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신은 없다'고 하는 무신론(無神論)자 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무신론을 강조하는 대부분이 유물론(唯物論)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초에 우주는 지극히 작은 미세한 원소로 가득 차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물질이며 태초부터 그런 것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유물론 사상가들은 신을 부정하면서, 사람이 생각을 하는 것도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뇌기능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각 그 자체도. 뇌기능은 물질로서 이루어졌으며 사람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데 있어서 그것의 가장 기본이 '뇌세포'라는 거죠. 즉 뇌세포는 물질로 되어있다고 하는 것. 사람들이 '마음, 마음' 얘기하지만 마음을 어떻게 얘기하고 어떻게 볼 수 있느냐.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적인 것이다. '가고싶다, 먹고싶다, 보고싶다' 하는 마음을 내고 생각하는 것은 전부 뇌세포의 작용에 의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 그 자체도 결국 물질이 하는 것이고 태초 역시 아주 작은 물질이 구성원으로서 존재했다···. 무신론자들은 이렇게 얘기하며 신을 부정해요. 또 한편에는 소위 유기론(唯氣論)자들이 있어요. 즉 뭐냐면, 물질이 생겨날 수 있는 기(氣)라는 것이 있다. 태초에 신도 없었고 그 기(氣)만이 그냥 꽉 찼었다. 그것에 의해 모든 만물이 생겨났고 결국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유물론도 마찬가지고 유기론도 마찬가지고 전부 한쪽으로만 치우친 생각들이에요. 그럼 신(神)이라는 것이 도대체 있나 없나 질문을 할 때, 사실상 그렇습니다. '있다 없다'라는 말이 신에게는 성립이 안 되는 얘기예요. 왜? '있다 없다'는 소위 유(有)와 무(無)인데, 이것은 상대적인 거예요. 이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은 반드시 상대성(相對性)의 성질을 갖고 있죠.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이든 아니면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의식의 세계든 반드시 상대성의 관계가 있는 거라. 그 관계를 음과 양으로 표현하고 유와 무로 표현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성인 거예요. 그럼 신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상대성의 관계에 속하는가. 아닙니다. 신은 그냥 절대(?對)인 거예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절대인 겁니다. 신이 있다고 표현하면 분명히 상댖덕으로 없을 때도 있다는 거예요. 없는 곳도 있다는 거죠 그러나 신은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그래서 '있다 없다'라는 그 말이 성립이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이 우주 자체를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가정할 때, 편의상 '신이 존재한다' 그렇게 표현할 뿐인 거예요. 그럼 가장 바른 방법의 표현은 무엇인가. 그래서 '공(空)'이라는 말로 표현이 된 거라. '있고 없음'을 여읜 자리. 뭐라고 할 게 없는 그 자리. 공이란 말로 표현된 거예요.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19세기에 이런 일이 있었죠. 유럽의 대철학자인데 독일 사람입니다. 니체라고 하는 사람인데 아마 니체 이후의 심리학자, 소설가, 시인, 철학자, 과학자들은 그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을 겁니다. 그만큼 19세기 유럽에서 대철인으로 인정받았던 사람이죠. 이 때 유럽에서는 그야말로 정신적인 대혼란이 생겼어요. 이 정신적인 대혼란이 생긴 틈을 타서 사실상 좋은 점도 있었고 나쁜 점도 있었던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고 의지했는데 니체가 그 마음을 하루아침에 몽땅 잘라버린 거예요. 그러니 너무나 허무했겠죠. 그 허무한 마음을 어떻게 달랠까.