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 4년(28세 보장제, 단기 2978, 645)년에 당나라 왕 이세민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우리 중국 땅이다.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그곳을 얻지 못하였다. 내가 출병하여 우리 자제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노라"
이에 세민이 친히 활과 화살을 메고 이세적, 정명진 등 수 십만을 거느리고 요택에 이르렀다. 진창이 200여리나 되어 인마(人馬)가 통과 할 수가 없었다.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채찍으로 말을 치며 돌진하여 맞붙어 싸웠고, 행군총관 장군차(張君叉)가 대패하니 이도종(李道宗)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다.
세민이 스스로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세적과 합세하여 백암성(白岩城) 서남쪽을 공격하였다.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거짓으로 사람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으나 실은 빈틈을 타서 반격하려는 것이었다.
*이세민~당태종(재위 626~649) 아버지 이연(당 고조)을 도와 당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치세를 '정관의 치'라하여 칭송하였다. 친히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안시성 싸움에서 패하고 돌아갔다. 이세민은 안시성 싸움에서 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왼쪽 눈에 병독이 악화되어 4년 뒤에 사망했다. 당태종은 재위 시에 한민족의 고대사 왜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백제의 찬란한 역사를 깍아버리고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진서, 양서, 수서, 북사 등을 왜곡하였다.
*요동~요동은 지금의 요하 동쪽이 아니라 하북성 난하 동쪽을 말한다.
고구려 당시 요수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난하다.
낙랑.현도.대방도 옛날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 땅인 난하유역 일대에 있었다.
*이세적~당나라 장수, 당고조의 신임을 얻어 영주총관이 되었고, 이씨성을 하사 받았다. 이정과 함께 무장의 쌍벽이었다.
*요택(遼澤)~당태종이 고구려 군에게 쫓겨 사경을 헤메었다는 진흙탕의 길로 황하의 북쪽 지류 왼쪽지역으로 지금의 화북성 천진일대
*백암성~갈석산 밑에 있는 데, 당나라 때 암주(岩州)라 하였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93
#한자 원문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
★당태종 이세민의 대침략(17-2)
•안시성 전투
이세민이 안시성에 이르러 당산(唐山)으로 부터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북부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관병과 말갈 군사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에 도착하여, 주저없이 바로 나아가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堡壘, 작은성)를 쌓고 높은 산의 험준한 곳을 차지하였다. 성중의 곡식을 먹으면서 군사를 풀어 당나라 군마를 빼앗았다. 당나라 군사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돌아가려 해도 진창에 가로막혀 그냥 주저앉아 괴로워하며 패할 수 밖에 없었다.
연수가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전진하여 안시성과 4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어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에게 대책을 물었다. 이는 고정의가 연륜이 깊어 일처리가 능숙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대답했다.
"세민이 안으로 군웅(群雄)을 제거하고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오. 지금 모든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그 예봉(銳鋒, 창이나 칼 따위의 날카로운 끝, 날카롭게 공격하는 자세)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되오.
우리 계책은 병력을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 여러 날을 끌면서 기습부대를 나누어 보내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소. 양식이 다 떨어지면 싸울래야 싸울 수가 없고 돌아가려해도 길이 없으니, 반드시 이길 것이요."
연수가 그 계책을 좇아 적이 오면 막고, 물러가면 움직이지 않았다. 또 기습 부대를 보내어 군량을 불태우고 빼앗았다.
세민이 온 갖 계략으로 뇌물까지 쓰며 꾀었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고 속으로 거부하여 자주 군사를 내어 습격하고 함락시켜 흩어지게 하니 적군의 사상자가 많았다.
*욕살~고구려는 지방을 5부로 나누어 다스렸는 데, 지방 장관을 욕살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고혜진.고연수 군대가 패했다고 한 데 반하여, 본서에서는 승리한 것으로 기록했다.
