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홉 개의 덩어리를 통해서 만들어진 원이 있죠? 이게 마음이라. 마음의 그림자를 통해서 전부 엮어놓은 거예요.
아홉개의 의식 덩어리가 만든 큰 구멍, 이게 마음인 거예요. 결국은 마음의 그림자인 아홉 개의 단주 알들을 통해 마음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랍니다.
남성과 여성이 가지고 있는 의식의 구조가 어떻게 다른가 하면, 어찌됐든 남성이나 여성이나 마음자리 찾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거예요.
그런데 다른게 뭐냐면, 여성분들은 어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의문을 갖거나 의정을 갖지요? 근데 이게 꾸준하게 잘 이어지지 못해요. 물론 흠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반면에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읫식의 구조는 꾸준하게 이어질 수 있는 이 조건을 가지고 있어요.
그럼 문제가 있딴 말예요. 왜 신께서는 의식 구조를 남성과 여성이 차별 나게 하셨느냐. 사실 이것은 차별이 아닌거예요.
차이일 뿐이지요. 차이와 차별은 같은 듯 하지만 분명히 다른 거예요. 차이와 불평등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남성이 가지고 있는 구멍은 전부 아홉 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여성분들은 하나를 더 가지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이것은 여성이 보편적으로, 의식의 깊숙한 밑바닥까지 꾸준히 몰입할 수 없는 차이를 채워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 100%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메꿀 수 있는 방법을 여성분들의 육체에 부여해주신 걸까요?
이 열 번째 구멍을 보통 완성의 숫자 '열 번째'라고 해서 그냥 '십(씹)구멍'이라고 해요. 다른 거 없어요. 우리말로 '아기집'으로 들어가는 구멍입니다.
그럼 이 열 번째 구멍은 뭐냐.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마음의 구멍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성분들은 이 마음의 구멍을 통해 빨리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접근해야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접근을 해야 되는가. 사실 이런 얘기는,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들이 분명히 알고 배워나가야 할 문제들인 거예요.
여성에게 있어 가장 귀중하고 신비스러운 일이 뭐냐면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거예요. 그 과정이야말로 여성에게 가장 큰 공부가 되는 기회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것이 공부라는 것을 알고 그 과정을 겪는 사람과 모르고 겪는 사람, 이것은 천지차이인 거예요. 알고서 그 과정을 겪을 때 엄청난 공부가 되는 거예요.그런데 모르고서 겪을 땐 그 공부가 안돼요.
알고서 그 과정을 겪을 때 어떻게 되느냐. 일단 임신을 하는 그 순간부터 여성은 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화두가 돼버리는 거라.
만 9개월 열 달의 과정을 거쳐서 진행이 되는데, 이 때부터 여성은 거기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야 돼요. 그렇게 됐을 때, 나중에 출산할 때 가장 편안하게 그대로 받아들이며 출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그 경계를 스스로 느끼는 건데.
사실은 그래요. 그것을 진짜 바로 공부하려면 혼자 출산하고 태 자르는 것까지 다 해야 돼요. 옛날 우리네 할머니들, 어머니들 다 그렇게 했어요. 지금은 그 때에 비하면 너무나 수월하지요.
만약에 공부한 사람이 앞으로 그 과정을 겪는다면 진통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아기가 나오는 순간까지를 지켜보는 거예요.
다른 생각 가지지 않고 계속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거라. 의식의 몰입을 하는 것이지요. 이때에 진통도 사라지고 아주 편안한 거예요.
여성이 마음자리 찾기 위해 공부하는 방법은 열 번째 구멍, 십(씹)구멍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자기의 의식을 총 집중시키는 것이고, 그 때 비로소 최종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따는 것입니다.
지켜보고 있다는 그 의식 하나만 꼭 붙들고 있으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육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고통 가운데 출산의 고통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그 고통의 기억을 뇌 속에서 지워버린다고 해요. 하기야 그래야만 끊임없이 후손들이 이어지지 않을까요?
