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 백공 종사님의 삼일신고 (한밝뫼 제139호에 실린 내용)
-1994년 부산 전포동 배달학당에서 하신 강의를 녹취한 것입니다.-
또 사람이 아주 천박하게 보이고 하는 행동도 역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 씀씀이 상태가 조금 모자라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하는 거예요.
아까 얘기했죠, 성·명·정(性·命·精).
성·명·정을 사람은 완전히 100% 받고 나머지는 80%, 70% 받았다는 그것의 기준을 도대체 어디에 두는가 하는 것이 이제 나옵니다.
진망 대작삼도 왈 감식촉
眞妄 對作三途 曰 感息觸
진(眞)은 우리 인간이 함께 가지고 있는 참된 것.. 삼진(三眞)이라는 것은 성·명·정(性·命·精)을 말합니다.
진망(眞妄). 사람을 아주 삿된 길로 빠지게 할 수 있는 것. 마음을 잘못 쓰면, 마음이 망령돼 있으면...
잠재해 있는 성·명·정과 심·기·신이라는 것이 서로 부딪히는 거예요. 어떻게 부딪히는냐 하면 마음이 항시 두 가지 갈림길에서 결국 헤매는 거예요.
'아, 나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착한 일하고 선한 일해서 성품에 귀의 해야겠다.'
본래 성품에 귀의하면 진리를 깨달은 성인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렇지 않고 자꾸 여러가지 마음들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유혹이 생기는 거죠.
그럼 이 때 갈등이 빚어져요. 그 유혹의 손길이 뭐냐면 사람이 악한 마음을 가질수 있게 하는것. 그게 이제 진망이 서로 부딪히는 거예요.
부딪치는 그 갈등은 대(對), 대하여. 작삼도(作三途), 세가지 길로 가는데.
여기서 도(途)라고 하는 것은 길입니다. 보통 우리가 '도'자 하면 '길 도(道)'자 쓰죠. 그런데 여기서는 '도(途)' 이건데. 이건 어떤 것이냐면 행위, 쉽게 얘기해서 이 '도(道)'자는 형이상학적인 표현이고 '도(途)' 이건 형이하학적인 표현, 길 입니다.
행위를 통해서 가는 길을 이 '도(途)'자로 썼어요. 그런데 그 길이 세가지인 거예요. 그걸 삼도(三途)라고 표현한 거라.
삼도가 무엇이냐 하면 '이름하야 감식촉感息觸'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통해서는 감(感), 기운을 통해서는 식(息), 몸뚱이를 통해서는 촉(觸), 이 세가지는 우리 인간 속에 항시 함께 해있는 것이죠. 이것이 삼도라는 큰 길 입니다.
마음을 통해서 느껴지는 것, 기운을 통해서 호흡하는 것, 그리고 몸뚱이를 통해서 접촉하는 것. 이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 구조의 역할이에요.
감·식·촉(感·息·觸), 심·기·신(心·氣·身)이것을 완벽하게 써놓은 부분은 모든 경 가운데 삼일신고 밖에 없어요. 불경에도 없고 도덕경에도 없고 성경에도 없고 코란에도 없고...오직 삼일신고에만 이렇게 정확하게 나온 거예요.
전성십팔경 감 희구애노탐염
轉成十八境 感 喜懼哀怒貪厭
전성(轉成), 이것은 이 세개가 서로 뒤엉키는 거예요. 감과 식과 촉이 뒤엉킵니다. 엉키되 경계가 몇 경계나. 열여덟 경계인 거예요. 아까 얘기했죠? 성·명·정을 '사람은 온전하게 받고 만물은 치우치게 받는다' 할 때 온전하게 받는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이 여기 나옵니다.
심(心)에서 나오는 경계가 여섯 가지, 기(氣)에서 나오는 경계가 여섯 가지, 신(身)에서 나오는 경계가 여섯 가지. 전부 열여덟 경계... 그럼 제일 처음에 마음. 마음을 통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느껴지는 느낌의 상태가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뭐냐. 한문으로 희구애노탐염(喜懼哀怒貪厭).