*보루~고구려는 치(雉)를 설치하는 옹성(壅城)축성법으로 성을 쌓았다. 치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과 양쪽 측면에서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한 시설이다. 옹성은 적군의 공격에 직접 들어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문 바깥에 더 붙여 쌓아 만든, 면적이 크지 않은 방어용 성벽을 말한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93~595
#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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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출병으로 천추의 한을 남긴 당태종(17-3)
연수 등이 말갈병과 더불어 함께 진을 치고 지구전을 펴다가, 어느날밤 돌변하여 번개같이 습격하니, 거의 포위를 당하게 된 세민이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세민이 다시 사자를 보내 재화와 보화로 달래며 연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귀국의 힘 있는 신하(연개소문)가 임금을 시해하였기로 이렇게 와서 죄를 묻는 것이다. 이제 귀국에 돌아와 전쟁을 하는 데 말 먹힐 꼴과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 몇 곳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했을 뿐이다. 귀국이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린다면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이에 연수는 말하였다. "좋다. 그대들 군사가 30리를 물러난다면 내가 장차 우리 황제(보장제)를 만나 뵈리라. 그러나 막리지는 우리나라의 주석(柱石)이고, 군법이 있으니 여러 말이 필요없다. 너희 임금 세민은 아버지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음란하게도 아우의 아내를 취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을 만하다. 이것을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찰관을 보내어 수비에 더욱 힘쓰게 하고, 산을 의지해 스스로 견고히 하고 적의 허심을 틈타 기습하였다.
세민이 온갖 꾀를 다 내어 보아도 아무 방법이 없었다. 요동으로 출병하여 전쟁에서 진 것을 몹시 한탄하였으나,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당나라 건국 초기에 왕실에서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당을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 건성과 아우 원길을 죽이고, 아버지 이연(고조)을 몰아내고 왕위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등극(2세 태종)하였다. 그리고 아우 원길의 아내 양씨(楊氏)를 취하였다. 후에 문덕황후가 죽자 태종이 양씨를 황후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단념하였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95~596
#한자 원문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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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사필의 역사왜곡: 위국휘치(爲國諱恥)(17~4)
류공권(柳公權, 고류중기의 명신, 자는 정평, 시호는 문간)의 소설에, "당나라의 6군(六軍)은 고구려가 세를 타게 되자 장수들이 전공을 떨치지 못하였고, 척후병이 와서 영공(英公, 이세적)의 흑기(흑색 깃발은 고구려의 군대 깃발)에 포위 당했다고 보고하니, 세민이 크게 두려워하였다"라고 쓰여있다. 이세민이 비록 끝내 탈출하였으나 위태롭고 두려워함이 이러하였던 것이다.
'신.구당서와 사마광의 통감'에 이러한 사실을 적지 않은 것은, 어찌 자기 나라를 위해 수치스런 일을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세적이 세민에게 말하기를
"건안(建安, 안시성 남쪽 70리에 위치, 지금의 하북성 당산의 남쪽 경계)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음니다. 지금 안시를 넘어 건안을 치다가 만약에 고구려가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끊는다면 대세가 반드시 궁하게 될 것이니,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못 할 것임니다. 안시가 함락되면 북을 두드리며 여유있게 가서 건안을 빼앗으면 될 것이 옴니다"라고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멀리서 세민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성에 올라 북을 치고 고함을 질렀다. 침을 뱉으며 세민을 욕하고 죄목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군중에게 고하니 세민이 노기가 극도로 달하여, 성이 함락되는 날에는 남녀 모두 생매장 시킬 것이라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건히 지키므로 공격을 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 때에 수군제독 장랑(張湸, 당나라 때 영양 사람, 형부상서를 지냄)의 군사는 사비성(沙卑城, 지금의 요동반도 끝, 대련만 북안)에 있었는 데 그들을 부르려다 시행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기회를 잃고 말았다. 장량은 병력을 이동시켜 오골성(烏骨城, 지금의 요령성 봉성현으로 비정)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관병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도종(李道宗) 역시 험준한 길을 만나 군세를 떨치지 못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당나라 여러 장수의 의견이 서로 갈라졌다. 세적은 홀로 "고구려는 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 안시성을 구하려 하니, 안시를 버리고 곧장 평양을 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장손무기(長孫無忌, 낙양사람으로 당태종을 보필) 이렇게 생각했다. "천자가 친히 정벌에 나섬은 장수들과는 달리 위험을 무릎쓰고 요행을 바라서는 안된다. 지금 건안.신성에 있는 적군의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거느린 말갈 군사가 또한 수십만이다.
