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 백공 종사님의 삼일신고(21)
-1994년 부산 전포동 배달학당에서 하신 강의를 녹취한 것입니다.-
선방에서 화두참선법이라고 해서 '화두를 든다'고 하는데 정확히 표현하면 그건 화두가 아니라 '공안(公案)을 챙긴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대체적으로 선방이나 보살선방, 그리고 일반 불교 수행자들이 가장 많이 들고 있는 공안은 아마 '이 뭣고'일 거예요. '1700 공안'이라고 하는 것을 따로 제켜놓는다 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뭣고'라는 공안을 제대로 챙겨들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이곳 학당에도 별의 별 사람들이 많이 오잖아요. 그 중에서 잉런 분들도 있어요.
'이 뭣고'를 '이 뭣고, 이 뭣고...' 이런 식으로 소리 내지 않고 속으로만 계속 반복해 되내면서 집중하고 있는 거예요.
일종의 문자공안법이라고 해야 할까요? 공안 챙기는 법 중에서 가장 낮은 단계라고 보면 됩니다. 하기야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그 다음 단계가 아마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방법일 거예요.
"눈에 보이는 저것이 뭣고? 귀에 들리는 저 소리는 뭣고? 향기를 내는 저 꽃은 뭣고? 맛을 보니 느껴지는 이것은 뭣고?"
이 방법도 결코 옳은 방법이라고는 볼 수 없어요. 이미 답이 나와버렸잖아요.
눈에 보이는 책상은 책상이고 자동차는 자동차고요. 귀에 들리는 노랫소리에는 가사가 있고 곡조도 있고, 향기를 맡는 꽃이라든가, 음식이라든가, 맛을 느기는 고춧가루.꿀.커피 등등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이미 모습이 갖춰진 상태로써 더이상 답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왜? 이미 내 안에서 답을 만들어 놓았으니 말예요. 시간낭비 하지 마세요. 우리 몸은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는 게 아니고 때가 되면 모두 다 이 공간을 떠난단 말입니다.
더러 수행자들이 답답해서 자기합리화 하려고 금생에 못하면 내생에서 열심히 하면 안 되느냐 하는데요. 내생? 미안하지만 없습니다. 오늘 당장 살기도 바쁘고 힘든데 내생까지 뭐한다고 신경써서 생각합니까?
물론 내생을 믿고 그에 걸맞게 착하게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방편 상으로 아주 좋은 현상이긴 합니다만.
마지막으로 '이 뭣고' 공안을 잘 챙겨 제법 깊이 있게 들어갔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도 그 중 제일 괜찮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조금 전 하고는 정반대가 되는 셈인데요. 아까는 보고 듣고 맛보고 향기를 맡는 대상이 상대적으로 밖에 있었고 지금은 내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하는 이 놈이 뭣고?" 하면서 내면에 집중하는 거예요. 사실 집중이라는 것보다는 그냥 챙긴다고 하면 될거예요.
끊임없이 내 안의 실체가 없는 그 무엇을 들여다보면서 더러는 보이지 않는 그 실체를 마음이라고 정하고,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공안타파의 최상승법이라고는 볼 수가 없어요.
'이 뭣고'의 '이'라는 곳에 마음을 정해놓으면, 간절한 의정이 일어나지 않는 무미건조한 공안 챙김법이 되어버립니다.
최상승법이라는 것은 '이 뭣고'의 '이'라는 곳에 나의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간절함이 절실히 하나의 점으로써 몰입되어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정리를 한 번 해봅시다. 6천 년 전, 배달나라의 시조 커발한 한웅께서는 심.기.신(心.氣.身 일체 모든 만유)이 허망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심(心).기(氣).신(身)이라는 것은 꼭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한정해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우주 일체의 모든 것을 심(心).기(氣).신(身)으로 표현하신 거예요. 여기에는 천.지.인, 그리고 인간의 의식까지도 다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허망하다고 하신 거예요. 허망하다고 해서 없다(無)는 것은 아닙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맛을 알고 만져보는 이 모든 것들이 왜 없다는 거예요? 분명히 있긴 있지만 실체가 없기 때문에 허망하다고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왜 실체가 없는 걸까요?
