통
사로(斯盧)의 첫 임금(박혁거세)는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북부여 5세 고두막한)의 딸 파소(婆蘇)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㜛水)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의 나을촌(박혁거세가 나타난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소벌도리(蘇伐都利)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여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고 거세간(居世干)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辰漢)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사로~신라의 옛 이름, 사로의 시왕은 신라시조 혁거세다.
*선도산~중국에 선도산이 있다.
경주 서북쪽에 위치한 선도산이 있다. 경주 시내에 한 눈에 내려보이는 곳에 지금도 선도 성모 유적지와 함께 성모 위패를 모신 성모사가 있다.
.*성모~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박혁거세의 어머니, 신라가 부여에서 나왔다.
*눈수(嫩水)~만주의 흑룡강성 눈강
*나을촌~'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고허촌장 장소벌공이 양산 기슭의 나정 옆 숲 사이를 바로 말이 무릎을 끓고서 울고 있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때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있는 나정 옆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내리 비치고 꿇어 앉아 절을 하는 형상을 한 백마 한마리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소벌도리~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양아버지, 일명 소벌공, 사령부 최씨의 시조다.
삼국사기와 경주 최씨 족보에는 사령부 최씨 시조로, 삼국유사에는 사령부 정씨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소벌도리는 진한6부 중 하나인 돌산 고허촌의 촌장이다.
*거세간~신라초기의 왕호, 박혁거세를 거세간이라고 불렀다. 임금, 귀인이라는 뜻이다. 박혁거세 이후에는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으로 변해갔다. 22세 지증왕 때부터 중국식 왕을 칭하게 되었다.
*재야사학자 황순종님의 견해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혁거세 거서간'조를 보면, 일찍이 조선의 유민들이 와서 산곡 간에 흩어져 6촌을 이루었다... 이것이 진한의 6부이다. 진한 6부가 신라의 모체라고 하였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었는 데, 마한의 '백제'조에서 본대로 하북.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있으므로, 마한의 동쪽에 일어난 신라도 대륙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시조혁거세거서간'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38년 봄 2월....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낙랑.왜인에 이르기까지 혁거세 거서간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는 데...
'후한서 동이열전' 한 조에는 마한 주변에 관하여 "북쪽은 낙랑과 접하고 남쪽은 왜와 접한다고 하였으므로, 마한 동쪽에 있는 진한 역시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한 것을 알 수 있다.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 고대사, 지식산업사, 2012, pp347~348)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617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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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와 고구려 관계(24-1)
•큐슈.대마도는 본래 삼한이 다스리는 땅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으며,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國尾城)이라 했다. 동쪽과 서쪽 각 언덕에 마을이 있어 혹은 조공을 바치고 혹은 배반하였다.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 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르키는 이름이 되었다.
옛날부터 큐슈(仇州)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곳은 아니다.
임나가 또 나누어 삼가라(좌호가라, 인위가라, 계지가라)가 되었는 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삼가라의 왕)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佐護加羅)가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仁位加羅)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雞知加羅)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허구의 '임나일본부설'
임나(任那)는 지금의 대마도이다. 본래 대마도 서쪽 경계에 있었던 의부가라(意富加螺)의 개호(改號)로, 후에 대마도 전체를 가르키는 명칭이 되었다. 그 뒤 광개토열제가 고대 일본을 정복하여 임나(대마도)와 일기도(一岐島), 큐슈(九州) 전체를 10개국 연방체제(임나연방)로 만들어 다스렸고, 기내(畿來) 지방에 위치한 야마토(大和) 왜(倭)를 속국으로 지배하였다.
임나는 일제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주장하는 반도 남부에 있는 가야 지방이 결코 아니다.
일본의 일본서기에도 "임나는 츠쿠시국(지금의 큐슈 후쿠오카현)에서 2천여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고, 계림(경주)의 서남쪽에 있다. 지금의 대마도다. 일찍이 식민학자들은 임나가 한반도 남단에 위치했다고 억지 생떼를 쓰고 고대 일본이 이 임나(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백제.신라를 지배했다는 허구에 찬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여 한반도 강점은 침략이 아니라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라 함으로써 한반도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역사적으로 합리화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을 변조하고, 칠지도의 제작 연대를 깍아내리고, 비문의 신묘년(391) 기사 연대와 맞추기 위해 자신들의 역사교과서인 일본서기 마져 뜯어고쳐 고대사의 편년을 120년 끌어 내리는 등 식민학자들이 획책한 끈질긴 음모는 오르지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경영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을 역사적인 사실로 조작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한국을 영원히 침략, 지배하려는 정한론의 근거이자 명분이 되기도 했다.