만약 국내성 군사가 오골성을 돌아서 낙랑(지금의 하북성 동북 지역)의 모든 길의 험한 곳을 차단한다면, 적어 기세가 날로 강하져서 우리를 포위하고 압박하여 급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적을 갖고 놀려고 하다가는 뉘우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 다음에 멀리 적을 몰아 쫓으며 진격하는 것이 만전의 계책이다".
이 문제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는 데, 안시성주 양만춘이 그 사정을 듣고 야밤을 틈타 수백 명의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공격하였다. 적진에서는 서로 짓밟혀 죽고 상처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세민이 이도종을 시켜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쌓게 하였는 데, 우리 군사가 성 한 귀퉁이가 무너진 곳으로 나와 쳐서 토산을 빼앗았다. 거기에 참호를 만들어 지키니 군세를 더욱 떨쳤다. 이리하여 당나라 모든 진영은 싸울 생각은 거의 잃어버렸다. 부복애(傅伏愛)는 패전 책임으로 참수를 당하고, 이도종과 그 부하들은 모두 맨발로 나아가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기다렸다.
*흑색 깃발은 고구려, 붉은 깃발은 당군
*신.구당서~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책, 후진 때 유향.장소원이 구당서 200권 완성, 송나라 구양수 등이 개수하여 신당서를 지었다.
*통감~송나라 사마광이 쓴 편년체 역사책으로 자치통감 주나라 위열왕부터 후주의 세종에 이르기까지 1,362년 간의 기록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97~601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조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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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만춘의 대승(17-5)
막리지(연개소문)가 기마병 수백을 거느리고 순시하다가 난하 언덕에서 멈추고 전황을 자세히 물은 뒤에, 사방에서 총공격하라고 명하셨다. 연수 등이 말갈 군사와 함께 양쪽에서 협공하고, 양만춘이 성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니 사기가 높아져서, 하나가 백을 당하는 용맹을 보이지 않는자가 없었다.
세민이 스스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감히 나서서 결판을 내려하였다. 이 때 양만춘이 소리를 지르며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세민이 진을 나서다가, 공중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에 적중되어 왼쪽 눈이 빠져 버렸다.
세민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 달아나며, 세적과 도중에게 명하여 기병.수병 수 만명을 거느리고 후군으로 따르게 하였다.
요택에 이르자 진창 때문에 군마의 행군이 어려워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서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세민 자신도 스스로 말채찍으로 땔나무를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포오거(蒲吾渠, 하북성 평산현 서쪽)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널 때에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 군사들을 적시니 죽는자가 많았다. 이에 길에 불을 피우게 하고 기다렸다.
*당태종 죽음의 원인
당태종은 안시성 싸움에서 양만춘의 화살에 맞은 왼쪽 눈의 상처 때문에 죽었다. 이 사건을 중국 사가들은 한결같이 감추고,
'삼국사기.동국통감' 등 우리나라 사서에도 없다. 그러나 목은 이색의 '정관음'이나 노가재 김창흡의 '천산시'에서 사실 그대로 노래했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에서는 당태종의 사망 원인을 내종.학질.이질 등으로 모두 다르게 기록하였다. 자기 나라의 수치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 사건이 마치 "송 태종이 태원에서 화살에 맞아 상처 때문에 죽은 것을 사실에서 감춘 것과 같다"고 하였다. 묵은 이색은 정관음(貞觀吟, 정관은 당태종의 연호) 일부를 인용하면. 고구려 쯤이야 호주머니 속에 물건일 뿐이라 하더니 어찌하오리오. 검은 꽃(눈)이 흰 깃(화살)에 맞아 떨어질 줄을!