만법의 근원,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자리인 「한」에서 드러난 일체의 우주 만물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고 잠시도 머무름이 없어 무어라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아(無我), 무상(無常)이라 하며 무주(無主)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석가모니가 탄생하기 3천 년 전에 인류 최초로 커발한 한웅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뭣고'의 공안을 챙길 때 '이'라는 곳에 '커발한 한웅께서 일체의 모든 것은 허망한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러한 것들은 도대체 뭐야?' 하는 간절함이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꽉 차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머리 싸매고 집중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간절함의 극치를 단전 위에 살짝 올려놓으세요. 거위의 가슴 깃털 하나가 가볍게 얹어지듯이 말입니다. 이쯤 되면 큰 병폐는 없어요.
그런데 여러 문자로 된 '1700 공안'이나 큰 스님한테 받은 공안을 들고 문자 푼다고, 화두 든다고 거기 매달려 끙끙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측은하기 짝이 없어요.
이렇게 임의로 챙기는 공안 수행법은 최소한 중철(中哲) 정도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다면 진정한 화두는 무엇일까요? 어떻든 간에 자기 근기에 따라 무슨 방법이든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본인 스스로에 의해 의정의 화두가 챙겨져 나와 하나가 되어요.
그 때, '놓고 듦'이 없는 진정한 화두가 되는 거예요. 임의대로 챙긴 공안과는 근본 자체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육체적인 병은, 고장난 뇌가 어디 한두 군데인가. 사람들이 가방에 가지고 다니는 약이 위장약, 두봉약, 서너 가지는 돼요. 그걸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지금 선방이 운영되는 방법이 어떻든 잘못돼 있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어요.
언젠가는 변화가 있겠죠. 어떤 변화? 할아버지의 말씀이 그래도 이 세상에 조금이나마 바람의 물결을 타고 여기저기 흩어져 씨앗으로 심어질 때, 역시 선방에서도 어떠한 변화가 있을 거예요.
즉, 공부는 세 가지를 겸하는 거예요. 이 세가지의 방법은 반드시 따로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겸하는 거예요.
자, 아까 하철(下哲). 하철이 이 하는 방법의 공부가 있었죠? 몸뚱이 위주로 하는 것.
그런 몸뚱이 위주로 공부할 때 기(氣)적인 면과 마음이 완전히 무시해버리느냐. 아닌 거예요. 간접적인 지원을 받아야 돼요.
그거 무시해버리고서 어떻게 공부가 되나요? 무시하려야 할 수가 없는 거란 말이에요. 왜? 세 가지는 항상 톱니바퀴가 굴러가듯 계속 같이 엮여서 같이 가기 때문에.
단, '어느 것을 위주로 먼저 하느냐'에요.
몸뚱이 위주로 먼저 하느냐, 호흡과 기(氣)적인 방법을 위주로 먼저 하느냐, 아니면 마음 위주로 먼저 하느냐.
마음 위주로 한다고 해서 기(氣)라든가 몸뚱이 무시해버리는 거, 그거 안 되는 거예요. 적게나마 간접적인 지원을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선악(善惡)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사람이 만든 거란 말이에요.
이를테면 제가 지금 완전히 까만 옷을 입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여기에 조그맣게 하얀 물감이 묻었을 때는 사실상 이 하얀 물감은 내 까만 옷에 방해되는 것, 즉 이물질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오물이란 거죠.
그 다음에 내가 하얀 옷을 입었다고 했을 때 묻은 이 까만 것 역시 이물질이자 오물 이고.
색을 놓고 볼 때 '하얀색은 밝은 색이고 까만색은 어두운 색이다, 하얀색은 좋고 까만색은 나쁘다.' 이런 건 전부 관념이라는 거예요.