그런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입이라든가 또 항문이라든가 하는 아홉 개 내지 열 개의 구멍 가운데 범죄를 짓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 되기도 하는 게 바로 이 구멍이에요.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방해의 역할을 하는 원초적인 유혹이 될 수도 있구요.
그러면 이 얘기를 왜 했냐면, 죽고 난 다음에 분명히 귀신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과 생명 탄생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구멍 가운데서 눈이 두 개인 이유는 사물을 보되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측정하기 위해서입니다. 눈이 하나만 있으면 멀고 가까움이 분간이 안돼요.
그 다음에 귀가 두 개인 것은 소리의 방향을 측정하기 위해서. '아, 이 소리는 이쪽에서 나는 소리다, 밑에서 나는 소리다.'. 만약에 귓구멍이 하나면 소리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려요.
사람이 죽은 다음, 그 영혼이 완전히 죽지 않고 잠시 동안 머물러 있는 식(識)의 시간이 있어요. 평범하게 죽은 사람은 한 삼년간 머무릅니다. 이것을 반의식이라고도 하며 기(氣) 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또 굉장히 한을 많이 품었거나 충격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들, 칼에 찔려죽거나 총에 맞아죽거나 차에 치여서 죽거나 물에 빠져 죽거나 하는, 죽는 그 순간에 강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이 귀신이 중음(中陰)의 세계에 아주 오랫동안 머물러요.
그런데 이 귀신이 중음의 세계에서 어떻든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은 안 되는 거예요. 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중음의 세게에서 떠나야 해요.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옛날 할아버지들한테 한밤중에 무서운 곳이나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귀신 만난 얘기 많이 들었죠? 씨름도 하고 싸움도 하고 너무나 실감나게 얘기하시는 거예요. 그거 전부 사실인 거예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 눈과 귀의 구멍을 얘기했었죠. 귀신을 보되 멀고 가까움을 모르는 거라. 어떻게 보면 가깝게 있는 것처럼 보이고 어떻게 보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고.
가깝게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계속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나 잡히지가 않는 거라. 밤새도록 헤매는 거예요. 산 중을 헤매다보면 나무에 긁히고 넘어지고 온 몸이 군데군데 피투성이가 돼있는 거예요.
왜? 귀신이 바로 눈 앞에 아른거리니까요. 근데 멀고 가까움이 사실상 없는 거라. 귀신은 육안으로, 즉 사람의 두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분명히 두 눈으로 귀신이 보이고 멀고 가까움이 확실히 측정이 되는데' 하고 사람이 착각하는 거예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눈으로 본 것처럼 착각하는 거라. 사실은 그게 아닌데.
왜 그러냐 하면 우리들은 늘 '무엇을 본다.'하면 눈으로만 보아왔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머릿골에 그렇게 입력되어 있는 거예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氣)의 현상으로써 보는 거예요. 무섭다고 그냥 손바닥으로 눈을 감아도 보이는 거예요.
그다음 소리 들리는 것. 그것도 방향감각을 잃는 거예요. 어디서 들리는지 몰라요. 감을 못 잡겠는 거라. 그럼 또 그 소리를 쫓아서 밤새도록 헤매는 거라.
소리가 아주 다양하게 들리니까 자기가 가진 두 귀로 듣는 게 아니지만 그런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현사들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느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뇌파, 뇌파에서 일어난 사이클이 있습니다. 이 사이클에 주파수가 있는 거예요. 이를테면 우리가 듣는 라디오에 KBS, MBC의 주파수가 각각 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 주파수의 높고 낮음이 우리들 마음에 의해서 기(氣) 에너지의 파장과 만나는 거예요.
죽은 귀신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그 사이클은 보통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이클보다 약간 한 단계 낮은 거예요. 살아있는 사람들의 주파수가 100이라면 영가들의 주파수는 80이라고 보면 됩니다.
