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맥의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
*고구려본기는 동북아의 중심 세력으로 대륙을 호령한 위대한 나라로 고구려의 기원과 그 웅혼한 기상을 자세히 전한다.
*특히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과 해모수, 소서노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기존 사서의 오류를 바로 잡는다.
*고구러의 위대한 성황 광개토열제의 동방 대통일의 위업과 을파소, 연개소문, 양만춘 등의 공적을 살핀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기원을 밝힌다.
*광개토태왕비 비문을 살펴본다. 왜곡된 것을 바로 잡는다.
★고구려 국통의 뿌리는 북부여의 해모수(1)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왔는 데, 해모수의 고향이 또한 그 땅이 고구려 지명이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해모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일찍이 웅심산(熊心山)에서 사셨다. 부여의 옛도읍(백악산아사달)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의 추대를 받아 드디어 나라를 세워 왕이 되셨다. 이 분이 부여의 시조이시다. 머리에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시며, 따르는 자가 백여 명이었다. 아침이 되면 정사를 돌보고 저물면 하늘에 오르셨다. 특별히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나라 안이 저절로 잘 다스려지고 산에는 도적이 없고 들에는 벼와 곡식이 가득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없고 백성도 태평세월을 누렸다.
해모수단군께서 처음 내려올 때는 임술(단기 2095, BCE 239)년 4월8일로 진나라 왕 영정 8년이다.
*조대기~고려에 귀화한 발해인이 비장하던 사서 가운데 하나로 조선 숙종 때 북애자가 저술한 '규원사화'의 저본인 '진역유기'의 저본이다. 조선 세조가 8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거두어드린 20여 종의 비기 중에 하나다.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
*음력 4월8일~이날은 본시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단군을 기리기 위해 등을 달아 경축하는 날
1956년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에서 열린 제4차 불교대회에서 세계 공통 석가탄신일을 양력 5월15일로 확정한 바가 있다.
고려초에 있던 불교 연등회는 본래 음력 정월 보름에 하다가 음력 2월 보름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4월 초파일로 바뀌었다.(새국어사전)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57~559
#한자원문 해설은 이맥의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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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의 국통을 계승한 고주몽(고추모)(2)
•해모수의 현손
고리군(稾離君)의 현손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 불리지(弗離支)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으로 봉토를 받았다.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을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들어 고주몽을 낳았다. 때는 임인(단기 2255, BCE 79)년 5월5일이요. 한나라의 왕 불릉(弗陵) 원봉 2년이었다. 불리지가 세상을 뜨자. 유화 부인이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가니 지금의 서란(舒蘭)이다.
주몽이 장성하여 사방을 두루다니다가 가섭원을 택해 살면서 관가에서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관가의 미움을 사게되어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 마침 부여왕(북부여 6세 고무서단군)이 대를 이를 아들이 없어, 주몽이 마침내 왕의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으셨다.
(단기 2276, BCE 58) 이 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고주몽)이시다.
•북부여 혈통계보를 참고 바람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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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몽 성제의 통치 영역과 대도 말씀(3)
고주몽 성제 평락 11년 갑오(단기 2307, BCE 27)년 10월,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이듬해 을미년에 도읍을 졸본에서 눌견으로 옮기셨다. 눌견은 지금의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이다.
2세 유리명제 21년(단기 2335, CE 2), 도읍을 다시 눌견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는 데, 이곳을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 안에 환도산(丸都山)이 있는 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유사시에는 거기에 머무르셨다.
3세 대무신열제 20년(단기 2370, 37),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하셨다. 이리하여 동압록(지금의 압록강) 이남이 고구려에게 속하였으나 해성 이남의 바다 가까이 있는 여러 성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
10세 산상제 원년(단기 2530, CE197),아우 계수를 보내어 공손탁(公孫度)을 쳐부수고, 현도와 낙랑을 쳐서 멸하므로써 요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옥저~동옥저(함경도 지방), 서옥저(만리장성 부근), 남옥저(요동반도), 북옥저(서간도)
*눌견~이두식 표기로 상춘을 의미한다. 오늘날 장춘으로 바뀌었고, 지금도 그 북쪽에 주성자, '"주몽의 성터"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삼한관경본기'에는 상춘 주가성자에 구월산 삼성묘가 있다고 하였다.
*국내성~2대 유리명열제가 천도한 곳, 지금의 압록강 만포진 건너편 집안시를 말함
*낙랑국~번조선의 유민 최승이 세운 나라. 지금의 대동강 평양이었고, 낙랑군은 중국의 하북성 창려 일대이다.
*해성~지금의 요동반도의 북부에 있다. 당시 해성 이남인 요동반도까지 최씨낙랑국의 기본 강역이었다. 고구려 3세 대무신열제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공손탁~후한말의 장수, 요동 양평 사람으로 본래 현도의 하급관리였다가 요동 태수가 되었다.