*대마도는 배달.단군조선 이래 본래의 우리 땅이다. '세종실록' 세종 1년 7월17일 기사에는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 계림에 예속되어 있고, 본디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에 실려 있으니 분명이 상고할 수 있다"라 하였다. 대마도 뿐만 아니라 큐슈(九州)도 고대에 우리의 조상들이 끊임없이 건너가 개척한 문화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한.일 고대 사서와 고고학의 유적.유물에서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 2012, p617
#한자 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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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와 고구려의 관계(24-2)
•고구려 식민지, 왜의 전 영역
영락(永樂, 광개토열제) 10년(단기 2733)에 삼가라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 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聯政)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열제(광개토)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아유타국은 어디인가?
아유타(阿踰佗)는 삼국유사에서 서역(西域, 인도)이라 하였으나, 이제 모든 고기(古記)를 살펴보면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暹羅, 태국)이다. 그렇다면 인도의 아유타인이 혹시 대식국(大㵓國)의 침입을 받고 쫓겨나서 이곳(태국)에 이르러 살게 되었던 것일까? 이명(李茗)의 진역유기(震域留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적에 백제 상인들이 바다로 아유타에 가서 재물과 보화를 많이 싣고 돌아 올 때, 그곳 사람도 백제 사람을 따라 왕래하여 날로 교류가 친밀해졌다. 그러나 그 풍속이 겁이 많고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서 남의 제재를 많이 받았다.
*아유타~본서 태백일사에서는 섬라, 지금의 태국이라 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서역, 즉 인도라 기록하였는 데, 1989년에 KBS 방송팀이 가야 시조 김수로왕 왕비인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왔던 길을 추적하여 현지 답사한 결과, 아유타는 인도 갠지즈 강변에 위치한 야요디야로 밝혀졌다(KBS 1TV 방영, 1989, 11, 23)
*섬라~명사(明史)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명사 외국열전'에 섬라 조가 수록되어 있다. 원음은 시암(Siam)이다. 1939년에 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다. 우리나라 와는 이미 1393(조선 태조2년)에 섬라 장사도(張思道) 등이 와서 공물을 바쳤으나 연산군 이후에는 왕래가 없었다.
*대식국~대식국은 중동에 있었던 사라센 제국을 말한다.
고려 현종 때 송나라 상인들과 함께 고려에 여러차례 조공을 받치고 무역을 하였다.
*백제의 해상교역~백제는 섬라(태국), 부남국(캄보디아), 인도와 교류했고, 북큐슈~오끼나와(유구국)~대만~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루트를 가지고 있었다. 필리핀 군도는 흑치국(黑齒國)으로 일컬었던 곳이다. 이곳은 백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백제 출신 장군 흑치상치(630~689) 묘지명이 말해준다. 1929년 중국 낙양시 북망산에서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그 선조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인하여 씨로 삼았다"라고 적혀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619
#한자 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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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와 유불선의 집대성 : 다물흥방가(24-3)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평양에 을밀대(乙密臺, 평양 금수산 마루에 있는 臺)가 있는 데, 세상에 전하기를 을밀선인(乙密仙人, 고구려 22세 안장열제 때의 조의, 2세 유리명열제 때의 대신인 을소의 후손)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을밀은 안장제(安藏帝, 519~531)때의 조의선인으로 뽑여 나라의 공을 세웠는 데, 본래 을소(乙素)의 후손이다. 을밀은 집에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고 삼신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무리를 받아들여 수련시키고, 정의와 용기로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에 이름난 조의(皂衣)가 되었고, 따르는 무리가 3천이었다.