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은 주로 문화와 예술, 조각이라든가 음악·미술·스포츠 그런 분야에 집중하며 그 허무한 마음들을 채워나갔어요. 이를테면 집중 투자를 했다고 봐야겠지요?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일종의 타락 비슷하게 마시고 놀고 춤추며 그 허무한 마음을 관능적으로 달랬어요. 당시 사회적으로 혼란한 환경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역사적으로 평가해봅시다. 상류층에서 일어났던 그 현상 속에서 많은 문화적인 발전을 찾아볼 수 있고, 하층 계급 속에서도 춤이나 놀이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입장에서 찾을 수 있는 정말로 귀한 것들을 많이 발견했어요. 그럼 그 사람은 도대체 왜 신은 죽었다고 표현했는가. 니체는 어떻든 무수한 세월을 통해 공부하고 나서 신의 정체를 인지한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을 통해 확인한 것은 아니고 인지를 한 거라. 이론적으로 신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한 거죠. 그런데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전부 산에 대해서 착각을 하고 있더란 거예요. 착각을 하게 된 가장 주된 원인은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창세기의 내용 때문인 거예요. 창세기를 살펴보면, 6일 동안 천지창조의 역사가 끝나고 창세기 1장 26절부터의 내용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게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온갖 가축과 들짐승과 땅 위에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땅의 흙으로 사람의 모습을 지으시고,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형상을 닮은 신(神)이 저 까마득한 하늘 위에 앉아서 모든 걸 다 내려다보고 계신다고 믿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한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착각을 뒤흔들어놓아 의식의 혁명을 일으켜보자는 생각으로 니체는 방편삼아 당신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신은 죽었다'고 외친 겁니다. 결국 신은 뭐냐고 하면, 재무상일위(在無上一位). 그냥 우주에 태초부터, 본래부터 있었던 것. 여기까지는 이미 얘기했죠? 신재무상일위(神在無上一位). 신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있었다. 이것을 확실하게 인정해야 돼요. 그런데 어떻게 있었는가. 지금부터 나옵니다. 유대덕 대혜 대력(有大德 大慧 大力) 하사. 큰 덕, 고이. 덕이라는 말이 옛날 우리말로 고이입니다. 큰 고이와 큰 슬기와 큰 힘을 가졌다 그랬어요. 태초에 세 가지를 같이 가지고 있었다고 할아버지께서 분명하게 얘기했어요.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느냐,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그걸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럼 도대체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 여기 삼일신고 신훈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은 항시 같이 있습니다. 따로따로가 아니라. 그냥 같이 우주에 꽉 차있는 거예요. 그런데 신훈에 나와 있지 않지만 저 큰 덕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게 여섯 개의 구조로 되어있어요. 역시 마찬가지로 큰 슬기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도 여섯 개가 있어요. 또 큰 힘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가 여섯 개 있어요. 이것들 역시 본래부터 있는 거예요. 큰 덕을 둘러싸고 있는 여섯 개의 구조, 큰 슬기를 둘러싸고 있는 여섯 개의 구조, 큰 힘을 둘러싸고 있는 여섯 개의 구조. 이것이 지금 우주 속에 그대로 존재하는 거예요. 왜? 태초부터 있었기 때문에 그냥 우주 속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큰 덕을 통해 무엇이 만들어졌는가. 사람으로 표현할 때 그 큰 덕을 통해서 창조하는 능력이 생겼어요. 그 다음에 큰 슬기를 통해 생겨난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지혜. 