★연개소문의 장안 입성과 환단이래 실지회복(17-6)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이 싸움에 이긴 김에 계속해서 휘몰아쳐서 급히 이들을 뒤쫒았다. 추정국(趨定國)은 적봉(赤峰)에서 하간현(河間縣)에 이르고, 양만춘은 신성(新城)을 향하여 군세를 크게 떨쳤다. 많은 당나라 군사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 바야흐르 역수(易水, 하북성 역현 경계로 흐름)를 건너려 하였다.
이때 막리지가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槦道城, 고구려 진,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에 있다.
현재 북경시 순의현에 고려영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을 개축하게 하였는 데, 용도성은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전군을 나누어 보냐되, 일부 군인은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그곳은 지금의 창려(昌黎, 지금의 하북성 난하의 동부연안, 고구려의 요동성이 있었다)이고, 일부 군인은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부는 상곡(上谷, 지금의 하북성 회래현)를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大同府)이다.
이에 세민이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받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막리지가 정국, 만춘 등의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을 치고 나팔 부는군악대를 앞세우고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민과 더불어 약정하여 산서성.하북성.산동성.강좌(강소성 등 양자강 하류 북쪽)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일찍이 당의 관리로 있던 고운 최치원은 상관에게 올리는 글에서 단군 이후 다시 중원 대륙의 옛 땅을 회복하여(多勿)하여 고구려.백제의 위용을 사실 그대로 직필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601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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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본토까지 뻗었던 백제, 신라의 영토(18-1)
이에 앞서 고구려는 백제와 밖에서 서로 경쟁하여 공존하였다.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 데. 곧 요서(遙西, 지금의 하북성 난하, 당시의 요수), 진평(晉平,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이고 강남에는 월주(지금의 강소성 소흥현)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山陰, 지금의 회계현), 둘째 산월(山越), 셋째 좌월(左越)이다.
21세 문자제 명치 11년(단기 2834, 501)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쳐서 취하고 군현 이름을 바꾸어 송강(松江, 지금의 상해), 회계(會稽,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 오성(吳城), 좌월(左越), 산월(山鉞), 천추(泉州, 지금의 복건성 북주 서남쪽)라 하였다. 명치 12년(단기 2835, 502)에 신라 백성을 천추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군대를 보내어 요서.진평 등의 군을 빼앗으니 백제군이 없어지고 말았다.
*진평~진평군은 중국역사지명사전에 의하면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 진안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천여리 되는 곳에 있었는 데, 후에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가 다스리던 지역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한다. 남중국 광서 장족자치구 옹량현으로 홍콩 서쪽에서 수백키로 떨어진 곳에 백제향이라는 지명이 있다. 현지 주민들은 서낭당, 솟대, 강강술래와 비슷한 춤, 김치, 전남지역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맷돌, 정월 보름과 단오절 축제, 능숙한 궁술 등 한민족 문화의 기풍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 368~369), KBS 취재팀이 답사한 광서 장족자치구 동북 경계에 후백제의 수도 이름과 같은 전주(全州)라는 도시, 금산사, 한벽루, 기린봉 등이 있었다.
★연개소문에 대한 왕개보의 인물평(18-2)
왕개보(王介甫, 당송팔대가 한사람, 송나라 때 문필가, 정치가인 왕안석(王安石)을 말한다) "연개소문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하더니 과연 그렇다. 막리지(연개소문)가 살아 있을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건재하였으나, 막리지가 세상을 뜨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망하였으니, 막리지는 역시 건출한 인물이로다."
