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삼극적 조선철학과 양극적 음양론 및 변증법
3. 유럽중심적 세계관을 선전하는 도구로서의 유물변증법
논쟁에서 이기는 기술로서의 변증법
변증법은 고대 음양가들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시도되었다가 소멸된 동양철학적 방법론의 지류중 하나였다. 그 후 국가형성에서 동양보다 수천년이 뒤진 서양에서 다시 살아나 서양철학적 방법론의 주요한 영역을 차지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서양 변증법의 발원은 웅변가들에 의해서였다. 노예제에 기초한 귀족정치를 펼치고 있던 그리스 로마 등에서는 웅변이 출세의 지름길이었고 웅변은 대중연설과 아울러 토론과 논증의 기술로 핵을 이루게 되었다. 웅변으로부터 논리학이 발전하고 논리학에서 철학과 과학의 체계가 이루어진 것이 변증법을 도구로 사용하게 되면서이다.
변증법은 처음에 논쟁에서 이기는 기술 정도로 불리워졌다. 특히 논쟁의 기술, 또는 논증법으로서의 변증법을 주되게 활용한 것이 유명한 궤변론자 그룹인 쏘피스트 학파였다. 서양변증법의 어원을 보면 그리스어에서 디알레게스타이(dialegesthai), 라틴어계와 그외의 디알레티스(dialectice)와 디알레티쿠스(dialecticus)등은 '토론하다' 또는 '논쟁의 기술자' 등을 의미하고 있다.
먼저 한 사람이 무엇을 주장하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반박하는 주장을 하게 된다. 서로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승리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주장 내용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입증해내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정->반->합의 고전적인 변증법의 도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먼저의 주장이 정이 되고 그에 반대하는 다른 주장이 반이 되고 비교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 합이 된다.
'모순'이란 창(모 : 矛)과 방패(순 : 盾)로 고대 중국에서 나온 말이다. 어느 무기상인이 '이 창은 어떤 방패라도 다 뚫을 수 있고, 이 방패는 어떤 창이라도 다 막아낼 수 있다'고 소리치며 창과 방패를 함께 팔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이 창으로 이 방패를 격돌시키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묻자 무기상인의 말문은 막히고 말았다. 이로부터 불합리한 말을 하는 경우에 '모순'된다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변증법은 모순과 대립을 전제로 하게 된다. 의견의 대립상태에서 모순을 찾아내고 비교하여 무엇이 옳은지를 가려내는 것이다. 여기서의 모순이란 주장하는 말의 모순이다. 어느 주장에 대해 그 주장이 갖고 있는 불합리한 점을 인정케 하여 굴복시키는 기술이 바로 변증법이다. 이처럼 변증법은 사변적이며 관념적이다. 이러한 변증법을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사고의 도구로 사용하게 되면서 활용영역이 확대되었다.
변증법은 서양철학의 역사 속에서 수없는 부침을 거듭하다가 결국 헤겔에 이르러 형이상학적 변증법의 일대 극점을 이루게 되었다. 헤겔은 '역사는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전진하며, 이성의 전진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완성시켰다. 이후 헤겔의 제자인 마르크스는 역사를 이끄는 '절대이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형이하학적 변증법의 극점을 세웠다.
당시 유럽사회는 수많은 식민지의 피를 먹으며 제국의 영광이 극에 달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에따라 형이상학적 변증법론자들은 형이하학적 변증법론자들에게 변증법의 주도권을 내어주고 자신들은 실증주의적 수량철학으로 넘어간 것이다.
수량철학은 변증법의 모순과 대립을 전제로 하는 양극적 관점을 벗어나 과학으로 철학의 역할을 대신하게 하였다. 수량철학은 결국 물량철학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이로써 서양철학은 종말을 고한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서양과학은 있어도 서양철학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철학이 없으면 삶도 없듯이 철학이 이끌지 못하는 과학의 독주는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궤멸로 이어지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형이하학적 방법으로 유럽중심적 세계관을 선전하는 도구로서의 소위 유물변증법을 살펴본다.