지혜를 발할 수 있는 기운이 생긴 거예요. 그 다음, 큰 힘을 통해 모든 만물의 몸뚱이에서 씀씀이가 생겼어요. 즉, 창조의 근본 자리는 대덕이고 우리들의 기운과 지혜의 근본 자리는 대혜고 몸뚱이의 근본 자리는 대력인 거예요. 그런데 각기 그 중요한 것을 둘러싸고 있는 여섯 개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뭔가? 신훈에는 사실상 안 나와 있어요. 얼마 전에 신문에 이런 게 실렸습니다. 노벨 물리학상감이라고 발표가 하나 나왔어요. 쿼크(quark)라고 하는, 물질의 가장 최소입자. 그것을 연구한 내용을 이제 곧 발표할 것이라고 신문에 나왔어요. 지금이야 쿼크라는 것을 발견했지만 오랜 옛날에는 분자까지 밖에 발견 못한 거라. 그 다음엔 원자. 그 다음, 원자핵과 전자. 그 다음에 양성자와 중성자. 결국 그것들에 의해 쿼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동시에 지금으로서는 물질이 생겨날 수 있는 가장 작은 입자라는 거라. 이 쿼크는 여섯 개의 구조로 돼있어요, 그 동안에 과학자들이 다섯 개는 발견했지만 마지막 하나는 밝히지 못했단 말예요. 그런데 이번에 그게 밝혀진 거예요. *물리학자들은 쿼크의 구조를 3개의 쌍으로 분류했다. (up/down, charm/strange, top/bottom) 그 중 가장 발견하기 어려웠던 top 쿼크는 이론적으로 예측된 지 20년 만인 1995년에 발견되었다. 그러면 가운데 있는 쿼크의 중심으로 그걸 둘러싸고 있는 여섯 개의 구조가 이번에 일단 다 밝혀진 거예요. 신문에 나온 '이번에 밝혀진 쿼크'라고 하는 것이 맨 마지막에 발견된 쿼크인데 그것이 과연 물질이 생겨날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입자인가. 사실 또 아니라. 다만 지금 과학의 수준으로 그 정도 발견했을 뿐이에요.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되냐면 몇 십 년이 지난 다음, 각각의 쿼크는 두 개로 되어있다는 것이 또 밝혀질 거예요. 몇 백 년 후에는 그 두개로 된 각기 상대성을 갖고 있는 쿼크가 있겠죠. 음과 양. 그럼 양이 가지고 있는 작은 쿼크도 여섯 개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또 밝혀질 거예요. 그 다음에 또 다른 상대적인 음의 쿼크도 여섯 개의 구조로 되어있다고 하는 것 역시 밝혀질 거예요. 그때쯤 되면 물질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 아마 밝혀질 겁니다. 소위 기(氣). 기라고하는 것이 결국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지금은 기에 대해서는 그냥 캄캄한 밤 중에 더듬는 정도인 거예요. 왜? 아직까지 물질에 대해서도 이렇게 캄캄한데. 신(神)을 통해서 나타난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하면 결국 단계별로 있는 거예요. 제일 처음에 유물론(唯物論)이 정립되고 그 다음에 유기론(唯氣論), 마지막 유신론(有神論). 세 개가 완전히 정립이 됐을 때 마침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 이화세계(理化世界)가 건설되는 거예요, 그것은 오직 하나이며 하나만 알면 모든 의문은 풀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대부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계의 수준은 어디까지인가. 물질계. 물질계에서도 지금 약 80% 정도 점검한 상태라. 아직까지 물질에 대해서도 다 파악을 못했다는 거예요. 근데 기(氣)적인 것에 대해서 언제 어떻게 파악을 해요? 물질을 통해 나타난 현상보다 기에 의해 생겨난 현상이 더 많고 기에 의해 생겨난 현상보다도 더 많은 것이 마음. 마음의 장난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 더 많은 거예요. 모든 물질이 지금 현재 다 마찬가지예요. 가장 원초적인 기본구조는 전부 여섯 개로 되어있고 극 모양은 '원·방·각'이라는 것. 어떤 것은 동그랗고 어떤 것은 세모나고 어떤 것은 네모나고. 모양의 기본구조는 원방각이고 모양의 숫자는 여섯 개의 구조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신훈에는 안 나와 있지만 앞으로 공부하게 될 「진리훈」편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섯 개의 중심, 그것은 분명히 신훈에 나타나 있죠. 대덕·대혜·대력.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모든 만물이 다 나온 거라. 자, 모든 만물이 나올 때 반드시 그것의 근본적인 것이 있어야 되잖아요. 우리가 빵을 만든다, 수제비를 해 먹는다 하면 재료가 있어야 되잖아요. 