희(喜), 기뻐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구(懼)라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 공포심. 애(哀)는 슬퍼하는 것, 노(怒)는 성내는 것이죠. 탐(貪)은 탐내는 것, 염(厭)은 싫어하는 것... 기뻐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성내고 탐내고 싫어하고. 마음을 통해서 이 여섯 가지 느낌을 갖추었들 때 비로소 성품을 100% 완전하게 갖췄다고 표현하는 거라. 기준이 이겁니다.
사람의 바로 밑 단계, 유인원이라 할 수 있겠지요.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며 먹을 거리를 찾아 사냥도 하고, 물고기도 잡고, 움막도 짓고, 의사표현으로 손진·발짓·몸짓·소리도 낼 수 있었지만 언어와 문자가 없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유인원과에서는 현생 인류와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원시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발전하는 속도가 있을 수 없었어요.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가능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크로마뇽인, 네안데르탈인, 베이징원인 모두 유인원과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유인원들이 진화해서 현생 인류의 시작인 호모사피엔스가 되었느냐하면 그것도 아닌 거예요. 호모사피엔스는 완전히 창조된 우리 인간들의 조상인 것이죠.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으로부터 20만 년에서 30만 년전, 그 사이로 보면 될 거예요.
이 부분만큼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큰 이견이 없는 것 같아요. 단, 유인원에서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쉽지만 말입니다.
역시 유인원과의 모든 종류도 창조되었고요. 이 우주에서 새로운 종(種)은 모두 창조되었다고 봐야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시대적으로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새로운 종(種)이 자연발생적으로 창조된다는 것입니다. 굳이 진화라는 말을 꼭 써야한다면 전체적인 통째로의 진화, 발전이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볼까요?
우리가 살고있는 주택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아주 옛날 원시시대 때는 집도 없이 적당한 동굴에서 살다가 시간이 흘러 나뭇가지나 풀잎으로 엮은 움막집에서 살았겠지요. 그러다가 흙과 나무를 섞어 토담집으로, 토담집에서 다시 나무를 정교하게 깍아 만든 목조 건물로 시멘트를 발견하고 난 다음의 다용도 건축물은 거의 대부분 시멘트 공법으로 만들어졌어요. H빔과 시멘트의 합작으로 모든 대형 건물을 만드는 것이 요즘의 세계적인 추세라고 봐야겠지요.
또 앞으로 어떠한 공법의 집 짓는 신상품 건축자재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죠. 어쩌면 플라스틱에 특수 열처리를 한 무쇠보다 더 강도 높은 제품을 만들어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움막집이 진화되어 흙집이 되고, 흙집이 진화되어 목조 건물이 되고, 목조 건물이 진화되어 시멘트 건축물이 되고, 시멘트 건축물이 진화되어 H빔 건축물이 된 게 아니잖아요. 그러나 전체적인 통째로를 보면 진화, 발전했다고 얘기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라고 하는 종(種)도 창조되었고 유인원 종류도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유인원 밑 단계에 있는 생명체가 고릴라과 입니다. 오랑우탄, 고릴라, 침팬지, 긴팔원숭이 등등이에요. 고릴라과는 유인원보다는 지능이 낮고, 서서 다니기도 하고 네 발로 기어 다니기도 하면서 꼬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긴팔원숭이는 원숭이와 비슷해서 긴팔원숭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원숭이과가 아닌 고릴라과예요. 꼬리가 없고, 서서 다니기도 하고 네 발로 기어 다니기도 하는 고릴라과입니다. 고릴라과 밑 단계가 원숭이과예요. 네 발로 다니면서 고릴라과보다는 한 단계 지능이 낮은 편이지요. 그러나 원숭이과에서부터 손이라 불리는 기능을 갖게 되었어요. 그 바로 밑 단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개, 고양이, 호랑이, 곰, 소, 돼지, 말, 염소 등 네 발 달린 짐승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각기 다른 종(種)들은 모두 자연발생적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닭이 진화되어 오리가 되고, 오리가 진화되어 염소가 되고, 염소가 진화되어 소가 되고... 이런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할 때, 일번적으로 알고 있는 개체윤회는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뻔한 사실이잖아요.