가는 곳마다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다물흥방가'를 불렀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몸을 던져 의를 다하는 기풍을 고취하였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먼저가신 선령님은 우리삶의 법이시고
뒤에오는 후손들은 조상님을 잘 받드네
선령님을 본받음은 그정신이 불생불멸
후손들 선령위함 귀천이 어디있나
사람은 천지중심 대천지와 하나되니
마음은 몸과 함께 온우주의 근본일세
사람이 태일됨에 차고비나 같은 경계
우주의 근본이라 신과만물 둘아니네
참될진은 온갖선의 극치의 이름일세
삼신님은 일심중도 만사만물 주장하네
참과선의 극치에서 세가지참 귀일하고
삼신님이 일심에서 삼신일체 창조할세
하늘아래 온땅에서 오직내가 있음이여
옛땅옛혼 다물하니 나라를 부흥하네
스스로 생존함에 함이없이 일을하고
나라를 부흥함에 말이없이 가르치네
참목숨이 크게생함 성통광명 이유라네
들어와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충성하라
광명하여 모든선을 다받들여 행하옵고
효도충성 다함으로 일체악행 짓지말라
만백성의 정의로움 나라위한 중한마음
나라가 없다면 내가어찌 살아가리
백성에게 만물있어 우리나라 복이되고
이나라에 혼이있어 우리백성 덕이되네
우리혼은 삼혼이니 생함과 깨달음과
신령함이 예있구나 삶과지혁 닦아보세
조화신이 머무르는 천궁이여 이내몸이여
몸과영혼 함께닦아 영혼불멸 얻으리라
우리들 자자손손 나라 잘 다스리고
대광명의 신교배움 영원한 스승일세
우리자손 통일되면 모두 잘 살으리
우리스승 가르침은 새롭고도 새로워라
을밀선인이 일찍이 을밀대에 거주하며 오직 하늘에 천제 올리고 수련하는 것을 직분으로 여겼다. 대개 신선의 수련법은 참전으로 계율을 삼고 그 이름을 더욱 굳세게 지켜 서로 영광되게 하고, 나의 마음을 비워 만물을 살리고 몸을 단져 정으로움을 온전하게 하였다. 이로써 나라 사람들에게 사표가 되었으니, 천추만세에 추앙을 받아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인존(人尊)의 상징이 되었다. 후세 사람이 그 대(臺)를 을밀대라 불렀으니, 금수강산의 한 명승이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619~623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
★해양제국을 건설한 백제!
*장보고 보다 수 백년 앞서 백제가 거대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사해를 평정한 사실이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수록되었다. '백가제해백제'(百價濟海百濟)라는 기록에서 보여주듯이 백제는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해양제국이다.
*백제는 요서지역은 물론 중국 동부 해안 지역에 진출한 사실이 "송서.남제서.양서.남사.북제서.통전.문헌통고" 등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246)조에는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삭방태수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 데 백제왕은 낙랑이 비어있는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파견하여 낙랑의 변경을 습격하고 주민을 빼앗었다"라고 하였다. 분서왕 7년(304)조에동 "몰래 군사를 보내어 낙랑군의 서부 현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동성왕(478~501) 때에 이르러 북경지역과 산동성, 양자강 이남까지, 중국 동부지역과 황해 바다 전체를 평정한 대제국이다.
*백제는 동으로 일본을 위성국으로 삼아 지배했다. 일본 나라현 텐리(天里)시 이소노가미 신궁에는 백제왕(18세 진지왕)이 왜국의 진구신공 왕후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가 봉안되었는 데, 일본서기에는 백제왕이 칠자경(七子鏡) 등과 함께 바친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칠지도와 칠자경은 각각 세계수(世界樹)와 태양을 뜻하는 왕권의 상징물이다. 당시 백제는 중국이나 고구려와 별도로 자신들은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5세기 중반에 백제에는 대왕을 축으로 하여, 그 좌우에는 고조선과 북방유목 국가처럼 좌현왕과 우현왕이 있었다. 이 제도는 삼신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송서 이만열전' 백제국 전에는 여기(餘紀)를 우현왕으로, 여곤(餘昆)을 좌현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송서 이만전'에 좌현왕은 동방인 일본 열도를, 우현왕은 그 서방인 중국 대륙의 일정 지역을 관장하였다. 중국 대륙과 일본열도에는 백제라는 지명이 무수히 남아있다. '북제서 후주기'에는 571년 "백제 왕 여창(餘昌, 27세 위덕왕)을 사지절(使持節, 황제의 신임을 표시하는 부절을 가졌다는 뜻) 도독(都督, 군사책임자) 동청주 자사(刺史, 행정책임자)로 삼았다"라고 하여 산동반도가 백제의 소유였음을 들어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남제서, 자치통감'에는 백제와 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백제 동성왕 때인 488년과 490년에, 후위(後魏)의 기병 수 십만이 백제가 통치하는 대륙의 영토를 침략했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수훈을 세운 백제장수들이 광양태수.대방태수.광릉태수.청하태수.낙랑태수.성양태수.조선태수 등을 제수 받았다(남제서 백제전)고 하였다. 백제는 단군조선과 북부여 이후 340년이 넘는 오랫 기간을 중국 동부해안을 지배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