까만 옷에 하얀색이 묻었을 때는 그 하얀색이 때인 거고 하얀 옷에 까만색이 묻었을 땐 그 하얀색이 때인 거예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선이라 생각했던 것이 ㅡ 물론 선악(善惡)의 기준 자체를 잘못 잡았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생기는 것이지만 ㅡ 결국 보면 악이 되고 악이라 생각했던 것이 결국 보면 선이 되고.
결국 선악(善惡)이라는 그 개념은 인간에게서 주관적으로 형성된 것이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맹자(孟子)가 말하는 성선설(性善說)과 순자(荀子)가 말하는 성악설(性惡說)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느냐고 묻기도 할 것입니다.
순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래의 성(性)이 악하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서만이 선해질 수 있다고 얘기한 반면, 맹자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본성을 지켜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악을 멀리해야한다고 말했지요.
결국 두 사람은 선(善)을 강조하기 위해 사람들의 심리를 여러 각도로 두들기고 다독거렸떤 거예요. 그 당시 시대적인 정치 상황도 고려했겠지요.
누가 옳고 누가 틀리고 할게 없습니다. 손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한 사람은 손등을 끊임없이 말했고 또 한 사람은 손바닥을 자세하게 말한 것과 마찬가지에요. 선과 악을 동시에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순자나 맹자의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善)을 이야기할 때, 때로는 상대가 아닌 절대의 자리에 올려놓기도 했어요. '선과 악'이라는 상대적 개념이 아닌 뜻으로 말이에요. 그러고보면 두 사람 모두 본성의 자리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커발한 한웅꼐서는 조금 달리 표현을 하셨지요.
인간의 본성은 선악이 없는 투명한 것이라 했어요. 그러면서 선을 행하라고 하셨어요. 왜 그랬을까요? 이 문제는 각자 스스로 참구하여 실마리를 풀어보세요.
여기서 상철(上哲), 즉 인간을 놓고서 평가할 때 그래도 '가장 훌륭한 사람이다, 존경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을 얘기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뜻해요.
진리를 깨달았을 때 모든 것에 대해 상대적인 개념이 무너져버리는 거예요. '이것이다, 저것이다. 옳다, 그르다. 선과 악', 이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는 거라.
왜? 본래 그러한 것들이 없는 근본 자리로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그러면 결국 인간을 평가하는 제일 기본적인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여기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인간으로써의 최고 경지에 가장 가까운 사람.'.
그것은 상철(上哲), 즉 성품을 통(通)한 사람. 성품을 통(通)한다는 것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 인간의 평가는 그 분들에게 기준을 둬야한다는 거예요.
즉 '어떤 사람이 가장 상철(上哲)에 가까웠느냐.'. 인간의 평가는 다른 거 아니고 오직 이것입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많고 명예를 많이 얻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깨달은 경지, 진리에 얼마만큼 가까웠냐는 것.
인간을 그 기준으로 평가되는 세상이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겠죠. 지금 계속 발전돼 가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진리훈(眞理訓) 가운데 핵심만 말씀드렸고 구체적인 것은 다음 시간에 얘기하겠습니다.
반진(返眞) 일신(一神)
그래야만 반진(返眞)하야, 참된 것으로 돌아와서. 일신(一神), 즉 신과 하나가 된다고 했어요.
지금 오늘, 각자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봐야 돼요. '아,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경 가운데 하철.중철.상철(下哲.中哲.上哲)이 나오는데 내가 지금 공부할 단계는 어디구나.'.
본인도 스스로 느껴질 거예요. '지금의 나는 그 중 어느 기준을 위주로 하고 그 나머지 부분은 조금 보완을 하면서, 간접적인 지원을 하면서 공부 해야겠구나.'
몸뚱이냐, 아니면 일단 기(氣) 다스림이냐, 아니면 마음이냐. 물론 세 가지 다 해당이 되겠죠.
그러나 '내가 가장 먼저 우선적으로 치중해야 할 부분이 어느 부분인가.' 그것은 본인 스스로 알 겁니다.
본인 스스로 알았을 때, 그 다음에는 뭐가 필요해요? 실천이 필요하잖아요. 알고 나서 멍청하게 있으면 그거 안 되잖아요.