모순개념의 무차별 적용에 의한 대립물 통일과 투쟁의 법칙
변증법은 모순과 대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하였다. 세계가 변화하고 발전하는 요인을 모순 대립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 변증법의 핵심이다. 음양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물의 상관적 관계를 설정하는 양극차원의 세계관이지만 그것을 모순으로 파악하는 것이 차이다. 상호보완적 관계이건 상호반발적 관계이건 모든 존재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순은 사물의 겉과 안, 전극의 양극과 음극, 경제의 생산과 소비, 남과 여, 섭취와 배설, 승리와 패배, 오른쪽과 왼쪽, 위와 아래 등 서로 상대적-상반적-대칭적 관계 설정이 이루어지는 대립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그런데 사물의 겉과 안, 전극의 양극과 음극 등에 모순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문제로 된다. 모순이라는 말 자체만을 놓고 볼때 현실에서의 창과 방패는 수많은 병기 중의 하나로 창이 없다고 방패가 없어지거나 방패가 없다고 해서 창이 없어지는 것은 아님이 틀림없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흔한 구경거리 중의 하나인 데모대와 전경들의 대결에서 전경의 방패가 유난히 돋보인다. 창은 없지만 방패는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물으로서의 창은 없지만 데모대를 창의 역할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모순에 의해 무엇이 옳은지의 규명은 대결을 통해서 이루어질텐데 승자가 진리를 차지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승자를 진리로 하는 투쟁이 벌어지겠지만 만약 한 쪽이 상대를 이길 수 없다고 실토하고 게임을 기피하게 되면 진리의 규명은 대결없이 이루어 질 수도 있다.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빵을 생산하는 것은 곧 밀가루, 설탕, 우유 등 재료의 소비이고 빵을 먹는 행위도 소비이지만 그것은 곧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모순이 일어난다고 변증법론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생산과 소비라는 양면성에 대해 투쟁을 전제로 한 모순관계로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삶과 죽음도 모순관계라고 변증법론자들은 설명한다. 생명의 모순은 삶이 죽음과 투쟁하는 것이며 대립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삶과 죽음은 개념적으로 상반적 관계이다. 또한 죽음과 싸우는 삶이라는 표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서로 싸워서 어떤 진리를 증명하는 것인가?
물리적인 삶이 물리적인 죽음을 영원히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음이 삶을 이긴다고 해서 그것이 변증법적 모순에 적용될 수 있을까?
물리적 생명은 반드시 소멸하는 것이 존재의 법칙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이 외에 삶이 옳은지, 죽음이 옳은지의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러나 만약 어느 사람이 자신은 영원히 죽지않는다고 주장하거나 동시에 세계에 삶이란 존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게 되면 이것은 불합리한 모순이 된다.
삶과 죽음같이 왼쪽과 오른쪽, 겉과 안이 모순이라고 개념을 정의하면 변증법적 모순개념은 단순한 상관적 개념에 불과한 것이 된다. 왼쪽과 오른쪽이 무엇이 옳은지 서로 대결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사물의 겉과 안이 서로 대결하여 안이 진리가 되든가 겉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존재하는 양면성일 뿐이다. 따라서 그대로 모순개념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무차별 적용으로 인한 반개념이 되어 개념으로서의구실이 와해 되어지고 만다.
이와같은 모순개념의 무차별 적용으로 대립개념에 투쟁을 전제로 하는 대립물로 설정함으로써 우주와 생명의 운동을 기계론적 관념론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대립물 통일과 투쟁의 법칙'인 것이다. 한마디로 이러한 반개념 또는 몰개념적인 대립물의 통일은 변증법론자들의 에고적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방향과 위치상의 구분도 투쟁하는 대립물이고, 겉과 안도 투쟁하는 대립물이 됨으로써 변화의 운동이 그 자체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변증법론자들은 수정작업을 통해 모순에는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이 있다고 한다. 적대적 모순은 지양을 통해 모순극복이 이루어지고, 비적대적 모순은 모순의 실현을 통한다고 한다. 이렇게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의 개념으로 차별화 시키면 모순의 법칙은 문제가 해결되어질 것인가?
