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 20세 장수제, 단기 2746~2824, 413~491)는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치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영토를 개척하시어 웅진강(熊津江) 이북이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북연(北燕), 실위(室韋) 등 여러 나라가 다같이 입조하여 우리의 형제 족속에 편입되었다.
또 신라의 매금(寐錦, 신라국의 왕을 말함)과 백제의 어하라(於瑕羅)와 함께 남평양에 만나 곡물을 바치는 일과 국경에 주둔시킬 병사의 숫자를 약정하였다.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 단기 2824~2852, 491~519)는 연호를 명치(明治)로 고치셨다. 11년 (단기 2834, 501)에 제.노.오.월의 땅이 고구려에게 귀속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영토는 점점 넓어졌다.
평강상호태열제(平岡上好太烈帝, 25세 평원제, 단기 2892~2923, 539~590)는 담력이 크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시어 주몽의 기풍이 있었다. 연호를 대덕(大德)으로 바꾸었고, 정치와 교화가 매우 밝아졌다.
대덕 18년 병신(단기 2909, 576)년에 열제께서 대장 온달(溫達)을 거느리고 가서 갈석산과 배찰산을 치고, 추격하여 유림관(楡林關)에 이르러 북주(北周)를 크게 깨뜨리셨다. 이르러 유림진 동쪽 땅이 모두 평정되었다. 지금의 산서(山西) 경계다.
*웅진강~지금의 금강
*북연(407~436) 중국 5호 16국 중의 하나, 후연에서 벼슬하던 고구려 사람 고운이 광개토열제에게 대패한 후 연나라왕 모용희를 살해하고 북연을 세움
*실위~거란의 북쪽에 있던 몽골군의 한 갈래, 지금의 만주 대흥안령산맥과 흑룡강 중류 일대에 거주함. 고구려가 이 지역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함
*어하라~고주몽의 둘째 부인인 소서노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 패대 땅에 신왕국을 세운 뒤에 고주몽 성제에게 책봉 받은 왕의 칭호이다. 광개토비문에도 나와 있듯이 고구려는 백제.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주서 백제전'에도 백제 왕은 부여씨이고, 왕호는 어라하인데, 백성들은 건길지라 불렀다.
*온달~평원제 때의 장수,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주인공이다"
당시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을 치러오자, 왕 평원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의 들에서 맞아 싸웠다. 이 때 온달이 선봉이 되어 질풍같이 싸워서 적군 수 십명을 베니,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겼다.
*갈석산~만리장성 동쪽 기점으로 중국 하북성 창려현에 있다. '통전 주군전'에는 한나라 때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이병도는 수성현이 오늘날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하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얼마나 식민학자들이 거짓을 하고 있는지 통탄스럽다.
*배찰산~배산, 백분산이라고 하는 데, 음산산맥에 있으며 몽고의 차할부 경계에 있다. 배찰산은 열하성 경붕현 경계에 있다(중문대사전 권4),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내몽골자치구이다.
*문자호태열제~고구려 21세 황제, 최치원이 자신의 상관에게 올린 글에서 "고구려 백제가 그 전성시에는 강병이 백만이 있었고,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하고 북으로는 유.연.제.노를 뒤흔들었다"라고 하였다.
*북주~선비족의 한 갈래, 우문씨가 북위에서 갈라진 서위를 빼앗고 세운 나라, 후에 북주는 양견이 왕이 되어 나라를 수나라로 고침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75~576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
★선비족의 후손인 수양제의 침략을 격퇴(11)
영양무원호열제(嬰陽武元好太烈帝, 26세 영양제, 단기 2923~2951, 590~618) 때에 천하가 잘 다스려져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번성하였다.
수나라 왕 양광(楊廣, 수의 2세 왕)은 본래 선비족의 후손이다. 양광이 남북을 통합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 고구려를 깔보고, 조그마한 오랑캐가 거만하게도 상국을 업신여긴다 하여 자주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대비하고 있으므로 일찍이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양광~수의 2세왕 수문제의 아들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지나친 토목공사 등으로 국력을 소모하여 당에게 망하였다.
