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애거사 범장 찬 북부여기
★9천년 한겨레사의 잃어버린 고리, 부여사의 진실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사관(仕官)의 뜻을 비리고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인 중 한 분이시다.
*범장 선생은 통곡하여 말하되 "백이(佰夷)는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고 하니 그 품절이 이러하더라"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세 번이나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고 고향 금성(錦城)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이명과 함께 천보산 태소암에 머물 때 소전거사에게서 많은 기고저서(奇古之書 즉 환단 이후로 전해 내려오던 역사의 진결을 얻었다.
*이암은 단군세기를, 범장은 북부여기 상.하를 저술했고, 이명은 조선 숙종 때 북애가 지은 '규원사화'의 저본이 된 '진역유기' 3권을 썻다고 한다.
*사후 후덕군(厚德君)에 봉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묘는 고향인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복만마을에 있다.
★북부여기 상
시조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고조선의 국통 계승자, 해모수단군 즉위
해모수단군의 재위 원년은 임술(단기 2095, BCE23)이다. 임금께서는 본래 타고난 기품이 영웅의 기상으로 씩씩하시고, 신령한 자태는 사람을 압도하여 바라보면 마치 천왕랑과 같았다.
23세에 천명을 좇아 내려오시니, 이 때는 47세 고열가단군 재위 57년(단기 2095)으로 임술년 4월8일이었다. 임금께서 웅심산(熊心山)에서 기병하여 난빈(蘭濱)에 제실(帝室)을 지으셨다. 머리에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龍光劎)을 찼으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시니. 따르는 사람이 5백여 명이었다. 아침이 되면 정사를 돌보시고, 날이 저물면 하늘의 뜻에 따르셨다. 이 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재위 2년(단기 2096, BCE 238)년 3월16일 대영절(大迎節)에 임금께서 하늘에 제를 올리시고, 연호법(煙戶法)을 만들어 백성들을 보살폈다. 오가의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고 둔전으로 자급하게 하여 뜻밖의 사태를 대비하셨다.
*단군~북부여 시대에도 고조선 제도를 계승하여 단군이라 칭했다.
*웅심산~길림성 서란(舒蘭)
*연호법~밥짓는 연기를 인가의 상징으로 온 말인 데, 호(戶), 가(家)와 같은 의미이다.
*천왕랑(天王郞)~국자랑
배달국의 제세핵랑-고조선의 국자랑-북부여의 천왕랑-고구려의 조의선인-백제의 무절과 신라의 화랑-고려의 재가화상 또는 국선, 선랑으로 이어졌다. 조선의 선비정신, 구한말의 항일독립운동과 3.1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음력 4월8일~음럭 4월8일을 석가탄신일,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하는 데. 원래는 북부여 시조인 해모수 단군을 위해 등을 달아 경축하는 날이다. 석가탄신일은 2월8일과 4월8일로 나누어져 있는 데, 1956년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에서 열린 제4차 불교대회에서는 세계 공통 석가탄신일을 양력 5월15일로 확정한바 있다. 우리 민족의 관등경축하는 4월8일은 불교 도래이전부터 천제의 아들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단군의 하강일로 우리 민족 전래의 대축제일이다.(송호수, 한민족의 뿌리 사상)
*오가제도~오가제도는 한민족 국교인 삼신사상과 오행철학을 기초로하여 성립하였다.
마가.우가.구가.저가.계가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247~249
#한자 원문해설은 범장의 북부여기 상을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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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단군 해모수 45년
오가의 공화정 종결
재위8년 기사(단기2102, BCE 232)년에 임금께서 무리를 거느리고 옛수도에 가서 오가를 설득하니. 오가가 드디어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 때 나라 사람들이 단군을 추대하여 받드니, 바로 북부여 시조 해모수이시다.
겨울 10월에 태아를 가진 임신부를 보호하는 법(公養胎母之法)을 만들고 사람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태교부터 시작하였다.
재위 11년 임신(단기 2105, BCE 229)년에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동을 죽이고 크게 약탈하였다.
*북막~북쪽의 사막, 고비 사막을 지칭한다. 내몽골 지역이다.