막리지가 임종에 남생(男生), 남건(男建, 둘째 아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형제는 사랑하기를 물과 같이 하여라. 화살을 한 데 묶으면 강하고 나누면 꺽어지나니, 부디 이 유언을 잊지 말고 천하 이웃 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여라"
때는 개화 16년(28세 보장제, 단기 2999, 657) 10월 7일이었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603~605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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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과 요서의 고구려 영토(19)
고려진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쯤에 있다. 안시성은하북성 개평부 동북 70리에 있는 데, 지금의 탕지보(湯池堡)이다. 고려성은 하간현(下間縣) 서북쪽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 무열제(6세, 단기 2386~단기 2479)께서 쌓으신 것이다.
*용도성~고려진으로 곧 '고구려 진(鎭)'을 뜻한다. 북경의 안정문 60리에 있었다. 현재의 북경시 순의현 고려영이라는 지명이 뚜렷이 남아있고, 성곽과 해자가 있다. '북경 순의현지'에 "당나라 때 고구려인이 이주해 왔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KBS 1TV 역사스페셜, 연개소문은 독재인가 영웅인가?) 당시 고구려 영토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요하선을 훨씬 넘는 북경 일대를 포함하였다는 사실이다.
*안시성~하북성 개평부 동북 70리,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이른바 옛 안시성은 개평현 동북 70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개평현은 바로 요동반도에 있는 개평으로 아는 것은 잘 못이다. 지금 하북성 개평부 동북쪽 70리쯤 가면 천령으로 불리는 언저리에 탕지보가 있는 데,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안시성이다. 안시성은 안촌홀.변한성이라 하나인 데, 단군조선 시대 삼한의 하나인 번한의 수도로 '신지비사'에 나오는 오덕지(五德地)이다. 안시성 남쪽으로는 당산 준봉이 있고, 서쪽으로는 어양, 북평. 보정 등지가 넘겨다보이고, 동북쪽으로는 산해관 평원이 환히 바라보이고, 북으로는 만리장성이 희미하게 보인다(이유립, 대배달민족사, 천, 535~536)
*이방인이 노래한 고려성의 옛 추억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이 고려성 회고시
(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에서 번한의 고려성 회고시 인용)
외진 땅의 성 문은 열리고
구름 숲 속 성 위에 담장은 길게 이어졌네.
물은 맑아 저녁 노을 반짝이고
어둠 깃든 모래 땅엔 별빛이 비치네.
북소리 둥둥 울리니 구름도 따라 일고
새로 핀 고운 꽃은 흙을 털고 단장했네.
슬그머니 하루 아침에 저자거리로 바뀌어
피리.나팔 소리 다시 들을 길 없어라.
누런 흙먼지 속 무성한 가시나무,
엿 길 가에는 쑥대만 우거져 있네.
무상한 세월의 띠끌 아름답던 비취 묻어 버렸고
거친 언덕엔 소와 양이 오르는구나.
화려하던 옛 시절 이미 사라졌는 데
깊어 가는 가을 소리에 기러기만 날아가누나
내가 비록 글재주는 없으나 그 운(韻)을 따라 한 수를 읊는다.
요서(遙西)에 옛 성터 아직 남아 있으니
생각컨대 명성 높은 나라의 운수 틀림없이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에 전쟁도 많았지만
요하의 도도한 물결은 하늘빛 갔네.
바람 불어 나무는 빈 골짜기에서 춤추고
학은 자태를 꾸미며 높은 나무에서 우는구나.
변방 지키던 방패와 깃발 하루저녁에 바뀌어
값을 외치는 장사꾼 방울소리 처량하게 들리네.
연(燕, 하북.산서)과 양(凉, 감숙)은 본래 우리 땅이니
관병이 오래도록 지키며 말 먹이던 곳이라.
영웅은 다시 오지 않고 지난 일은 아득하니
양떼 내몰 듯 도독떼 몰아낼 날 다시 없을런가.