생명체를 크게 나누면 식물, 동물,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배운 서양학문에서는 사람도 동물로 포함시켜 분류하는데 사람은 그냥 사람입니다. 물고기에서부터 곤충, 조류(새), 짐승, 원숭이과, 고릴라과, 유인원과까지는 동물로 분류하고 사람은 따로 사람으로 분류해야 하는 거예요. 아마도 이러한 원리를 과학적 학문으로 증명하고 정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50~60년쯤은 걸릴 거예요.
우리 옛날에 어렸을 때 그런 얘기 들었죠? 애기 낳으면 엉덩이 부분에 원숭이 꼬리 빠진 자국이 있다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된 것이 결코 아니란 거예요. 사람이 생겨나기 이전까지는 원숭이과나, 고릴라과, 유인원과가 죽고 난 다음의 그 영혼이 가장 높은 치원의 영혼이었겠죠?
결국 태초에 바닷물 속에서 사람의 몸뚱이가 만들어졌을 때 그 성명정이 그 사람의 몸뚱이 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몸뚱이가 진화된 것이 아니라 영성이 통째로 진화, 발전된 거예요. 분명히 사람은 사람의 몸뚱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원숭이는 원숭이고..
그러면 여기에 나와있는 희구애노탐염(喜懼哀怒貪厭) - 기뻐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성내고 탐내고 싫어하고 - 심·기·신을 성·명·정으로 돌이키는 이것을 원숭이가 완벽하게 할 수 있느냐? 못한다는 거예요.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은 아주 미미하게 하는 것이 있을 거예요. 자꾸 괴롭힌다면 좀 싫어하겠죠. 자꾸 도망가고... 그런데 이 여섯 가지의 느낌을 과연 인간 바로 이전 최고 수준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유인원이 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답은 아니라는 거죠.
만약에 그 정도 된다고 하면 사람이 100이라고 하면 아마 85라든가 90, 그 정도 되겠죠. 거의 완벽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 곧 올라서기 위한 마지막 동물의 단계겠네요.
지금 여기서는 기뻐하고 두려워하고 성내고... 인간에게 있어 이 모든 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싫어해서는 안돼요.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악한 사람이 없는 거라. 누구나 다 본래부터 그 순수한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가만히 보면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싫어했다가 좋아했다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거예요. 가지고 있는 감정이 너무 노출돼 버리는 것이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분수라는 게 있는데 사람마다 그 분수가 달라요. 제일 현명하게 잘 사는 사람이 자기 분수 아는 사람이에요. 그 분수에 맞게 사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에요. 너무 욕심내지도 않고 너무 태만하지도 않고.. 그런데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욕심내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그건 탐심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다음에 공포,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단 말이예요. 자기 자신이 불안한 거라. 뭔가 잘못돼 있다는 거예요. 죄를 지었거나 아니면 속였가나 어떻든 불안한 거죠.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장 높은 차원에 가기 위해서는 길이 있는데, 그 길로 가는데 제일 방해되는 것들이 여섯가지라는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일 처음이에요. 거뻐하는 것. 기뻐하는 것도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살다보면 기뻐해야 할 일들이 있겠죠. 그런데 기뻐해야 할 일이 영원히 기뻐해야 할 일인가. 거기에 너무 도취되어가지고 기(氣)가 상해버리는 거예요. 너무 기뻐해도 기운이 상해버리는 거죠. 그러면 그만큼 크게 기뻐했던 일이 시간과 환경에 따라서 어느 틈엔가 모양이 바뀌어져버려요. 정말로 자기가 좋아하고 기뻐하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닐 때는 상대적으로 더 큰 슬픔이 생겨버리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큰 기쁨이 있어도 적당히 자제할 줄 알아야 해요. 왜? 그 기쁨이 영원한 기쁨이 아니기 때문에...영원한 기쁨이라 착각을 하고서 너무 도취됐을 때는 언젠가는 상대적으로 또 잃어버리는 것들이 그만큼 닥친다는 거예요.
기뻐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성내고 탐내고 싫어하고... 마음을 통해서 가장 먼저 다스려야하는 감정들의 기본 구조입니다. 먼저 마음을 통해서 이 여섯 가지를 다스리면서 생활해나가야만 결국 언젠가 가장 복 받을 수 있는 최종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