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 백공 종사님의 삼일신고(7)
-1994년 부산 전포동 배달학당에서 하신 강의를 녹취한 것입니다-
'자연섭리의 마음'의 움직임으로써 물질로 모두 드러난 것이며, '자연섭리의 마음'의 움직임으로 인해 심(心)·기(氣)·신(身)이 나타난 것입니다.
심·기·신이 나타나기 이전의 '자연섭리의 마음'을 성(性)·명(命)·정(精)으로 표현하신 분이 다름 아닌 태백산 신단수(뽕나무) 아래에서 배달나라를 세우신 한웅 커발한입니다.
심(心)은 성(性)에 의지해 나타났고 기(氣)는 명(命)에 의지해 나타났고 신(身)은 정(精)에 의지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기·신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심·기·신이 사라지고 난 후의 흔적을 우리는 영가(귀신)라고 합니다.
영가의 마음을 영(靈), 영가의 기운을 혼(魂), 영가의 몸을 백(魄)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우리들 심·기·신이 항상 함께하듯 영가의 영·혼·백도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영가의 영·혼·백은 무엇에 의지해 나타난 것일까요?
우리들 심(心)에 의지해 나타난 걳을 영(靈), 기(氣)에 의지해 나타난 것을 혼(魂), 신(身)에 의지해 나타난 것을 백(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그 중음의 세계에서 완전히 떠나면 어떻게 되느냐. 그때는 반의식도 없어요. 근데 많은 사람들은 착각들을 해요. 착각들을 하고 또 그렇게 얘기들을 하고 있고.
떠난 영혼의 의식이 귀신의 세게에서 분명히 존재해서 어느 곳에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가고 싶으면 가고, 절대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들의 영혼이 몸담고 있는 집, 즉 육체를 가진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고귀하고 신비하고 아름다운지를 느껴야 돼요. 그걸 확실히 알아야 되는 거예요. 이거 떠나면, 몸 떠나면 없어요.
자, 그러면 중음의 세계를 떠난 후의 영체는 어떻게 되느냐.
비로소 윤회할 곳을 찾아서 가는 거예요. 근데 여기서 사람들은 또 착각을 해, 윤회할 곳을 찾아가는 그 영체는 그야말로 순수한 마음의 가장 밑불인 무의식만 있어요.
잠재의식도 없고 의식도 없고 그냥 무의식. 그것을 '아뢰아식'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것만이 있는 거라.
그것만이 있는 상태에서, 거기에는 반드시 지금까지 전생,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 공부한 것만 남아있는 거예요.
만약 완전한 깨달음의 세게가 100% 흰 것이라고 한다면 60%만 흰 것도 있겠죠?
물론 실제로는 색깔이 없고 방편 상으로 하는 얘기지만.
맑고 흐림, 예를 들어 60%는 맑고 40%는 흐리다. 그것은 자기가 살아있을 때, 또는 그 전·전·전생을 통해 공부한 업(業)에 의해 결정이 되는 거예요. 맑음과 흐림, 그것만이 남을 뿐인거라.
60% 맑은 영체는 60% 맑은 육신을 찾아가는 거예요. 단 그 영체는 오직 하나가 홀로 존재하며 찾아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비슷한 영체끼리 만나는 거예요. 때로는 둘, 셋, 때로는 넷.
그렇기 때문에 소위 '나'라고 하는 게 없어요. 오직 하나, 자기의 영체가 끊임 없이 계속 윤회한다는 점에서 '나'라고 하는 것이 있지, '나'라고 할 게 없어요.
'나'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그만큼 삶이라는 게 중요한 거예요. 왜?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 얘기했죠? 여성이 가진 그 귀중한 보배, 열 번째 구멍을 통해, 맑은 영체가 들어갈 수 있는 육체를 만드는 거예요. 자신이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삶은 두 가지를 경험하는 거예요. 맑은 영체를 바당들일 수 있는 육체를 만드는 것과 내가 죽고 난 이후에 내 영체가 또 다른 육신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맑은 영체를 만드는 것.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이 두 가지를 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됐을 때, 지금까지 얘기하던 천당, 극락. 어디 있어요? 없는 거예요.
