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선, 중화질서에 자진예속함에 따라 하늘제사 금지하다
중국 기자 숭배 속에서 병자호란 이후 단군 부활하다
팔관회, 불교 절간의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 등은 선맥仙脈의 잔영이다
무교巫敎에서도 선맥이어지다
사도세자 아들 정조, 생존위해 성리학 중화질서 지지하다
한편으로 단군과 천부경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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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조선22대 왕 정조(正祖 서기1752-1800). 기울어가는 이조선 22대 왕에 올라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득권 신권에 제압당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학문과 기예면에서 역대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구나 잊혀져가는 선도에도 관심을 많이 둔 것으로 최근 밝혀지고 있다. 그는 단군을 민족사의 시조로 보았다(편집인 말) |
한민족은 단군 이래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왔던 민족이다. 그 전통은 고려시대까지도 팔관회 연등회등으로 변형이 되기는 하였으나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것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조선초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도입하면서 부터다.
성리학 통치 이념에 따라 조선은 천자국이 아닌 명에 속한 제후국이 된다. 여기서 명 제후국인 조선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원칙이 도입이 된다.
이와 같은 것이 조선 초 상황이었다면 양란을 겪은 조선 후기 상황은 어떠했을까? 정경희는 학자로서 첫 출발점이 규장각 연구원이었다. 숙종 영조 정조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정조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정경희는 세가지 흐름에 주목하였다.
첫 번째,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으로 상징되는 성리학 이념 강화이다.
“이처럼 양란 이후 성리학 의리론 강화는 역사인식 면에서 성리학에 기반한 전통론적 역사인식 강화로 드러났고, 그 결과 기자 마한 정통론이 등장하였다. 기자 마한 정통론은 북벌론이나 대명 의리론과도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 곧 기자 마한 정통론에 의하면 중화의 전통은 조선에 이르러 기자 마한을 거쳐 조선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는데 오랑캐인 청淸이 중화의 적통인 명明을 멸망시키고 더 나아가 소중화인 조선까지 유린하였으니 명이 사라진 시점에서 유일하게 남은 중화인 조선이 청을 쳐야 한다는 북벌론 또는 북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조선이 이념적으로 명을 이은 적통이 되어 중화를 계승해야 한다는 대명 의리론이 성립하게 되었다(정경희, 정조의 한국선도 인식과 단군의 위상 제고).”
두번째는 양란 이후 성리학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그 대척점에 있던 고유 선도 사상이 성리학에 대한 대안으로서 주목받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양란 이후 조선전기에 비하여 한국 선도仙道 전통을 강조하는 다수 선도서, 또 성리학서이면서도 선도 전통을 포용한 사서들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한 점은 이러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양란 이후 등장한 선도사서로는 선조대 조여적의 <청학집靑鶴集>, 숙종대 북애자의 <규원사화揆園史話> 및 홍만종의 <해동이적海東異蹟>, 영조대 이의백의 <오계일지집梧溪日誌集> 등이 있다. 청학집에서는 환인을 동방 선맥의 조종으로 설정하고 그 전통이 환웅, 단군, 문박씨, 영랑, 마한, 보덕신녀, 표공, 참시선인, 물계자 등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규원사화>에서는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선도 사상을 강조하고 곳곳에서 유교 사상을 비판하였다. 특히 한국의 선도를 신교로 표현하면서 중국 도교와의 차별성을 극히 강조하였다(정경희, 정조의 한국선도 인식과 단군의 위상 제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난을 겪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국가 통치 이념의 재정립을 통한 국가 재건은 절대 절명의 지상과제였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대해서 당시 지식층은 두가지 극단적인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하나는 노론을 중심으로 기존 성리학 이념을 더 강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는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층들에 의해서 성리학 이외의 다른 곳 대안을 찾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이는 우리 고유의 선도 사상이다.조선 후기 상황을 정경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요컨대 양란을 통한 민족적 각성은 성리학 의리론을 강화하는 방식 또는 고유 선도 전통을 강조하는 방식과 같이 전혀 상반된 방식으로 드러났다. 이중 성리학 의리론을 강화하는 방식은 역사인식 면에서 유교문화 상징인 기자 전통을 강조하는 전통론적 역사 인식 곧 기자 마한 정통론으로 드러났으며, 고유 선도 전통을 강조하는 방식은 단군을 강조하는 역사인식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흐름이 있었다. 당시 지배층 지식층과 별도로 우리 고유 선도 사상을 기억하고 있던 민중들 흐름이다. 정경희는 그 민중들 흐름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고려에서는 중국도교 용어인 성황城隍을 수용하였으나 중국과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곧 한국 마을 수호신이 중국 마을의 수호신과 같을 수는 없었다. 한국 마을에 있는 수호신 곧 산천이나 신사에 모셔진 신이란 한국 고대 이래 선도 전통에서 나온 신 곧 선도성인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이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다. 이규경이 살던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성황당은 선왕당仙王堂으로 불리었으며 마한 소도의 유속으로 이해되었다.