*영주(寧州)~이유립은 요나라 때 설치한 영강주(寧江州)인 현재의 길림성 부여현을 영주로 비정함
기준이 번조선 마지막(75세) 왕위에 오름
재위 19년(단기 2113, BCE221)년에 기비(箕丕)가 훙서(薨逝)하자 아들 준(準)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번조선 왕으로 책봉되었다. 임금께서 관리를 파견해 군대를 감독하여 연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데 더욱 힘을 쓰셨다. 이에 앞서 연나라 장수 진개(秦介)를 보내 번조선 서쪽 변방을 침입하여 마번한에 이르러 그곳을 국경으로 삼았다.
*흉서~제후나 왕공, 귀인이 죽음
*번조선의 왕~삼조선 체제는 북부여시대에도 존재하다가 위만의 번조선 찬탈로 무너짐
*연나라의 침입~번조선 71세 기욱 때인 BCE300년경 발생한 사건, 연나라는 BCE 222년에 진(秦)에 의해 망함
*번조선의 서쪽 변방~여기서는 현 북경 부근에 흐르는 백하(白河)일대를 말한다. 이곳이 훗날 위만이 망명하여 살던 상.하 운장이 있었다.
재위 20년 신사(단기 2114, BCE 220)년에 임금께서 백악산아사달에서 천제를 지내도록 명하셨다. 7월에 궁궐 336칸을 새로 짓고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재위 22년 계미(단기2116, BCE218)년에 여홍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과 함께 박랑사에서 진왕 정(政)을 저격하였으나 수행하던 수레를 잘 못 맞혔다.
*한(韓)나라~전국 시대 때 칠웅(진초연제한위조)의 하나
*진왕(秦王)~진의 시황제
재위31년 임진(단기2125, BCE209)년에 진승이 병사를 일으키자 진(秦)나라 사람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이에 연.제.조나라 백성 가운데 번조선으로 망명해 온 자가 수만명이었다. 준왕이 곧 상.하 운장에 나누어 수용하고 장수를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재위38년 기해(단기2132, BCE 202)에 연나라 노관이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동쪽 경계로 삼았다.
폐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재위 45년 병오(단기 2139, BCE 195)년에 연나나 노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달아나자 그 일당인 위만이 우리나라에 망명을 구하였다. 해모수단군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병이들어 능히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셨다.
*진승의 난~하남성 등봉현의 빈농출신으로 오광과 함께 진나라에서 농민 반란을 일으켜으나 6개월만에 실패
*노관(盧绾)~펴현 출신으로 한고조 유방과 동향인이자 동년 동월 동일에 태어난 친구이다.
한나라 건국에 공헌하여 연나라 왕에 봉해졌다. 한고조가 죽은 후 여태후가 유씨계와 공신들을 숙청하자 그 화를 피해 그 일당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하였다.
번조선 왕 기준이 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치고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삼고 상하운장을 떼어 주어 지키게 하였다.
이 해 (단기 2139, BCE 195) 겨울에 해모수단군께서 붕어하시니,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를 지냈다. 태자 모수리(慕漱離)께서 즉위하셨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247~248
#한자원문 해설은 범장 찬 북부여기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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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단군 모수리 재위 25년
고조선 삼한 유민들의 중삼한 건국
모수리단군의 재위 원년은 정미(단기 2140, BCE194)년이다. 번조선 왕 기준이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일찍이 백성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 모두 풍요롭고 생활이 넉넉하였다.
후에 기준이 떠돌이 도적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오가의 무리가 상장(上將) 탁(卓)을 받들고 대규모로 여정에 올라 곧바로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곳이다. 이를 일러 중마한 이라고 한다. 이 때 변한과 진한도 각각 그 백성과 함께 백 리 땅에 봉함을 받아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변한.진한은 모두 마한의 정령(政令)에 따라서 그대로 행하고 세세토록 배반하지 않았다. 재위 2년 무신(단기2141, BCE193)년에 임금께서 상장 연타발(延佗勃)을 보내 평양에 성책을 세워 도적 위만을 대비하게 하셨는 데, 위만도 싫증이 나고 괴롭게 여겨서 다시는 침노하여 어지럽히지 않았다.
재위 3년 기유(단기 2142, BCE192)년에 해성(海城)을 평안도에 부속시키고 아우 고진(高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셨다. 이 때 중부여(中夫餘) 사람들이 모두 식량 조달에 참여하였다.