사람이 의식을 통해 무서움을 느낀다거나 또는 몸이 약해질 때, 자연적으로 평상시 가지고 있던 사이클이 낮아져버려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 또는 시골, 어느 곳이든지 귀신의 세계, 그 중음의 현상 세계는 실제라고 착각하기에는 거리가 먼, 기(氣) 에너지 파장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에요.
근데 역시 그것도 '물질 아닌 에너지 현상'이라는 것.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그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는 물질 아닌 물질이라고 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파장과 파동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가지고 잇는 파장과 파동의 뇌 사이클이 있잖아요. 물질 아닌 물질의 세계, 즉 기의 세계에도 역시 있는 거예요.
만약 내 사이클이 낮아진다면 그 때 반드시 접(接), 도킹(docking) 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산 중에서, 이 도시에서, 또는 어디에서든 간에 과연 죽은 그 귀신의 사이클을 내가 접하고자 할 때, 할 수 있는가?
있어요. 충분히 얼마든지. 왜? 만약 그런 세게로 접하고자 한다면 염력, 주력, 또는 기도를 통해서 내가 가진 그 파장, 사이클을 의도적으로 낮춰버리는 거라.
그럼 마음이 약하고 몸도 약한데 밤 중에 그런 곳을 지나야 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진 기(氣)의 사이클과 그것이 안 맞게 할 수 있을까.
몸이 허약하고 마음이 무서워 불안해지면 자연적으로 사이클의 주파수가 80으로 다운되어 귀신과 접하는, 즉 빙의현상이 나타나버리는 거예요.
방법은 있어요. 우선 소리 자체도 하나의 파장과 파동을 갖고 있단 말이에요. 그럼 접할 수 있는 그 파장과 파동을 내게서 발산하는 소리로써 안 맞춰버리는 거라. 물리치거나 흩어지게 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크게 노래를 부르거나 찬송가를 부르거나 염불하거나 독경하거나 아니면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나 낼 수 있는 소리를 크게 지른다거나 하는 거예요. 이 때 자연히 그 사이클과 파장이 안 맞아져버린다는 거라.
또 이런 방법도 있어요. 북을 친다거나 꽹과리를 친다거나. 그런 악기에 의해 나가는 소리 역시 하나의 파장과 파동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살아있는 소리의 파장들이 영가들의 에너지 파장들을 교란시켜버린다는 거예요.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자 할 때는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어디 있느냐. 귀신의 세계, 중음의 세계에서 우리의 영체가 일단 머물렀다 떠난단 말예요. 계속 머물러 있는 게 아니에요. 언젠가는 거기서 떠납니다. 그럼 떠나기 전까지는 어떻게 되고 떠날 때는 어떻게 되느냐.
그 세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반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육체를 가진 인간은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있고 중음의 세계에서는 반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신의 섭리와 질서에 의해, 때로는 제삿날에 찾아올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평소에 몸담고 있던 곳, 즉 자기가 그 몸뚱이의 주인이죠? 그 몸담았던 곳을 배회(徘徊), 원형으로 도는 거예요. 물론 도는 시각은 시공을 초월하지만 계속 맴도는 거예요. 왜? 어떻든 마련이 있기 때문에.
그럼 그 미련을, 귀신, 즉 영혼이 스스로 하느냐, 아니에요. 영가라고 하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것들만이 기운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영가(귀신)의 정체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요. 그래야만 영가(귀신)을 잘못 알고 있는 관념의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근본으로 하여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심(心)·기(氣)·신(身)의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잇다고 제가 틈날 때마다 누누이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여기서 제가 굳이 자연의 섭리를 자꾸 강조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종교적 용어를 쓰게 되면 또 치우치게 될까봐서 입니다.
그래서 신(神)이다, 하느님이다. 천지신명이다, 부처님이다 하는 대용의 표현으로 '자연의 섭리'리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연의 섭리는 모든 생명체들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뚝딱 만든 게 아니라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