고조선 이후 선도의 본령은 점차 잊혀져 갔지만 선도 제천의례가 국가 공식적인 국중대회로서 남아있던 고려시대 까지는 선도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 이르러 선도전통이 단절되면서, 선도는 민속 무속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도 제천의례의 중심인 삼신 (삼진 三眞) 에 의한 이해도 변질되었다. 삼신은 모든 사람 속에 내재한 원리, 곧 삼진이 아니라 인격신으로 기복의 대상으로 변화하였다. 기복의 대상으로 삼신을 신앙하는 것을 삼신신앙이라 한다. 조선에서는 집집마다 삼신을 모셨는데 삼신단지, 삼신바가지, 삼신자루의 형상으로 모셨다.”
기자 주 : 삼진은 대종교의 경전인 삼일신고에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사람과 만물이 다 같이 삼진三眞(본성(性)과 목숨(命)과 정기(精)을 부여받았으나, 오직 사람만이 지상에 살면서 미혹되어 삼망三妄(마음(心)과 기운(氣)과 몸(身)이 뿌리를 내리고, 이 삼망三妄이 삼진三眞과 서로 작용하여 삼도三途(느낌(感)과 호흡(息)과 촉감(觸))의 변화 작용을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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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강동군 대박산에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존재했던 단군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릉을 발굴하여 부장된 물건을 수습했다. 단군릉도 대규모로 새로 조성하여 부장품들을 안에 안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단군은 우리 선사仙史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편집인 말). |
이 이외에도 조선시대 사찰안에서 불교와 습합된 형태이기는 하나 삼성각, 칠성각, 독성각, 산신각, 제석당 등의 다양한 형태로 우리 고유의 선도 신앙이 민간에 의해서 보존되었다는 것이 정경희의 주장이다.
조선 사회에서 오로지 사람만이 삼진三眞을 받는다는 한 민족 고유의 선도 사상과 중원 천자만이 하늘을 받들 수 있다는 유교 성리학은 애초부터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중들은 비록 흔적이나마 그 맥을 이어갔다.
이것이 정경희가 인식하고 있는 조선 후기 사회이다. 이 안에서 정경희가 바라 본 정조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버지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당시 정조는 어린 소년이었다. 조선국왕 자리를 이을 세손 신분에서 생명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이런 어린 정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할아버지 영조를 계승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극에서 묘사되듯이 어린 시절 정조는 살아남기 위해서 오로지 학문에만 매달려야만 했을 것이다.
영조는 당대 최고 성리학 지식인들로 구성된 조선의 관료들을 상대로 학문적 스승으로서 위치를 유지함으로써 권력 기반을 다졌다. 할아버지 영조가 그러했듯이 정조 역시 그 길을 가야했다. 다른 선택은 없다. 여기에서 정조는 두가지 모습을 보인다.
하나는 할아버지 영조 계승자로서의 모습이다. 명에 대한 의리론에 기초한 소중화 이념 수호자로서 조선 국왕 모습이다. 그러나 동시에 당대 최고 학자로서 정조는 중국과는 다른 조선 역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모습 역시 나타난다.
정경희 연구에 따르면 정조는 명에 대한 의리론을 계승하는 범위 안에서 단군 혹은 하늘에 대해서 국가적인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았다. 정조는 기자 정통론과 성리학 이념에 대한 수호자로서 조선 군주라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단군 고조선 역사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정조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 실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정경희가 주목하고 있는 기록들은 아래와 같다. 먼저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사당인 삼성사와 관련하여 정조가 한 민족 역사에서 단군의 위치에 대해서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있다.