•만세의 가르침을 내려 주심
'대변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주몽성제께서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리셨다.
하늘의 삼신이 만인을 한 모습으로 창조하고, 삼진을 고르게 부여하셨느니라. 이에 사람은 하늘을 대행하여 능히 이 세상에 서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나라 선조는 북부여에서 태어나신 천제의 아들이 아니더냐!
슬기로운 이는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며 계율을 잘 지켜 삿된 기운을 영원히 끊나니,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하면 저절로 세상 사람과 더불어 매사에 올바르게 행동하게 되느니라. 군사를 쓰는 것은 침략을 막기 위함이며, 형벌의 집행은 죄악을 뿌리뽑기 위함이니라.
그런고로 마음을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함이 생겨나고, 고요함이 지극하면 지혜가 충만하고,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높아지느니라. 따라서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리를 판단하고, 지혜로 만물을 다스리고, 덕으로 사람을 건지느니라.
이것이 곧 신시 배달 시대에 이치를 깨닫고 인간의 마음을 연 교화의 방도이니, 천신을 위해 본성을 환히 밝히고, 뭇 창생을 위해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 공덕을 완수하고, 천하만세를 위해 지혜와 생명을 함께 닦아(智生雙修) 교화를 이루니라.
*대변경~우주 진리(삼신의 우주정신과 역사정신)의 대의를 논한 경전, 고려시대 때 서운관에 보전돼 있었으며, 조선 세조3년에 전국 수서령을 내릴 때 그 목록이 들어감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6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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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파소의 참전계(4)
을파소가 국상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뽑아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삼았다.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參佺)이라 하는 데, 무리 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皂衣)라 하는 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잘 지켜, 나라의 일을 위해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일찍이 을파소가 무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시시대에 신교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칠 때는, 백성의 지혜가 열려 나날이 지극한 다스림이 이르렀으니, 그것은 만세에 걸쳐 바꿀 수 없는 표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전이 지켜야 할 계율을 두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고 백성을 교화하며, 한맹(寒盟)을 행함에도 계율을 두어 하늘을 대신해서 공덕을 베푸나니 모두 스스로 심법을 바로 세우고 힘써 노력하여 훗날 세울 공덕에 대비하라."
*을파소~9세 고국천열제 때의 재상, 압록곡 사람으로 2세 유리명열제 대신이었던 을소의 손자
*한맹~고구려에서 10월에 행한 신교의 제천의식이다. 일명 동맹(東盟), 동명(東明)이라고도 한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춘판(2012), pp563~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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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의 호쾌한 삼법세계(5)
•도통의 요체
을지문덕은 이렇게 말하였다.
"도로써 삼신하느님을 섬기고,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감싸고 보호하라. 나는 천하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삼신일체의 기운(氣)을 받을 때, 성품(性)과 목숨(命)과 정기(精)로 나누어 받나니, 우리 몸 속에 본래있는 조화의 대광명이 발현되면 도(道)를 통한다. 도를 통하는 것은, 삼물(三物)인 덕(德)과 지혜(慧)와 조화력(力)을 몸으로 체득하여 실천하고, 삼가(三家)인 마음(心)과 기운(氣)과 몸(身)의 조화를 성취하며, 삼도(參途)인 느낌(感)과 호흡(息)과 감촉(觸)이 언제나 기쁨으로 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를 통하는 요체는 날마다 염표문(念標文)을 생각하며 실천하기를 힘쓰고,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려 깨우쳐서(在世理化), 삼도 십팔경을 고요히 잘 닦아(靜修境途) 천지광명(환단)의 뜻과 대이상을 지상에 홍익인간되게 하는 데 있느니라.
*을지문덕~고구려 영양왕때의 명장, 자치통감에는 위지문덕(尉支問德)이라 표기되어 있다.
*본성(性)~우주 조화신의 본성, 하나님 마음으로 인간의 마음의 뿌리
*염표문~단군세기 11세 도해단군조에 염표문, 여기에는 삼대, 삼원, 삼일이 있고, 일신강충.성통광명.재세이화.홍익인간의 덕목이 있다.
*삼도~감, 식, 촉
·삼진~성, 명, 정
·삼망~심, 기, 신·십팔경~감(희구애노탐염), 식(분란한열진습), 촉(성색취미음저)
*염표문
"하늘은 아득하고 고요함으로 광대하니, 하늘의 도는 두루 미추어 원융무예하고, 그 하는 일은 참됨으로 만물을 하나되게(眞一)함이니라.