아마 이러한 공부하는 방법이라든가, 그 사람의 능력이나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앞으로 구체적으로 많이 나올 것입니다.
삼일신고 강의가 앞으로 두 번 남았는데 끝나고 나면 '인간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공부할 겁니다.
완전히 해부해버리는 거예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될 때 '아!'하고 뭔가가 새삼스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해부하기 위해서 도대체 몇 번이나 강의를 해야 되느냐. 한 다섯 번은 해야 돼요.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게나 복잡하게 구성 되었어요.
자, 오늘은 진리훈(眞理訓)의 기본적인 핵심만 강의했습니다.
1. 天訓 - 하늘에 대한 가르침
2. 神訓 - 신에 대한 가르침
3. 天宮訓 - 천궁에 대한 가르침
4. 世界訓 - 세상에 대한 가르침
5. 眞理訓 - 진리에 대한 가르침
오늘은 이제 삼일신고 일곱 번째 강의입니다. 진리훈(眞理訓) 두 번째 시간이죠? 첫 장을 보면,
'유중(惟衆)은 미지(迷地)에 삼망(三忘)이 착근(着根)하니 왈(曰) 심(心)과 기(氣)와 신(身)이라. 심(心)은 의성(依性)하야 유선악(有善惡)하니 선복악화(善福惡禍)하고 기(氣)는 의명(依命)하야 유청탁(有淸濁)하니 청수탁요(淸壽濁夭)하고 신(身)은 의정(依精)하야 유후박(有厚薄)하니 후귀박천(厚貴薄賤)하니라.'.
오늘 강의 들어가기 전에, 지난번에 했던 것의 핵심 한 가지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되겠죠?
성.명.정(性.命.精)이라고 하는 것. 즉 성(性)이라는 것은 성품, 명(命)이라는 것은 숨 쉬는 것, 정(精)은 정기, 성.명.정 이 세 가지는 항시 머리에 기억을 해두시라는 거예요.
지난 강의 중에 '인물(人物) 동수삼진(同受三眞) 왈(曰) 성명정(性命精)'이라는 구절이 있었어요. 사람과 모든 만물이 성.명.정(性.命.精)을 다 함께 같이 받았는데....
'인전지(人全之) 물편지(物偏之)'라고 분명히 얘기했죠? 사람은 온전하게 받고 나머지 모든 것은 치우치게 받는다. 무엇을? 성.명.정을.
이제 그것을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태초에 만물이 하나도 안 생겨났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그 때 이 성.명.정의 기운이 전부 있긴 있되 공(空)입니다. 있긴 있는 상태에서 공(空)인 거예요.
이 성.명.정(性.命.精)에 의해서 ㅡ 물론 이것은 한, 즉 하느님에 의해서 나온 것입니다 ㅡ 결국 모든 만물이 차츰차츰 생겼단 말이에요.
지난번에 분명히 순서를 말씀드렸죠? 식물, 물고기, 곤충, 새, 동물, 인간. 이게 생겨진 순서입니다.
그럼 여기서 사람의 성.명.정은 전부 100입니다. 식물은 한 10정도, 물고기는 30, 그 다음에 곤충은 50, 새는 70, 동물은 80.
이렇게 모든 생명들이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성.명.정의 기운도 점점 농도가 짙어지는 거예요.
사람은 완전하게 100.100.100을 받은 거예요. 나머지는 뭐 80도 있고 70도 있고. 물론 예를 들어 곤충 가운데 어떤 것은 정(精)이 50이라면 어떤 것은 성(性)이 한 40되고 어떤 것은 명(命)이 한 10정도 되고 하는 조금의 차이는 있겠죠?
그러면 이 기준을 어디에다 둘까요? 어떤 것을 기준으로 두고서 식물은 성.명.정이 한 10 밖에 안 되고 동물은 한 80이고 사람은 100인가? 그것이 오늘 강의할 대목에 나옵니다.
지금 이 우주에는 성.명.정의 기운이 꽉 차있는 거예요. 없는 곳이 없어요. 그냥 꽉 차있습니다.