사물의 겉과 안, 오른쪽과 왼쪽 등이 비적대적 모순이라면, 자연 속에서 적대적 모순이 사물내부로 존재하는 것은 찾을 수 없다. 적대적 모순의 설명에 있어서 궁극적 목표는 결국 사회적으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대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순은 적대적이므로 필연적인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노동자가 승리할지, 자본가가 승리할지는 대립물 통일의 법칙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자본가계급이 주도하는 세계는 낡은 것이고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세계는 새로운 세계이기 때문이라는 당위론으로 귀결된다.
이것도 자본가계급이 격파되면 노동자계급만 남게 되므로 대립물 배제의 법칙일 뿐이다. 초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대립물 상호침투의 법칙으로 설명되다가 러시아의 혁명이론가 레닌에 이르러 대립물 상호침투는 있을 수 없고 투쟁을 통한 통일만이 있다고 주장되어 바뀌게 된 법칙이므로, 누군가에 의해 대립물 배제의 법칙도 제기될만 하지 않은가 싶다.
또한 적대적 모순을 사물외에 인간관계에 적용시킬때 즉 같은 편끼리의 입장차이도 비적대적 모순이라 설명한다. 스탈린을 돼지 취급했던 지식계급에 대한 피의 보복, 모택동에 의한 피의 문화혁명, 헝가리, 체코슬로바카아의 폭동 등은 모두 적대적 모순이 사라진 비적대적 모순의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들이다. 양극 음극, 겉과 안 등 사물이나 현상의 비적대적 모순이라 하더라도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비적대적 모순의 실현과정에서는 사람이 죽어나갔다. 이것을 소수의 잔인함이나 외부의 공작에 의한 것이라고 둘러댄다면 이 또한 변증법을 배신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사실 모순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합리와 몰이해, 계급적 이해관계나 경쟁적 이익관계의 대치상황에서 발생된다. 따라서 모순은 사회내부에 존재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무차별하게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로 설명하게 되면 모순개념의 모순현상이 심화되어지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는 창과 방패를 격돌시키듯 부딪쳐 보면 알 것이다.
변증법론자들은 그 자체에서 수없이 개념 수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마치 변증법의 법칙적인 발전인양 해명한다. 철학적 방법론이 현실에 부딪힐 때마다 바뀔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철학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변증법 수업의 첫머리인 '의심'은 아직 수정될 필요가 없는 개념임이 확실하다.
양질전화 또는 그 역의 법칙에 대하여
양적변화가 질적변화를 초래한다거나 그 반대의 법칙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때 흔히 드는 사례 중에 끓는 물에 대한 변증법적 적용이 있다. 보통의 일정한 압력 하에서 섭씨 100도가 되면 물은 끓게 되어 기체로 변한다. 반대로 물을 냉각하여 영하로 내려가게 되면 물은 고체가 된다. 이것을 일컬어 양이 질로 전화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물이 액체에서 기체로 되거나 액체에서 기체로 변하면 H2O라는 물의 분자가 다른 것으로 변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물은 물이다. 끓는 물이건 기체건 고체건 물의 질은 변한 것이 아님이 틀림없다. 본질은 변함이 없고 상태만 일시적으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화살을 꺾는 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화살을 한 대씩 꺾게 하면 쉽게 꺾다가도 한꺼번에 여러개를 꺾게 하면 꺾지 못한다는 단결된 힘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교훈적인 예이다. 이것도 양이 질로 전화된 것이라고 변증법론자들은 주장한다. 이것을 입장을 바꾸어 설명하면 하나의 화살을 꺾는데는 하나의 힘이 필요하다고 할 때 세 개의 화살을 꺾으려면 역시 세 개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하나의 화살을 꺾던 힘으로 한꺼번에 여러개의 화살을 꺾으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예에 지나지 않는다. 화살의 양이 증가한 만큼 화살을 꺾는 힘의 양도 증가해야 한다. 상태나 조건의 변화를 나타내는 예이다.