밀가루. 밀가루를 튀기든 오븐에 굽든. 반드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은 근본적인 재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럼 근본적인 그 재료는 뭐냐? 신이라는 거예요. 신은 대덕·대혜·대력 세 가지의 작용이 함께했다고 하는 것. 그걸 통해서 나온 모든 만물이, 대덕을 통해 창조의 에너지가 나오고 대혜를 통해 교화의 에너지가 나오고 대력을 통해 치화의 에너지가 나오는 거예요. 우리말로 '고이'라고 하는 대덕. '덕'이라는 말을 지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 덕, 그것과 여기서 나오는 대덕과는 전부 무관한 것인가 하면 안 그래요. 다 연관성이 있는 거예요. 이를테면 덕이라는 말을 가장 핵심 깊게 표현하고 있는 문구가 사서삼경 중의 「대학」이라는 책 첫 장에 나옵나다.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명명덕(在明明德)하고 재친민(在親民)하며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이니라. 명명덕(明明德). 「대학」은 분명히 경(經)인데, 경의 첫 장에 나오는 덕은 일반 사람들이 해석하는 덕과는 다른 거예요. 거기에 나오는 덕은 '깨우침'을 통해 펴는 그 상태. 그게 덕인 거예요. 그냥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하는 덕이 아니라. 베푸는 것 가운데서 최고 높은 경지의 베풂. 그게 바로 덕이라고 하는 거라. 깨우침을 통하지 않고서는 최고의 경지인 그 덕을 절대로 베풀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명명덕(明明德)이라 한 거예요. 명이 연달아 두 번 나오죠? 깨우침의 경지인 그 진리, 그것을 밝혀 본래 밝은 덕을 밝게 펴는 것. '본래 밝은 덕'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애기하는 거예요. 진리를 깨치고 난 다음, 그것으로 하여금 얻은 그 경지를 펴는게 덕인 거예요. 덕을 얻고 덕을 펴는 것이 바로 명명덕입니다.
그렇게 될 때 신훈의 대덕과 반드시 연관이 있습니다. 왜? 깨달음이라는 것은 '마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머리 가지고서 깨닫는게 아니에요.
그럼 마음이라는 것이 뭐냐. 근본적인 대덕. 즉, 본 마음인 "한"에 의해 마음이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했잖아요.
사실 공자님이 "대학"이라든가 "사서삼경"을 직접 쓰신게 아니에요. 이미 중국에는 그 당시 좋은 책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어요. 그 좋은 책들이 전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책들이에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다학", "도덕경" 또는 "중용" 같은 것을 가만히 읽어보면 그 근원이 천부경, 삼일신고예요. 지금까지 할아버지께서 대덕,대혜,대력을 강조하셨다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다음에 생천(生天), '하늘을 내신다' 그랬어요. 그런데 '생천(生天)'하면 좀 이상하죠? 지난번 강의 때 분명 하늘은 본래부터 있는 거라고 했는데, 시공(時空)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지 어디서 나온게 아니라 했단 말이에요.
근데 지금은 또 생천(生天)이라 한단 말이에요. 여기서 '생천(生天)'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늘을 따로 만든 것이 아니고 하늘 안에 있는,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법칙은 하느님의 그 신령한 마음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법칙은 즉 섭리죠. 하느님을 통해서 나무를 만들었다. 그럼 나무가 만들어지기 이전엔 최초의 씨앗이 있겠죠. 씨앗을 통해 자라고 꽃이 피고하는 이 모든 것들. 하늘 안에 있는 모든 법칙.
그 법칙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모든 만물은 생,성,멸(生,盛,滅)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모든 만물은 반드시 생겨나면 성장을 하고 언젠가는 없어지는 것이 법칙이다. 이것이 하늘의 법칙인 거예요.
근데 요즘 보면 그 하늘의 법칙마저 무시해 버리고 '사람의 육신이 영생할 수 있다'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죽지도 않고 영원히 살면 그 지겨워서 어떻게 살아, 정말로.