유중 미지 삼망 착근(惟衆 迷地 三妄 着根)
유중미지(惟衆迷地)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첫 번째는 현대과학에서 얘기하는 빅뱅이라는 우주대폭발 이후의 우주만물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용어로 오온(吳蘊)이라 하며 색(色).수(受).상(相).행(行)식(識)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드러난 우주만물 가운데 모양이 있거나 없거나, 이름 지어진 모든 존재는 존재 그 자체로 하나의 몸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몸 안에는 마음이 잇고 잠시도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운행되고 있는 기운이, 즉 심.기.신(心.氣.身)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더 보탠다면 인식되지 않은 세계와 인식되는 세계를 모두 포함한 것이에요.
두 번째로는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 범위에 국한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가깝게 인식되는 세상이라 봐야겠지요. 유중미지(惟衆迷地)와 오온(五蘊) 모두 똑같이 그렇게들 말하고 있잖아요.
다시 말해 유중(惟衆)은 인간의 무리들, 오온(五蘊)의 색(色)은 인간의 몸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삼일신고 여기서는 두 번째를 택했다고 보면 됩니다.
유중(惟衆), 오직 사람들, 여기 중(衆)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미지(迷地)의 삼망(三妄)이 착근(着根)하니. 여기서 미지(迷地)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고 난 이후에 두 정자와 난자가 최초로 만나게 되죠? 그리고 자궁벽에 자리를 잡습니다.
만나고 난 이후 100일간 무럭무럭 자라서 100일째 되는 날에는 사람의 구조가, 그러니까 눈, 코, 입, 귀의 모든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물론 완벽하게 만들어지진 않지만 거의 다 만들어져요.
100일째 되는 날부터는 여러 가지 어떤 감각이라든가 정신적인 면이 가지고 있는 ㅡ 아주 작지만 깊이 깔려있는 ㅡ 무의식, 그런 것들이 다 개발된 상태예요.
그래서 태교라는 것은, 아무리 늦게 시작하더라도 최소한 임신 3개월 이상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야 해요. 결국 그때부터 태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는 거예요.
미지(迷地)라는 것은 이때부터 미혹한 땅이라는 거예요. 임신을 하고 100일 이후부터가 여기서 말하는 '미혹한 땅'이에요.
그럼 온전한 땅은 뭐냐면 엄마 뱃속에서 나와 태양을 보고, 이 지구에 발을 딛는 것을 말해요.
미혹한 땅일 때부터 무엇이 생겼느냐면 삼망(三妄). 삼망이 착근(着根)하니. 그때부터 거기에 비로소 세 가지의 망령된 것이 자리를 잡는다 했어요.
이 망(妄)이라는 표현에 대해 우리가 좀 더 깊게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생각해요.
망(妄)과 무(無)는 완전히 다릅니다. 무(無)는 그냥 없다고 표현하면 되지만 망(忘)은 그렇지가 않아요.
망(妄)의 원뜻은, 「있긴 있지만 실체가 없어 허망하다」입니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망(妄)이며 심.기.신이 모두 망(妄)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체의 모든 것들이 성.명.정을 무슨 말로 표현했을까요? 질량과 에너지로 표현했어요.
질량은 정(精)이고 에너지는 명(命)입니다. 다시 말해 정(精)을 질량으로 표현했고 명(命)을 에너지로 얘기했다는 것이지요.
우주대폭발이라는 빅뱅 이전의 허공에는 질량과 에너지로 가득 찼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고....
그런데 왜 성(性)은 현대 과학에서 표현 못했지요? 가장 중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표현할 수가 없지요. 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듯이 말예요.
그러니 6천 년 전에 커발한 한웅이 성.명.정을 심.기.신의 본성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감히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살고 있는 땅덩어리 위에서 인류 최초로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게 너무나 신비롭지 않으세요? 우리들 핏줄의 조상이 말입니다.
하기야, 백 년 전이나 천 년 전이나 만 년 전이나 가슴의 눈을 뜨고 보면 다 똑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별로 신기할 것도,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네요.