[ 본 사당(삼성당) 의 체모가 숭인전(崇仁殿)과 일반이기는 하지만, 기자(箕子)는 동방으로 와서 임금이 되었고 단군은 요(堯)와 나란히 서서 임금이 되었으니, 맨 먼저 나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운 업적을 상고해 보면 높여 받드는 절차에 있어 기자보다 더욱 존경하는 것이 합당하다. 정조 13년 6월 6일 ]
현대의 한국인들은 홍산 문명의 우하량 여신 사당의 원형 천제단이나, 여타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서 한민족이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조 역시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고고학 자료가 없던 당시에 문헌 자료만을 통해서 올바로 역사를 인식한 것이다. 정조의 학문적인 깊이가 성리학 이외의 여타 학문에도 폭넓고 광범위 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지금의 남단(南壇)은 바로 옛날 교사(郊祀)하던 원구단(圜丘壇)이다. 예(禮)에 사서인(士庶人)은 오사(五祀)에 제사할 수 없고, 대부(大夫)는 사직(社稷)에 제사할 수 없으며, 제후(諸侯)는 천지(天地)에 제사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오직 기(杞)·송(宋)·노(魯)나라만이 제후로서 제사한 것은 혹 대국(大國)의 후손이거나 혹은 원성(元聖)의 공로로 인해서였다. 우리 동방은 나라를 세운 것이 단군(檀君)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역사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쌓아 제천(祭天)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에도 모두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대국에서 분모(分茅) 를 받지 않았고 크게 참람하기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혐의를 구별하고 미세함을 밝히는 뜻이 엄하여 원구단의 예가 혹 소국(小國)에서 감히 지낼 제사가 아니라 하여 세조(世祖) 이후에는 원구단의 호칭을 남단이라 고쳐 일컫게 되었으니, 대개 군국(郡國)·주현(州縣)에서는 각기 풍사(風師)·우사(雨師)에게 제사지내는 제도를 쓴 것이다. 정조 16년 8월 12일 ]
▲중국 하남시 상구시에 있는 기자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이 지역을 답사하여 어렵게 기자묘를 찾아낸 바 있다. 국내 중화사대주의자들은 중국인 기자를 조상으로 삼아 숭배했다. 이를 위해서 역사조작도 서슴치 않았다. 북한 평양에 기자묘까지 만들어 그곳이 중국 사료에 나오는 기자가 중국 주나라 책봉받고 온 곳이라고 선전했다.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에 앞서 중화사대주의 사관이 우리역사를 먼저 파괴한 사례다. 이 덕에 민족사 정통뿌리, 단군은 찬밥신세가 된다(편집인 말). |
정조는 고대 한민족 국가들이 중국으로부터 분모(分茅)된, 즉 제후로서 책봉된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조선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하고 있다. 기자가 아닌 단군을 한 민족의 국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민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민족이라는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원구단圜丘壇의 원圜이 하늘을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 초에 남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던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풍우뇌신제라고 하는 성리학 안에서 허용된 범위 안에서 국가 제천행사의 격을 높임으로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단군 이래 전통을 되살리려 한 것이다. 과연 정조는 우리 고유 사상에 대해서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정경희는 흥미있는 주장을 제기했다. 정경희에 따르면 정조는 천부경을 인지하고 있었고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삼성사에 대한 치제문에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조선 정조 5 년의 신축(1781) 삼성사 치제문에 이르기를 '빛나는 단군께서 我東'에 처음 나시니 덕이 신명에 합하였다. 천지개벽을 누가 능히 열수 있었으리 오직 二聖이 있어 상스러움을 발하시어 크게 明命을 받으셨다. '천부보전(天符寶篆)이 비록 징험할 바 없지만 신성들이 서로 이었고 동사에 칭하는 바이니 세상에 전해진 지 그 몇 해인가(여말 학계와 천부경,정경희 선도문화 6집)]
19세기 성리학자 기정진奇正鎭이 천부경을 연구하였고 기정진이 천부경을 언급할 당시 전비문篆碑文 천부경이라고 칭했다는 것이 후세에 전한다. 이러한 점을 볼 때에 삼성사 치제문에 나오는 천부보전(天符寶篆)을 천부경으로 본 정경희 주장은 타당하다.
삼성사 치제문은 비록 정조가 적은 글은 아니나, 환인, 환웅, 단군을 제사 지내는 삼성사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였던 정조가 주도해서 만든 치제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상에서 정경희 교수 시각으로 정조를 다시 한번 재조명해 보았다.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조선 후기 상황에 대해서 의아해 할지 모르겠다. 당시 통치자였던 정조는 올바르고 뚜렷한 역사 의식이 있었다.
민중들 역시 본능적이긴 하지만 우리 고유 사상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오래 전에 멸망한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거나, 혹은 한반도에 오지도 않은 기자를 국가의 시조로 존숭한다거나 하는 터무니 없고 실익도 없는 이념이 국시가 되는 이런 상황은 어떤 것일까? 하고 말이다.
이 의문에 답하기 전에 정조가 처했던 시대상황과 오늘날 우리들 모습을 한번 대비해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초반부터 자신의 역사관을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했던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이것이 개인 문재인이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이라면 이는 지금 시대가 요청하는 올바른 역사관이다. 우리 독립 운동가들은 혁명가, 투쟁가이면서 동시에 역사가들이기도 했다.
그들이 인식했던 한민족 상고사는 중국과는 독립된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역사이고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정조가 가지고 있던 역사 인식과 부합한다(정경희 교수 선사연구 취재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