즉 여기서 생천(生天)이라는 것은 하늘 안에 있는 법칙을 하느님께서 이미 능력을 통해 만드셨다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주무수세계(主無數世界)하시고. 여기에 '무'가 또 나오죠. 우리가 쓰고 있는 엾을 무(無)와는 조금 다른데 역시 발해시대에 사용했던 '없을 무'자 입니다. 여기서는 '주(主)'를 '차지하시고'라고 해석했는데 그것보다는 주관하시고, 하느님께서 모든 만물을 다 만드시고. 그 모든 만물은 무수(無數). 셈으로 헤아릴수 없을 만큼 무궁무진하게 많다. 모든 만물을 헤아려서 센다면 지금 현재 지구에 살고있는 수십억의 인구가 죽을 때까지 일렬로 서서 세도 다 못셀거예요.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몇 백년, 몇 천년 동안 세도 다 셀수 없을 거예요. 너무너무 많잖아요. 무궁무진하잖아요.
그렇게 수없이 많은 것들을 만드시고 또 직접 다 주관하고 계시는 거라.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어느 것은 조금 더 봐주고 어느 것은 덜 봐주고 하는 것 없이 그냥 똑같이, 똑같은 마음으로 하느님께서는 주관하고 계신거예요.
조신신물(造甡甡物) 조(造)는 만들 조. 신(甡)은 '굉장히 많다'는 것. 날 생(生)이 두 개 쓰이죠. 그 많고 많은 물건들을 나드셨나니.
섬진무루(纖塵無漏) 섬(纖)은 '섬유(纖維)' 할 때 섬이죠. 가늘 섬. 실처럼 가늘다. 진(塵)은 티끌 진, 먼지 진. 루(漏)는 구멍. 섬진무루(纖塵無漏). 티끌만치도 빠진 것이 없다고 표현한 거예요.
예를 들어 목욕탕 가서 아니면 방에서 한번 옷을 다 벗고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세요. 많이도 필요 없어요. 단 한 시간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유심히 관찰을 해보세요.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겉 표면이겠죠. 안에 것은 그냥 놔두고 머리카락 하나에서부터 눈썹, 또 눈을 덮고 있는 속눈썹. 이것도 수련과정으로 생각하면 돼요. 다른거 하지 않고 그냥 계속 거울만 보면서 하나하나 뜯어보는 거예요. 손도 자세히 쳐다보고 손톱도 쳐다보고. 이 인체의 모든 구조를 보면, 이건 사실 너무너무 신비로운 거라. 그야말로 하나도 빠뜨리신게 없잖아요. 모자람이 없잖아.
지구에 살고 있는 수십억이 넘는 인구의 지문과 얼굴 생김새가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 어쩌면 그렇게 신의 능력을 통해서 참 기가 막히게 너무나도 완벽하게 만드셨는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는 거죠. 그것을 할아버지께서는 '섬진무루'라고 표현하셨어요.
밝고도 영영하여, 소소영영(昭昭靈靈). 소소(昭昭)는 군데군데, 모든 곳곳.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신령 령(靈)'이 있죠? 이 때는 지금 쓰는 것과는 다른 발해시대의 '신령 령'을 썼습니다. 소소영영(昭昭靈靈). 밝고도 너무나 신령스럽게 하나하나 만드셨다는 것.
불감명량(不敢名量) 감히 이름 하나 헤아리 수가 없다. 불감(不敢), 감히 할 수 없다. 감(敢)은 '감히, 구태여 감'자. 명량(名量). 어떻게 감히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애기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창조하신 만물을 지켜주시고, 주관하시는 그러한 힘, 능력. 그 신령스러운 것을 우리 인간은 감히,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어찌 이러쿵저러쿵 애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까지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거예요.
신훈(神訓)을 보면 전체의 표현이 둘로 나눠져 있어요. 지금 불감명량(不敢名量)까지 애기했죠? 여기까지는 신 그 자체와 신의 능력을 표현한 거예요.
지금부터는 어떻게 하면 인간이 그 신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신을 볼 것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의 방법으로 할아버지께서 우선 간단하게나마 핵심을 말씀하였어요.