물(H2O)을 하나 하나 쪼개어 나가다 보면 결국 물분자 하나만 남게 된다. 물 분자 하나를 또 쪼개어 나가다 보면 물이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산소와 수소등의 원소만 남게 된다. 이것도 양질전화의 법칙이라 한다. 하나 하나 물을 쪼개어나가는 과정을 양이라 하고 분자를 쪼갤 때 질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물을 하나 하나 쪼갠다는 것은 의미가 없고 일반에서는 가능하지도 않다. 질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면 새로운 질을 투입하거나 물을 하나 하나 나누지 않고 바로 분자의 분해를 시도하면 된다. 여기서 '하나 하나 쪼개어 나가면'이라는 대목을 말의 함정으로 하여 양의 대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이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혼자서 일을 하면 하루에 10개 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것을 셋이 하면 산술계산적으로 30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인 50개를 생산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도 양질전화의 법칙이 적용되었다고 하는데 즉 조직력의 상승효과를 다룬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 때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에 대해 요즈음 어린이들은 '백짓장도 맞들면 불편하다'라고 되받는다. 작업조건에 따라 작업자를 늘리는 것이 이로울 때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양과 양을 맞추고 질과 질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상부노동조합에서는 하부조직을 확대시키기 위해 미조직 현장에 숙련된 조직가를 투입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는 기대에 부응하는 초보적인 조직을 이루어내게 되었다. '질양의 법칙'이 그럴듯하게 적용되는 예가 될 것이다. 한 명이 투입되어 100이라는 양으로 된 것인데 그 하나의 양이 다른 100의 양을 구성하고 있는 각 개인보다 수준이 높다라는 점에서 질의 차이를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높은 질의 한 사람은 낮은 질의 100사람을 상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양과 질이 따로 떨어져서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사실상 이러한 양질 또는 질양전화의 법칙을 자연에 적용시키면 설명은 더욱 어려워진다. 자연적 존재에 있어서 양이 질로 변하거나 질이 양으로 변하거나 하는 사례는 아예 발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적 존재는 질은 질로 변하고 동시에 양은 양으로 변한다. 그래서 근래의 변증법론자들은 질의 변화를 상태의 변화와 동일한 개념으로 주장하는 부류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상태의 변화를 곧 질의 변화라고 한다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야말로 변증법의 개념은 반개념의 폭군이 되는 것이다.
존재의 양과 질은 동시적이며 통일적이다. 따라서 양과 질은 동시적이자 통일적으로 변화함으로써 상태의 변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만약 양질, 질양 전화의 법칙을 인정한다면, 질과 질, 양과 양의 법칙도 인정해야 하며 소멸의 법칙인 질과 무, 양과 무의 법칙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양질, 질양 전화의 법칙은 이미 특별한 법칙으로서의 의미부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정의 부정법칙에 대하여
대립물 통일과 투쟁의 법칙, 양질-질양 전화의 법칙과 함께 부정의 부정법칙은 유물변증법 3대 법칙 중에 하나이다.
모순 대립하는 사물이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상향적으로 전진적으로 발전해 갈 때 이 발전을 '부정의 부정법칙'이 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소년은 소년을 부정해서 청년이 되고, 청년은 청년을 부정해서 중년이 되고, 중년은 중년을부정해서 노년이 되고, 노년은 노년을 부정해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죽음은 삶을 부정한 것이라고 변증법론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을 부정한 것은 삶이 된다. 이것이 어느 단계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삶이 있을 때에만이 죽음과 싸워 살아있게 되는 것이지 죽은 뒤에 죽음을 부정한다고 해서 삶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변증법론자들 스스로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미 유기체가 분해되어 하나의 질이 다른 질로 전화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노예제 사회는 원시 공산제 사회를 부정하고 생겨났다. 노예제 사회를 부정하고 봉건제 사회가 생겨났다. 다시 봉건제 사회를 부정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생겨났다. 자본주의 사회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사회가 생겨났다. 사회주의를 부정하고 공산주의 사회가 생겨날 것이라고 변증법론자들은 말한다. 그 다음에는 부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역사의 궁극적인 도달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겨울을 부정하고 이루어진 봄은 되돌아서 다시 겨울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봉건제 사회는 다시 노예제 사회로 돌아가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는 다시 봉건제 사회로 돌아가지 않으며,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남미의 칠레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가 되었다가 다시 부정당해 자본주의 사회로 돌아갔다. 그 이전에 고도의 문명을 구가하던 영성적 사회주의 제국인 잉카제국은 유럽인들의 비참한 노예로 억압되고 말았다. 마르크스의 사회역사발전5단계설은 유럽에 맞추어진 세계사로 이것이 변증법의 최대 성과인 사적유물론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부정의 과정으로 설명하게 되면 긍정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가 문제로 된다. 부정이란 긍정과 대립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자식은 부모를 부정하여 세상에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부모가 자식을 긍정하여 태어난 것인가?