•수양제 피격사건
홍무 25(홍무는 영양 열제의 연호, 단기 2947, 614)년에 양광이 또 다시 동쪽으로 쳐들어 왔다. 먼저 군사를 보내 비사성(卑奢城, 만주 요동반도 끝에 있는 대련만 북안에 있던 고구려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적이 곧 평양을 습격하거늘, 열제(영양제)께서 소식을 들으시고 진격을 늦추기 위해 곡사정(斛斯政, 고구려로 망명온 수나라 사람)을 보내려 하셨다. 때마침 조의선인인 일인(一仁)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하므로 함께 진중에 도착하여 양광에게 표(表)을 올렸다. 양광이 배 안에서 표를 손에 들고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일인이 소매 속에서 작은 쇠뇌를 꺼내 가슴을 맞혔다. 양광이 놀라 쓰려져 정신을 잃었다.
우상 양명(羊皿)이 양광을 업게 하여 작은 배를 옮겨 타고 물러나서, 회원진(懷遠鎭, 하북성 북쪽에 있는 해상기지)으로 철병하기를 명령하였다.
양광이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작은 나라를 치다 졌으니, 이것이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하였다. 양명 등은 얼굴빛이 검게 변하여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인류 문명의 종주국을 노래한 찬가!!!
뒷 사람이 이 일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아아,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너희 한나라 아이들아!
요동을 향해 헛된 죽음의 노래를 부르지 말지라.
문무에 뛰어난 우리 선조 환웅이 계셨고 면면히 혈통 이은 자손, 영걸도 많으셨네
고주몽성제, 태조무열제, 광개토열제께서 사해에 위엄 떨치시어 공이 더할 나위 없네
유유.일인.양만춘은 저들이 얼굴빛 변하며 스스로 쓰러지게 하였네
세계에서 우리 문명이 가장 오래고 바깥 도적 쫓아 물리치며 평화를 지켜왔으니
저 유철(한무제).양광(수양제).이세민(당태종)은 풍채만 보고도 무너져 망아지 처럼 달아났구나.
광개토열제 공덕 새긴 비석 천 자나 되고 온 갓 깃발 한 색으로 태백산처럼 높이 나부끼누나.
*유유~11세 동천열째 때의 충신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77~579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
★신교를 대각한 을지문덕 장군의 큰 공적(12)
을지문덕은 고구려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성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고 신교의 진리를 크게 깨달았다. 해마다 3월16일(대영절)이 되면, 말을 달려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돌아왔다. 10월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 이러한 제천의식은 배달 신시의 옛 풍속이다.
*신교를 대각한 을지문덕~고구려의 을파소, 광개토열제, 연개소문과 같은 영걸은 환인.환웅.단군 성조 이래 한겨레의 국교요. 동방 문명의 정교인 신교문화를 꽃피운 역사적 인물이다.
•수양제의 대침공을 살수대첩으로 물리침
홍무23(단기 2945, 612)년에 수나라 군사 130여만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돌어왔다. 을지문덕이 출병하여 기묘한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러 크게 격파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에서 크게 궤멸되어, 살아서 요동성(지금의 화북성 창려)으로 돌아간 자가 2천7백 명이었다.
양광이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구걸하였으나 을지문덕이 듣지 않았고, 열제(영양제) 또한 추격하도록 엄한 명을 내리셨다.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곧바로 몰아붙여, 한갈래는 현도(玄菟) 길로 태원(太原)에 이르고, 한 갈래는 낙랑(樂浪) 길로 유주(幽州)에 이르러, 그곳의 주와 현에 들어가서, 떠도는 백성을 불러모아 안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건안(建安),건창(建昌),백암(白岩),창려(昌黎) 등 여러 진(鎭)은 안시(安市)에 속하고, 창평(昌平),탁성(涿城),신창(新昌),용도(悀道) 등 여러 진은 여기(如祈)에 속하고, 고노(孤奴),평곡(平谷),조양(造陽),누성(樓城),신구을(沙溝乙)은 상곡(上谷)에 속하고, 화룡(和龍),분주(汾州),환주(桓州),풍성(豊城),압록(鴨綠)은 임황(臨潢)에 속하게 되어 엿 제도에 따라 관리를 두었다. 이 때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고 영토는 더욱 커졌다.