이제 와 옛일 한없이 슬퍼하는 이 내 마음
만 리 길 떠나는 핵랑(核郞)의 노자(路資)로나 쓰시게.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사(2012), pp607~608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
★요서 지방에 10성을 쌓음(20)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 융무 3년(6세 태조 무열제, 단기2388년, 55)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침략을 대비하셨다. 그 10성은 이러하다.
첫째는 안시성(安市城)이다. 하북성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둘째로 석성(石城)이니, 건안성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셋째는 건안성(建安城)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넷째로 건흥성(建興城)이니, 난하의 서쪽에 있고,
다섯째는 요동성(遙東城)이니,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여섯째는 풍성(風城)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져 있고,
일곱째는 한성(韓城)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여덟째는 옥전보(玉田堡)이니, 옛날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고구려는 그 이전 모본제 2년에 이미 우북평, 상곡, 태원까지 점령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조'에 우북평은 북경 동북에 있는 하북성 풍윤현, 어양은 북경 동북쪽 밀운현이고, 상곡은 북경 서북쪽 회래현, 태원은 지금의 산서성 태원이다. 고구려초기에는 한나라 수도 낙양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삼한비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구지(舊志)'에 말하기를, 요서로 창료현(昌遼縣)이 있는 데, 당나라 때 요주(遙州)로 고쳤다. 그 곳 남쪽에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그 아래가 곧 백암성이다.
당나라 때 암주(岩州)라 부른 곳이 이곳이다.
건안성은 당산(唐山) 경계안에 있고, 그 서남은 개평(開平)인 데, 일명 개평(蓋平)이라 하였으나, 당나라 때 개주(蓋州)는 이곳이다.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현도군은 유성(柳城)과 노령(盧龍)사이에 있다. '한서'에 "마수산(馬首山)이 유성 서남에 있는 데, 당나라 때에 여기에 토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유성과 노룡~유성은 지금의 요령성 조양(朝陽)에 있고, 노룡은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盧龍縣)이다. 따라서 현도군은 지금의 하북성 난하 동쪽 대능하 상류 일대이다.
이 지역이 단군조선 제후국인 고죽국(孤竹國)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609~611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
★고구려의 개국 공신 연타발(21)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 갈사(曷思)를 오가며 이재(理財)를 잘하여 부자가 되어 엄청난 돈을 모았는 데 남 몰래 주몽을 도와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도읍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물고기와 소금을 사고 팔아 이익을 얻었다. 고주몽 성세가 북옥저를 칠 때 양곡 5천 석을 바쳤다.
눌견(訥見)으로 도움을 옮길 때 연타발이 먼저 양곡을 지원하여 바치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모아 어루만져 위로하며 임금의 일을 부지런히 도왔다. 그 공덕으로 좌원(坐原)에 봉토를 얻었다. 여든살에 세상을 떠나니, 때는 평락 13년(단기 2309, BCE 25)병신년 봄 3월이었다.
*연타발~고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한 개국 공신, '삼국사기'에서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과부로 고주몽의 왕비가 된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신화에는, 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로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서손이며, 어머니는 졸본사람으로 연타발의 딸이다. 연타발의 딸은 처음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고,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이후 부여에서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정착하고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혼인하였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마련하고 창업을 할 때 커다란 내조를 하였고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극진이 대우하였다. 그러나 부여에 있을 때 혼인한 예씨의 아들 유류(儒留, 일명 유리)가 오자 유류를 태자로 삼아 뒤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온조에게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가며 도와 방업를 이루니 그 노고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쓸모없이 이곳에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국도를 세우는 것만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비류와 온조는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미추홀에 정착하였다.
*구려하~고구려하, 지금의 대요하를 말한다.
*북옥저~남옥저(요동반도)에서 동북 800리에 있다. 지금의 만주 서간도 일대이다.
*눌견~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 지금의 만주 장춘 북쪽 주성자(朱城子)이다.
*좌원~정인보는 남만주 관전현 성동산과 통화현 홍석납자의 중간에 있는 긴평원(정인보, 조선사연구, 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