낡은 것을 부정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해낸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말이지만 이것을 일면적으로 비약시키면 본래의 의미마저 상실되고 마는 것이 대립개념의 특징이다. 낡은 것에도 종류가 여러가지가 있으며 새로운 것에도 인간과 자연을 파괴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부정의 작용은 곧 다른 것의 긍정에 의한 것이므로 긍정과 부정의 상관적 관계는 통일적이다. 일면적인 부정이 아니라 보다 나은 목적을 긍정하는 입장에서의 장애물에 대한 부정이 보다 의미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진화에 있어서 조차 무차별한 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활동의 요구로부터 불필요한 것은 퇴화하는 것이므로 진화는 곧 퇴화와 통일되어 있다. 여기서 진화를 긍정이라 할때 퇴화는 긍정된 부정이다.
궁극적으로 유물변증법론자들이 목적하는 것은 사회의 혁명적 변화일 것이다. 그래서 유물변증법을 혁명의 무기라고 스스로 공언하는 것이다. 사회발전에 있어서도 모순은 혁명적인 것이라고 표현한다. 미래는 과거와의 혁명적 투쟁을 통해서만이 다가오는 것이라고 변증법론자들은 주장해 왔다. 그런데 근래에 소련당국은 혁명적 모순해결 방식의 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더 나아가 국제관계에서의 계급투쟁에 관한 포기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유물변증법론자들이 기본적으로 표시하고 있던 개량주의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혁명적으로 수정했다. 소련당국은 자신들의 역사교과서마저 전면 개편을 위해 각 학교에서 역사교육을 중단하고 신문스크랩 등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기왕의 소련 공산당사는 노동자계급을 들러리로 한 유물변증법의 대가들인 사상투쟁 전문지식인들을 영웅화한 역사였다. 얼마나 개편될지는 두고 보아야 하지만 변화는 필연적이다. 지금까지 유물변증법론자들이 정리해 놓은 내용 중 많은 것이 이와 마찬가지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다. 얼마 안가서 지금 변증법을 공부한 사람들의 지식들은 쓸모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 그리 멀지 않은 언젠가는 유물변증법 그 자체의 포기선언도 있을만한 일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뱀의 껍질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 상황에 아직도 유용하다. 서양이라는 뱀이 낡은 껍질을 벗겨내고 자신은 다른 껍질을 만들어 낸다. 우둔한 추종자들은 뱀이 벗어놓은 낡은 껍질로 몰려드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자신은 사양길로 접어드는 때가 된다. 혹 그때라도 다시 새로운 진리를 찾아 헤메이다 다시 잡아든 것 역시 서양이라는 뱀이 벗기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낡은 껍질일 수가 있다.
유물변증법을 학습하고 연구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언제까지 자신의 철학을 지켜내는지 주위에서 살펴볼 일이다.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을 형성한 사람이 어느 순간에 반변증법적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유물변증법은 형이상학적 변증법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자기 목적이 상실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의 본래적 가치가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변증법은 여전히 논쟁에서 이기는 기술로서의 위력이 발휘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궤변론자들의 입신이 허용되는 사회가 유지되는 한, 대립물 통일과 투쟁의 법칙, 양질-질양 전화의 법칙과 함께 부정의 부정법칙을 실현하여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변증법이 계속 활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글 : 천지자연의 법 유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