*현도~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지금의 요령성 조양과 하북성 노룡현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태원~중국 산서성의 수부, 고구려가 서너 차례 정벌한 지역
*낙랑~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다.
*유주~하북성 북부 일대다.
*살수~살하수로 물이 '살살 흐르는 강'의 뜻으로 개평현 주남하, 요동반도 대양하, 청천강, 청주 무심천이 있는 데, 이덕수는 을지문덕이 대첩을 거둔 곳은 대양하라고 하였고, 정인보는 주남하라 하였다.
*요동성~지금의 하북성 창령이다. 고구려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 요동성은 난하 동쪽인 창려이다.
•면고의 영걸 을지문덕
양광(수나라 2세왕 양제의 이름)이 임신(단기 2945, 612)년에 쳐들어 왔을 때, 전에 없던 많은 군사를 몰고 왔으나 조의 20만으로 적군을 거의 다 멸하였으니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문덕 같은 사람은 한 시댜의 흐름을 자아내는 만고에 드문 거룩한 영걸이다. 뒤에 문충공 조준이 명나라 사신 축명과 더불어 백상루에 올라 시를 이렇게 읊었다.
살수 물결 세하게 흘러 푸른 빛 띠는데 옛적 수나라 백만군사 고기밥이 되었구나.
지금도 어부와 나무꾼에게 그 때 이야기가 남았건만 명나라 사신은 언짢아 한 번 웃고 마는구나
*조준~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
*백상루~평안도 안주읍 안주 군청에서 북쪽으로 백 보되는 거리에 있다. 고구려 때 누각으로 관서제일루라 부른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81~583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1만년의 자랑스런 한겨레의 정체성을 찾아라!!!
★고구려.백제의 통치영역과 수문제의 대침략(13)
옛 역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영양무원호태열제(26세) 홍무 9년(단기 2931, 598)에 열제께서 서부 대인 연태조(연개소문의 아버지)를 보내어 등주(登州, 지금의 산동성 봉래)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韋冲, 수나라의 등주총관)을 사로잡아 죽이셨다.
이에 앞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제.노.오.월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官署)를 설치하여 호적과 호구수를 정리하고, 왕의 작위를 나누어 봉하고, 험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군역과 세금과 특산물 납부를 모두 본국에 준하게 하게 하였다.
명치(明治, 21세 문자열제의 연호) 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권익 집행을 고구려 조정에서 하게 되었다. 성읍의 구획을 짓고 문무 관리를 두었다.
그 후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남북에서 사변이 생기고 사방에서 소요가 일어나 그 피해가 생민에게 미치게 되었다.
열제께서 크게 노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어 토벌하시니, 사해안에 명령을 따르지 않는자가 없었다.
그러나 수나라 왕 양견(수나라를 세운 문제 이름)은 속으로 앙심을 품고 원수를 갚겠다고 군사를 내어, 은밀히 위충을 보내 총관이라는 이름으로 관가를 파괴하고, 음락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였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을 보내어 도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시니 산동 지역이 평성되고 해성(海城)이 평온해졌다.