땅은 하늘의 기운을 모아서 성내히니. 땅윽 도는 하늘의 도를 본받아 원만하고, 그 하는 일은 쉼 없이 길러 만물을 하나되게(勤一) 함이니라.
사람은 지혜와 능력이 있어 위대하니, 사람의 도는 천지의 도를 선택하여 원만하고, 그 하는 일은 서로 협력하여 태일의 세계(協一)를 만드는 데 있느니라.
그러므로 삼신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一神降衷)
사람의 성품은 삼신의 대광명에 통해 있으니(城統光明)
삼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도우며 이롭게하라"(弘益人間)
•상고 시대의 덕목
환국 시대에는 오훈이 있었고, 신시 시대에는 오사, 고조선에는 오행육정, 부여에는 구서가 있었다. 또한 삼한에는 오계가 있었으니, 곧 효도, 충성, 신의, 용맹, 어짐(孝.忠.信.勇.仁)이다.
모두 백성을 공명정대하고 평등하게 가르치고 무리를 조직하려는 뜻이 있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줄판(2012), p565~566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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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성군, 영걸의 역력한 발자취(6)
책성(柵城,연해주를 말함)에 태조무열제(6세)의 공덕을 새긴 기공비(紀功碑)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훈적비가 있다. 안주(安州) 청천강 연안에 을지문덕의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송덕비가 있다.
평양(平壤)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11세)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朝天石)이 있고, 삭주 거문산(巨門山) 서쪽 기슭에 을파소 묘가 있고,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峰山)에 연개소문 묘가 있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동천제(東川帝)를 단군이라고 하였다. 해마다 한맹(寒盟, 동명) 때가 되면 평양에서 삼신하느님을 맞이하는 천제를 올렸다. 지금의 기림굴(箕林窟)은 천제를 올리던 곳이다.
삼신하느님을 크게 맞이하는 대영제전(大迎祭典)은 처음 동굴에서 행해졌다. 거기에는 구제궁(九梯宮) 조천석(朝天石)이 있는 데, 길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또 삼륜구덕(三倫九德)의 노래가 있어 이를 부르도록 장려하였다.
조의선인(皂衣仙人)은 모두 선발된 사람인데, 사람들이 삼가 본보기로 삼았다. 그렇지 않는다면 어찌 그들에게 영광을 더하여 왕의 사자와 동등하게 여겼겠는가?
*평양~"평양은 본래 선인왕검터다". 이말은 삼국사기 동천왕 21년 조에 있다. 동천제를 단군이라고 불렀는 데, 단군이 평양에 도읍했기 때문이다.
*대영제전~배달.단군조선 이래 음력 3월16일에 삼신하느님께 천제를 지내던 국가적인 대행사
*구제궁~고구려 때 평양에는 장안궁, 평양궁, 구제궁, 왕성궁, 안학궁 등이 있었다. 구제궁은 광개토열제가 지은 별궁으로 모란봉 기슭에 있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67~568)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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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열제의 성덕과 동방 문명의 종주국 장악(7)
광개토경호태황은 큰 공적과 성스러운 덕이 세상 어떤 임금보다 뛰어나시어, 사해 안에서 모두 열제(烈帝: 위대한 황제)라 불렀다.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실 때 천악(天樂)을 연주했다. 전쟁에 임할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돋으셨다. 말타고 순행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하느님께 천제를 올렸는 데, 이때도 천악을 쓰셨다.
*천악~단군 때의 어아가를 말한다. 광개토열제 때는 군사의 사기를 높이는 군가로 사용되었다.
*어아가는 단군세기 2세 부루단군 조에 나온다.
*참성단~국내에 현존하는 최고의 천제단, '단군세기' 초대 단군왕검조에 재위 51년 무오(단기 51, BCE 2283)년에 왕검께서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에 삼랑성을 건설하게 하시고,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게 하시니 지금의 참상단이 곧 그것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는 산꼭대기에 땅을 파서 성단을 만든 것을 천단(天壇)이라 하고, 산골 짜기에 나무를 세워 토단을 쌓은 것을 신단(神壇)이라 하였다.
•일본 본토 정벌과 대통일의 위업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셨는 데, 당신 왜인은 백제를 돕고 있었다. 백제는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 경계를 침범하게 되었다. 이에 열제께서는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슬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셨다.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때에 백제, 신라, 가락 모든 나라가 조공을 끊이지 않고 바쳤다. 거란과 평량이 다 평정되어 굴복하였고, 임나, 이국, 왜의 무리가 신하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의 융성이 이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거란~당시에 송막 지역에 있었다. 송막은 지금의 하북성 위장현, 극십극동기와 대흥안령 남쪽일대이다.
*임나~대마도
*이국~이세라고도 하고, 왜와 인접
*왜~연나부부여(서부여) 의라가 건설한 최조의 통일왕조인 야마토 왜이다(일본서기에는 15세 오진왕)
*평량~감숙성 평량현 서북이다.