죽은 다음에 그 영체가 들어갈 수 있는 천당, 극락 그거 없어요. 도솔천이니 유리광이니 서방정토니 다 방편이에요. 물론 그 방편이 필요해요. 왜 필요할까요?
공부하는 거 사실상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왜? 공부는 혼자 마음먹기에 달린 거예요. 정말로 한 생각 일으켜가지고 그야말로 대분심(大奮心)을 가지고 하나만 뚫어지게 하면 그 공부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그 열배 이상 어려운거라. 왜? 공부는 여럿이 안해도 혼자하면 돼요, 충분히. 그렇지만 가르칠 때는 대상이 여러 사람이지요?
지금 여기에 앉아계신 분들의 견해가 전부 다 달라요. 근기가 좀 높은 분이 있고 좀 낮은 분이 있고. 얘기할 때 그걸 다 맞출 수가 없는 거예요. 1대1이라면 분명히 다 맞출 수가 있겠죠.
여러 사람을 동시에 상대할 때는 누구에게 맞추느냐. 다 맞출 수 없으니 다만 보편적인 것에 맞춰요. 100명이면 어쩔 수 없이 80명이 가진 그 견해에 맞춰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물론 그래도 홍익도원의 회원들만큼은 강의 내용의 80% 이상은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요.
자, 그럼 할아버지께서는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는 그 천궁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천궁훈
天宮訓
천신국 유천궁 계만선 문만덕
天神國 有天宮 階万善 門万德
일신유거 군령제철 호시
一神攸居 群靈諸哲 護時
대길상 대광명처
大吉祥 大光明處
유 성통공완자 조 영득쾌락
惟 性通功完者 朝 永得快樂
사람들이 죽고 난 다음 저 세상으로 간다 하지요? 불교에서는 극락이라 하고 그독교(개신교·카톨릭)에서는 천당 또는 천국으로 들어간다 합디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배달나라의 시조 커발한 한웅께서는 어떻게 표현했을까'하고 삼일신고 안의 천궁훈을 읽어봤더니 너무나 감탄스러워 한 때는 이 내용이 위서가 아닌가 생각했더랬어요.
6천 년 전에 말씀하셨다는데, 어쩌면 이렇게 허물 하나 없이 완벽하게 정리해 놓으셨는지 고개가 절로절로 흔들어져요. 하기야 6천 년 전의 구름이나 오늘의 구름이나 구름 모습은 다를 게 없지만서도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깊고 깊은 내용들을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소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게요,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사람이 죽고 난 다음의 세상, 즉 사후세계(死後世界)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또 분명하게 말씀을 해 놓으셨어요.
이제 하나하나 실상을 찾아 정리해 봅시다.
천신국 유천궁(天神國 有天宮)
지난 강의 시간, 천훈(天訓)과 신훈(神訓)에 대해 배웠지요? 9천 년 전 진리를 깨달은 우리의 조상이 만법의 근원을 이름하야 「한」이라 했다 하였습니다.
「한」의 몸을 천(天), 허공, 또는 한울이라고 합니다. 「한」의 마음을 신(神), 또는 한얼이라 하고요.
그러나 천(天)과 신(神)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함께 해 있다고 했지요? 다만 역할만 달랐을 뿐이고요.
천(天)과 신(神)을 합해서 천신(天神)이라 하며, 이것을 인격화 시켜 '님'자를 붙여주면 '천신님'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한님', 또는 '하느님', 알라, 부처님, 절대, 순수의식, 참나, 여호와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렇게들 이름 붙여 쓰고 있지요.
다시 여기에 '나라'라는 명칭을 붙여주어 천신국(天神國)이라 하며 우리말로는 「하느님의 나라」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가 하느님의 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우주라고 생각하면 조금 가깝게 느껴지겠네요.
우주(宇宙)라는 글자도 '집 우'와 '집 주'가 합쳐져 있는 것 아닌가요?
모습 있는 집 '우(宇)'와 모습 없는 집 '주(宙)'. 이를테면 천(天)과 신(神)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인 우주 속에 천궁(天宮)이 있따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떤 곳일까요?