•수 문제의 침공과 격퇴
이해 (단기 2931, 598)에 양견이 또다시 양량(수문제 넷째 아들), 왕세(형주 총관) 등 30만 명을 보내 전쟁할 때. 겨우 정주(定周, 지금의 하북성 정주시)를 출발하여 요택(遙澤, 황하의 북류 왼쪽 지역)에 이르기도 전에 물난리를 만나 군량 수송이 끊기고 유행병이 크게 번졌다. 주라구(周羅緱)가 병력을 동원하여 등주를 점검하고, 전함 수백 척을 징집하여 동래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을 향하다가 아군에게 발각되었다. 주라구가 후진을 막으면서 전진하다가, 문득 큰바람을 만나 전군이 표류하다 빠져 죽었다. 이 때 백제가 수나라 군대에게 길을 인도해 주겠다고 제의하였다가, 고구려에서 은밀히 타이르자 실행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남수북벌(男守北伐) 정책
고구려 좌장 고성(高成, 27세 영류제의 이름)이 몰래 수나라와 친하려는 마음을 품고 막리지(고구려 때 군사와 청치를 총리하던 관직명)의 북벌계획을 무너뜨리려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성은 여러 번 군대를 보낼 것을 청원하여 백제를 쳐부수고 공을 세웠다. 그러나 막리지는 홀로 힘써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쪽은 지키고 북쪽을 치는 계책을 강하게 고수하여 여러 번 이해를 따져 하므로 이를 따르게 되었다.
*남수북벌~남쪽, 즉 신라.백제 쪽은 방어만 하고, 북쪽 지역 즉 중국지역을 공격하는 고구려의 국방.외교정책을 말한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 pp585~587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한겨레의 1만년의 정체성을 찾아라!!!
★연개소문의 강련한 주체정신(14)
고성(27세 영류제)이 즉위하자 이전의 열제들이 남긴 법을 모두 버리고 당에 사신을 보내어 노장상(老子像)을 구해와서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노자 '도덕경' 강론을 듣게하였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시어 장성을 쌓는 데 부여현(하얼빈과 장춘사이)에서 남해부(발해 때 오경의 하나인 남경남해부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요령성에 있는 해성)까지 그 거리가 천여리였다. 이때에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을 그만두도록 청원하고, 또 장성 쌓는 일을 중지시키도록 이해를 따져 간절히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이 매우 언짢게 생각하여 연개소문의 군사를 빼앗고,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비밀리에 여러 대인과 함께 연개소문을 주멸하려고 의논하셨다.
연개소문이 이 일을 먼저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몸이 죽고 나서 나라가 온전히 보전될 수 있겠는가? 일이 급박하니 때를 놓쳐서는 안 되리라"하고 휘하 군사를 모아 장차 열병할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술과 음식을 많이 차리고 여러 대신을 불러 함께 열병시을 보고자 하니 모두 참석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범과 이리가 문 가까이 왔거늘, 나를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죽이려 하는가?'하고, 마침내 그들을 모두 제게해 버렸다.
임금이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달아나다가 송양(松壤, 고주몽성제 2년에 이곳을 점령)에 이르러 조칙을 내려 병사를 모집하셨으나, 나라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이에 부끄럼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하시고 말았다.(영류제의 붕어)
*영류제의 도교 도입과 장성 축조
삼국유사 홍범 보장봉로.보덕이암조에는 "연개소문이 동북.서남에 장성을 쌓기로 추청하였다."라고 하여 연개소문의 주청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노장사상과 도사를 청하여 왔다는 말과 함께 무설(誣說, 거짓말)이니라"라고 조선상고사에서 비판하였다.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이 도교를 수입했다고 하는 기록은 거짓이다. 연개소문은 반당주의자로 당의 종교인 도교를 받아들이려고 애써 주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불교.도교 등 외래 종교 사상을 배격하고 고유한 신교 문화인 상무정신을 크게 떨친 희대의 대영걸이다. 연개소문은 당대 최고의 병법가이기도 하다.
당태종도 고구려를 정벌하려다 연개소문의 신출귀몰한 전략에 말려들어 끝내 절명하고 말았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87~589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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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생애와 대인의 풍모(15)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 한다. 성은 연씨(淵氏)이고,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이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인데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
*중국 낙양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큰 아들 남생의 묘지에는 "남생 증조부 자유(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조부태조(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천남생묘지)
연개소문은 홍무14년(26세 영양제, 단기2936, 603) 5월 10일에 태어났고 아홉 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다. 몸가짐이 웅장하고 훌륭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했다.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자고, 손수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하사 받은 상은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고, 상대방의 진심 어린 마음을 헤아려서 거두어 품어주는 아량이 있었다. 또 온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감복하여 딴 마음을 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법을 운영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다.