*수유~하북성 난하 유역에 있던 나라 이름, 번조선의 중심세력으로 성장, 수유는 전국칠웅과 겨루며 고조선의 방패 노릇을 하였고 대단군의 허락을 받아 번조선을 통치하였다. 진조선의 내정에도 개입하여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월지~지금의 전북 익산지역으로 추정, 번조선의 유민들이 상장탁을 받들어 월지국을 세웠다.
*연타발~고구려의 개국 공신인 연타발과 동명이인이다.
*평양~여기서 말하는 평양은 만주 요령성 해성에 가까운 지역이다. 요양을 평양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중부여~이유립은 요령성 해성이남 요동반도와 평안도를 중부여라 한다.
경향분수법 제정
겨울 10월에 수도와 지방을 나누는 법(京鄕分守之法)을 제정하여 수도는 천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위수를 총괄하고,
지방은 사방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오가가) 진수(鎭守)하게 하셨다. 그 모습이 마치 윷놀이에서 말판 싸움을 보는 듯 했으며, 천지창조의 설계도인 용도(龍圖)로써 변화의 법칙을 알아내는 것과 같았다.
재위 25년 신미(단기 2164, BCE 170)년에 모수리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고해사께서 즉위하셨다.
*진수~군대를 요충지에 주둔시켜 엄중히 지킴
*용도~배달국 5세 태우의환웅의 막내아들인 태호복희가 천하에서 받은 우주창조의 설계도인 용마하도를 줄인 말이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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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단군 고해사 재위49년
번조선 유민 최승의 낙랑국 건설
고해사단군의 원년은 임신(단기 2165, BCE169)년이다. 정월에 낙랑 왕 최승이 해성에서 곡식 3백석을 바쳤다. 이에 앞서 최승은 낙랑산(樂浪山)에서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러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다. 이때는 해모수단군 재위 45년 병호(BCE 195)년 겨울이었다.
재위 42년 계축(단기 2206, BCE 128)년에 임금께서 친히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남려성(南閭城)에서 도적 위만을 격퇴하고 관리를 두어 다스렸다.
재위 49년 경신(단기 2213, BCE 121)년에 일군국에서 와서 방웅을 바쳤다. 이 해 9월에 고해사단군이 붕어하셨다. 태자 고우루께서 즉위하셨다.
*왕검성~마한의 왕검성(백아강)은 낙랑 최승이 도읍한 대동강 평양이다.
*낙랑 왕 최승~위만의 번조선 찬탈 직전, 번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의 백성들이 평양으로와 낙랑국(BCE 195-CE37)을 세웠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이야기가 낙랑국의 무대이다. 낙랑국을 세운 사람은 번조선의 유민인 최승이다.
한사군의 '낙랑군'과 '낙랑국'은 다르다. 한반도 북부에는 애초부터 한사군이 없었고 대륙에 있었다.
*낙랑산~지금의 하북성 창려 지역에 있는 산,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험성도 바로 창려지역이다. 낙랑군은 지금의 하북성 창려 일대이다.
*남려성~'한서 무제기'에 원삭 원년(BCE128)조에 "가을에... 동이의 예군 남려 등이 28만명을 데리고 투항해와서 창해군을 삼았다. 창해군은 하북성 창주시 일대로 본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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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단군 고우루(일명 해우루) 재위 34년
위만정권 우거왕의 침략과 해성 수복
고우루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유
(단기 2214, BCE 120)년이다.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지키게 하셨는 데, 고진이 점차 병력을 증강시키고 성책을 많이 설치하여 능히 우거의 침입에 대비하여 공을 세웠다. 고진의 벼슬을 높여 고구려후로 삼으셨다.
재위 3년 계해(단기 2216, BCE118)년에 우거의 도적떼가 대거 침략하여 왔다.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해성 이북 50리 땅이 전부 약탈당하고 점령되었다.
재위 4년 갑자(단기 2217, BCE117)년에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어 해성을 공격하였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다.
재위 6년 병인(단기 2217, BCE 115)년에 임금께서 친히 정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해성을 격파하고, 계속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이로서 구려하(九黎河, 지금의 요하) 동쪽이 전부 항복하였다.
재위 7년 정묘(단기 2220년, BCE 114)년에 임금께서 좌원(坐原)에 목책을 설치하고 남려 군대를 배치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셨다.
*고진~북부여 2세 모수리단군의 아우
*서압록~동압록은 지금의 압록강이고, 서압록은 지금의 요하로서 동서압록은 삼한의 경계를 흐르던 강이다.