남북조 시대에 전, 후,서,북,남 5량의 나라가 있었다. 평량이 수중에 돌아오자 실크로드로 연결되는 통로가 열렸다. 이것은 감숙성에 있는 돈황석굴의 고구려 벽화에서 확인된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69~571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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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큐슈에 다라한국을 건국한 협보(8)
•일본에 세워진 고구려 분국
*협보~ 오이, 마리와 함께 주몽성제의 고구려 건국을 도운 창업공신이다. 2세 유리명열제가 사냥을 나가 회궁하지 않자 대보인 협보가 직간하였다. 열제는 듣지않자 협보는 대동강부근으로 달아났다가 얼마 후 일본에 건너가 큐슈 중부에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웠다.
협보가 남한으로 달아나 마한산(지금의 평양)에 은거하고 있을 때, 따라와서 사는 자가 수백여 가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해 흉년이 들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 때 협보는 장차 변란이 있을 줄 알고 무리를 꾀어 양식을 써서 배를 타고 해포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장 구야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해(일본 큐슈의 남서쪽 바다, 사가현의 서북 해안) 북쪽 해안이었다. 몇 달 지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 살았는 데, 이 사람이 바로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이다. 후에 임나와 병합하여 연합정권을 세워 다스렸다.
•고대 일본 속에 건설한 한국
처음에 변진 구야국 사람이 먼저 들어와서 모여 살았는 데 이것을 구야한국이라고 한다. 다파라는 일명 다라한국이라 불렀다. 이곳 사람들은 홀본(忽本, 졸본)에서 이주해 와서 일찍이 고구려와 친교를 맷었으므로 늘 고구려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서로 이웃하고 성씨도 같았다. 옛날에는 웅습(熊襲, 구마소)성이 있었는 데, 지금의 큐슈 구마모토성이 바로 그곳이다.
*구야한국~지금의 일본 북큐수의 후쿠오카현에 위치, 변진 구야국인이 먼저 들어와 살던 곳으로 구야본국인이 다스렸다.
•당시 왜의 위치와 상황
왜는 회계군 동쪽에 있는 동야현(복건성 민후현 동북)의 동쪽에 있었다. 뱃길로 건너 9천 리를 가면 나패(那覇, 나하)에 이르고, 또 일천리를 가면 근도(根島, 네시마)에 이른다. 근도(네시마)를 저도(柢島, 도시마)라고도 부른다.
당시에 구노(拘奴) 사람이 여왕과 서로 다퉈 찾아가는 길을
매우 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구야한국으로 가려는 사람은 진도(津島, 대마도 북쪽 섬), 가라산(加羅山, 대마도와 큐슈의 중간에 위치한 지금의 이키노시마), 지가도(志加島, 후쿠오카)를 거쳐야 비로소 말로호자(末盧戶資, 말로국, 지금의 큐슈 사가현 북쪽 가라쓰) 땅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 동쪽 경계가 구야한국 땅이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7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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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산의 역사적 의의와 방사 서복의 일본 이주과정(9)
회계산은 본시 '신시중경(神市中經)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사공 우(禹)가 석 달 동안 재계하고 이 책을 얻어 치수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우가 돌을 채취하여 부루태자의 은공을 새겨 산 높은 곳에 세웠다고 한다. 오(吳).월(越)은 본래 구려(九黎)의 옛 읍이고, 산월(山越).좌월(左越)은 모두 그 후예가 갈라져 옮겨 살았던 땅이다. 늘 왜와 더불어 왕래하고 교역하여 이익을 얻는자가 점차 많아졌다.
진(秦)나라 때 서불(徐巿)이 동야(東冶)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나하)에 이르고, 종도(種島, 다네시마)를 거쳐 뇌호내해(세도나이카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도착하였다. 이세(伊勢)에는 옛적의 서복의 무덤과 사당이 있다. 어떤 이는 단주(亶洲)를 서복이 살았던 곳이다라 한다.
*오월춘추~"3월 경자일에 완위산에 올라가 금간지서를 발견하고, 금간오자를 살펴서 소통시키는 원리를 알았다.
*구려~지금의 산동성.강소성.안휘성.절강성 등
황하.양자강 중류 동쪽에 정착하여 살던 동이족을 말한다.
단군조선 때에 이 지역에 분조를 두어 구려의 백성을 다스렸다.
*서불(서복)~진나라 진시황 때의 방사, 동방 종주국 단군조선의 신교를 받고, 서복.한종에게 불사약을 구해오라고 하였는 데,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은 왜국으로 건너가 왕이 되었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573~574
#한자원문 해설은 태백일사 제6, 고구려본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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