만약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비록 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눌 때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항상 자기 겨레를 음해하는 자를 소인이라 여기고, 당나라 사람들을 능히 대적하는 자를 영웅으로 여겼다.
기뻐할 때는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도 가까히 할 수 있지만,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도 모두 두려워하니 진실로 일세를 풍미한 시원한 호걸이었다.
연개소문이 스스로 말하기를, "물 속에서 태어나서 종일 물에 잠겨 헤엄져도 더욱 기력이 솟고 피로한 줄 모른다" 하니 무리가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려 절하며 , "창해(滄解)의 용신(龍神)이 다시 화신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연개소문이 드디어 뜻을 이루자, 모든 법을 공정무사한 대도로 집행하였다. 이로써 자신을 성쥐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成己自由),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게(開物平等)되었다. 또 세 마을(三忽)에 전(佺)을 두고 조의선인(皂衣仙人)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홀은 성 또는 마을을 뜻한다.
*연개소문은 불교.도교 등 외래 종교 사상을 배격하고 고유한 신교문화의 상무정신을 크게 떨친 희대의 대영걸이자 최고 병법가이다.
신채호는 "당태종 때의 명장인 이정(李靖)은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워 제1의 명장이 되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2012), pp589~591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좌우를 넘어 1만년의 한겨레의 정체성을 찾아라!!!
★고조선의 땅 회복을 위한 외교정책(16)
연개소문은 국방에도 힘써 당나라가 강해지는 것에 대비하였다. 먼저 백제 상좌평과 함께 양국이 병존할 수 있는 방안을 세웠다. 또 신라 사신 김춘추를 청하여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도의에 어긋나고 불손하여 짐승에 가깝소. 그대에게 청하노니, 모름지기 사사로운 원한을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핏줄이 같은 삼국 겨레가 힘을 모앙 장안을 무찌른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요. 승리한 후에는 우리 옛 영토에 연합정권을 세워 함께 인의(仁義)로 다스리고,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그것을 영구히 지켜 나갈 계책으로 삼는 것이 어떠하게소?" 이렇게 두 번 세 번 권유하였으나 김춘추가 끝내 듣지 않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백제의 상좌평~좌평은 백제의 16관등 중 제1품의 관직, 고대 일본의 중앙 호족인 후지와라 가문 전기인 '등원가전의 등원겸족전' 13조에는 "듣건 대 당에는 위징이 있고,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 있고, 백제에는 선중이 있고, 신라에는 김유신이 있다. 각기 일방을 지키고 이름을 만 리에 떨친다. 이들은 지략이 과인한 인물이다."라고 했는 데, 여기서 백제의 선중은 곧 성충을 가르킨 것으로 보인다(신채호, 조선상고사 하, 447쪽)
#삼국이 연합하여 당나라를 정벌한 뒤에, 배달.단군조선 때 의 중국 본토는 내 조선족의 본고장이요. 본래 우리 땅이던 황하.양자강 중류에 이동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연합정권을 함께 다스려 나가자는 뜻이다.
*김춘추와 당태종의 밀약
김춘추는 백제를 물리칠 힘이 없어 스스로 사신이 되어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러 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동족 상쟁은 그만두고 공동의 적인 당나라에 대항하여 함께 당을 처부수고 그 영토를 다스리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개인적인 원한과 당에 대한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연개소문의 제안을 끝내 듣지 않았다. 자기딸과 사위가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군에게 살해되어 그 원한이 너무 깊었다.
(대야성 추정지역~강소성 서주시, 김진경의 백제 900년의 비밀, 관미와 고형, 어드북스, 2015) 김춘추는 당태종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