왈 심기신(曰 心氣身)
뿌리를 내리는 세 가지 망령된 것이 뭐냐면, 왈(曰) 심(心)과 기(氣)와 신(身)이라 했는데...
사람이 정상적이고, 가장 깊이 있고, 바른 길로 가려하는 데 방해되는 것을 삼망(三妄)이라 하죠?
망(妄)자는 '망할 망'자예요. 근데 잘 보면 '계집 녀(女)'가 들어있어요. 이게 어떻게 보면 잘못된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잘된 것 같고.... 글자가 그렇게 됐네요.
공부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그 중 첫 번째가 우선 이 망(妄)자의 '녀(女)'를 여자가 공부할 때는 '남(男)'으로 바꿔도 되겠네요. 즉, 욕정(慾精). 그것을 마(魔)라고 하는데, 소위 색마(色魔)라고 하지요.
두 번째는 잠. 잠자는 게 결국 공부하는데 많은 방해가 됩니다. 잠은 완전히 버릇인 거예요. 어떻게 습관들이냐에 달려있어요.
사람이 하루에 보통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만 충분히 숙면을 취해주면 절대로 활동하는데 문제가 안 되는데 보통 여덟 시간, 그냥 시시때때로 자버리는 거예요.
세 번째가 먹는 것, 식마(食魔).
그래서 색마(色魔), 수마(睡魔), 식마(食魔), 이 세 가지를 항상 조심해야 되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대체 어떤 것이 사람을 망조, 망령 들게 하느냐. 그 근본적인 것이 무엇이냐. 도대체 뭐가 뿌리를 박고 붙었느냐.
그게 왈(曰), 이름하야. 심(心)과 기(氣)와 신(身)이라 그랬어요. 마음과 기운, 그 다음에 몸뚱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이겁니다. 뭐냐면 심.기.신이에요.
자, 지금 여기 앉아계시는 분들 전부 각기 몸이 있죠? 모두 성.명.정이 100퍼센트씩 다 들어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다 들어있어요.
그럼 육체를 가지고 계신 것은 분명하고, 그런가하면 마음이라는 것이 또 들어있어요. 그 다음에 이제 소위 목숨이라고 하는 것이 있고.
그런데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사람에게 만들어졌는가.
미지(迷地), 미혹한 땅, 즉 임신 100일째 되는 날부터 태아에게는 성품과 정기와 또 숨을 쉬고 있는 것도 분명하죠? 그때부터 마음이라는 것이 정착되는 거예요. 뿌리를 박게 되죠.
심의성 유선악 선복악화(心依性 有善惡 善福惡禍)
기의명 유청탁 청수탁요(氣依命 有淸濁 淸壽濁夭)
신의정 유후박 후귀박천(身依精 有厚薄 厚貴薄賤)
뿌리를 박게 될 때 그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서, 무엇에 의지해서 나왔는가. 결국 성품을 통해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나온 거예요.
그렇지만 일반 사람들은 마음이란 용어에 대해서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흔히들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일체유심조(一切惟心造). 그것을 말하며,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려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일체(日切)는 마음먹기 달려있기도 하고 마음먹기 달려있지 않기도 하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고 정해놓아 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사실 이 이야기의 '일체유심조'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은 본성(本性)이라는 본마음에 의해 지어(造)내고 또 거둬들인다는 의미로 써야 됩니다.
'유심조' 속의 마음은 절대 자리.본성.본마음.청정각성.본각.한.하느님.알라.야웨.도(道) 등으로 써지고 이해되어야 하는 거예요.
또한 '마음은 여여해, 마음은 오고감이 없어.'하는 표현도 우리들 마음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본마음의 자리를 표현한 거예요. 제발 헷갈리지 마세요.
천만다행히 마음을 가장 알기 쉽게, 적나라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말씀해 놓은 것은 삼일신고의 진리훈 밖에 없어요
그것도 군더더기 하나 없는 완전한 논리의 삼일(3.1)철학으로 말입니다.
심(心).기(氣).신(身), 이 원리를 어느 누가 얘기할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