*살수~물이 살살 흐르는 강으로
·요동반도에 있는 개평현 주남하
·요동반도에 있는 대양하
·청천강
·청주 무심천, 여기서는 요령성 개평현 주남하를 말한다(최동, 조선상고민족사, 살수고)
*좌원~위당 정인보는 남만주 관전현 성동산과 통화현 홍석납자의 중간에 있는 긴평원
(정인보, 조선사연구, p122), 그러나 BCE 115년에 요하 동쪽이 모두 항복했다 했으니 좌원은 요하의 서쪽 대능하 상류 능원현 지역으로 추정된다.
한무제의 침략을 격퇴한 고두막한
재위 13년 계유 (단기 2226, BCE 108)에 한나라 유철(무제)이 평나(平那)을 침입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이르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 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흥하여 전쟁을 지윈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재위 34년 갑오(단기 2247, BCE 87)년 10월에 동명국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로다. 장차 여기에 도읍을 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하시오" 하니 임금께서 난감하고 괴로워하셨다.
이 달에 고우루단군께서 근심과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아우 해부루가 즉위하였다.
*유철(劉徹)~전한의 7세 황제 무제(재위 BCE141~BCE 87)로 시호는 효무황제다. 그는 유학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해외원정을 펼쳐 흉노와 위만정권을 멸망시켜 가장 넓은 영토를 만들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평나~지금의 하북성 창려이다.
해부루의 가섭원 부여 건국
동부여
동명왕 고두막한이 군대를 보내어 계속 위협하므로 임금과 신하들이 몹시 난감하였다. 이 때 국상 아란불(阿蘭弗)이 주청하기를 "통하 물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 데,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이 자라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할 만한 곳임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권유하여 마침내 도읍을 옮기니 이 나라를 가섭원 부여, 혹은 동부여라 한다.
*아란불~동부여의 재상
*가섭원~지금의 흑룡강성 통하현이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253~257
#원문 한자해설은 범장 찬 북부여기 상을 참조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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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단군 고무서 재위2년
•덕을 갖추고 민심을 얻어 작은 해모수라 부름
고무서단군 재위 원년은 임술(단기 2275, BCE 59)년이다. 임금께서 졸본천에서 즉위하셨다. 부로(父老)들과 더불어 백악산에 모여 규약을 정하고 천제를 지내셨다.
여러 가지 사례를 반포하여 널리 행하게 하시니 안팍에서 모두 기뻐하셨다.
임금께서는 태어날 때 신령스러운 덕을 갖추시어 능히 주술로써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시며, 자주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휼하시니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는 칭호를 붙게 되었다. 이때에 한나라 도적이 요하동쪽에서 분란을 일으키므로 여러 번 싸워서 승리를 거두셨다.
재위 2년 계해(단기 2276, BCE58)년에 임금께서 순행하시다가 영고탑에 이르러 힌 노루를 얻으셨다.
겨울 10월에 고무서단군께서 붕어하셨다. 고주몽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대통을 이으셨다.
이에 앞서 고무서단군께는 대를 이를 아들이 없었는 데, 고주몽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보고 공주와 맺어주어 아내를 삼께하셨다. 이에 즉위하니 당시 나이23세였다.
*요하 동쪽~요하동쪽은 난하의 동쪽을 말한다.
•고주몽의 북부여를 계승하기전에 피난한 과정
당시 동부여 사람들이 주몽을 죽이려고 하므로, 주몽의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 세 사람과 친구의 의를 맺고 함께 길을 떠났다. 차릉수(岔陵水)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뒤쫒아 오던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두려워하여 강에 고하고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으로 오늘 달아나는 길인 데 쫒는 자가 다가오고 있으니 어찌하리까? 하니 물속에서 물고기와 자라가 수없이 떠올라 다리가 되었다. 주몽이 물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졌다.
*협보~주몽을 도운 고구려의 창업공신, 후에 일본 큐슈지방에 건너가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웠다(고구려본기)?
*차릉수~광개토대왕비 비문에는 엄리대수(奄利大水) 중국문헌에는 엄사수, 엄체수, 사엄수로 나오는 데, 지금의 송화강이다.
#역주 안경전, 환단고기 상생출판(2012), pp261~263
#한자원문 해설은 범장 찬, 북부여기 하를 참고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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