계만선(階万善) 문만덕(門万德)
선한 마음을 통하여 만 개의 계단(섬돌)으로 오르게 하였으며 오르고 난 다음에는 만 개의 덕으로 문을 삼았느니라 하셨겠다.
오호라 천지신명이시여, 어찌하여 이렇게 멋진 표현을 하셨나이까? 감개가 무량하나이다.
우선 먼저 만(萬)이라는 숫자가 무슨 의미인지 한 번 짚고 넘어가봅시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부터 익혀온 숫자를 세는 순서 기억하시지요?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억·십억·백억·천억·조·십조·천조·경·십경·백경·천경···.
여기서 기본단위숫자인 만(萬)은 '천만'에서 끝납니다. 만만, 만억, 만조, 만경이라는 기본단위숫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숫자의 가장 큰 표현으로 만(萬)이라는 단위를 썼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가장 높은 기본단위숫자이면서, 끝이 없는 무한대의 표현이 만(萬)이라는 숫자예요.
다시 말해 천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무한대의 계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정해져 있는 계단이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이 계단은 우리들이 발로 딛고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라는 것쯤은 다 알고 계시겠지만요. 우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의식의 지혜로써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아마 사람들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몇 백 계단, 또는 몇 천 계단씩 올라가야 되지만 부지런히 올라가다 보면 더러는 몇 계단 또는 몇 십 계단씩 훌쩍 뛰어넘어 올라가기도 하니까 재미가 있지요.
죽을 때까지 기를 쓰고 올라가도 천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져버리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입니다. 그쯤만 되어도 천만 다행이지요. 계단에 발도 못 올려보고 저 세상으로 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그런데 그 많은 게단을 어떻게 올라가야 되는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선하게 살면서 선한 일을 하라했어요. 우리말로 착한 일.
왜 하필이면 선한 일을 강조햇느냐. 공부하는 사람이 우선 지혜가 밝아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편안해야 되겠지요.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때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내장의 기관들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아요. 독소를 품게 되죠. 그렇게 됐을 때 뇌세포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움직이지를 않아요.
마음이 편안해질 때 우리의 몸 역시 건강해지고 공부도 잘 돼요. 그러면 어떤 때에 마음이 편안해지느냐. 착한 일, 선한 일을 할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착하고 선하게 살라고 강조하셨어요.
그 다음에 문만덕 엄청나게 많은 문을 다 통과해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통과할 수 있느냐. 덕을 쌓으라고 했어요. 덕으로써 그 문들을 통과하라는 거예요.
여기서 덕이라고 하는 것은 베푸는 거예요. 베풀 수 있는 행복은 여러 가지고 있죠. 먼저 행동으로 베풀 수 있죠? 즉 일, 행위. 그 다음에 물질로써 베풀 수 있고.
마지막으로 최상의 베풂은 역시 가르침. 법을 펴는 그 가르침을 통해 베푸는 것이죠.
일단 베풀어야 돼요. 왜? 우리는 혼자 사는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거예요. 혼자 살면 선한 일을 할 필요도, 베풀 필요도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더불어 산다는 거예요.
그러면 베풀 수 있는 한계가 무엇인가. 뭐가 있어야 베풀지. 찾아요. 족ㅁ이라도 베풀면서 찾아야 한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고 욕심을 좀 버리라는 거예요. 그렇게 됐을 때 베풀어지는 거예요.
할아버지께서는 왜 베풀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렇게 베풀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마음이 편안해짐과 동시에 지혜가 밝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계만선 문만덕(階万善 門万德).
일신유거 군령제철 호시 (一神攸居 群靈諸哲 護時)
그렇게 될 때, 일신유거 군령제철. 일신(一神)이라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 즉 성통(性通) 했을 때를 말합니다.
왜 일신이라고 표현했느냐. 자, 눈 떳따고 해서 자기가 신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신과, 신의 세계와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됐을 때 그 신으로부터 나타난 모든 신장들이 지켜주고 보살펴줍니다. 어려운 상황, 고비로부터 보호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