성기원도(聲氣願禱)면 절친견(絶親見)이니라.
그런데 이 대목을 가지고 지금 하계, 또는 도계에서는 두 가지로 표현해요. 첫번째는 성기원도(聲氣願禱), 음성이나 어떤 그 기운을 통해 하느님을 대하고 보려하는 것은 안된다. 절(絶)은 끊을 절.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아니다, 소리나 음성이나 어떤 기운을 통해서 간절히 하느님을 보고자 한다면 절대로 신을 볼 수 있다. 그럼 도대체 어느 것이 맞는가. 절친견(絶親見) 할 때 절(絶)을 절대라는 뜻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절교'처럼 끊는다는 뜻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그야말로 상극입니다. 극과 극인 거예요.
분명히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실 때는 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후세의 사람들이 둘로 표현하니 하나는 맞고 하나는 정반대의 말이 되는 거라. 그럼 이렇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혼돈을 겪는단 말이에요. 사람들이 짓는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진리를 잘못 전달해서 사람을 우매하게 만드는 거예요. 왜? 우매하기 때문에 강도질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여러가지 안좋은 일을 저지르는 거예요. 진리와 멀어졌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이지 지혜가 밝고 진리와 가까워져 봐요. 절대 그런 일이 안 생겨요.
그래서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사람을 우매하게 만드는 것. 바로 그거예요. 특히 일반적인 상식보다는 진리를 표현하고자 할 때 잘못 전달해서 사람을 완전히 무지몽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이것이 그야말로 가장 큰 죄입니다.
약이색견아, 만일 어떤 모양에 집착해서 도를 구하거나 이음성구아, 음성을 구함으로 도를 구한다면 반드시 시인행사도, 사도에 빠지니라. 불능견여래, 진리를 볼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즉, 이 내용과 똑같은 내용이 이미 금강경이 나오기 수천년 전에 삼일신고에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성기원도(聲氣願禱) 절친견(絶親見). 금강경의 내용을 축소해서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냥 '성기원도 절친견'인 거예요.
27장이면 거의 금강경 마지막 부분입니다. 끝 쯤되는데 저걸 얼마나 강조했는지 몰라요. 너무너무 강조를 많이 하셨어요. 그럼 금강경 속에 있는 내용이 틀렸나 하면 분명히 맞아요. 저 내용은 확실하게 맞는 거예요.
그럼 많은 사람들이 '성기원도 절친견'의 내용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고 했는데, 한 가지는 맞고 한 가지는 틀렸겠죠? 답은 방금 분명하게 나왔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모양(色)까지 표현한 거예요. '무슨 부처님 무슨 부처님'하는 그 '모양'에 집착해 도를 구해서는 안된다 했습니다.
다음으로 어떤 그 소리. 사람들이 소리(聲)로써 그 무엇을 구하려고 많이들 하죠. 교회에서도, 절에서도 그런 행위들이 너무 많아요. 가장 많이 하는게 주문 외우는 것. 주문 열심히 외우면 도(道)로 통한다는 거예요.
한 예로 새벽 서너시쯤 서울의 산에 올라가 보면 온갖 큰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요. 앞으로 전도사 될 사람들, 목사 될 사람들, 그냥 나오는대로 씨부리는 거예요. 기도한다고..
계속 그렇게 해야만 성령의 힘을 얻어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애기해요.
그러다가 어떻게 돼서 소위 헛소리, 방언. 그게 일종의 정신착란인데 방언을 하면 그것을 능력으로 인정해줘요. '아, 저 사람은 성령의 힘을 얻어 하느님을 봤구나'하고 인정해요. 그런 형태들이 너무너무 많아.
즉 사람을 우매하게 만들죠. 그러니 소리를 내는 기도를 통해서 뭘 얻고자 하는 그거 안된다고 하는 거라. 그거 끊어라. 끊어야 하느님을 볼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다.
성(聲) 다음에 기(氣)가 나오죠. 여기서 말하는 '기'는 기운을 애기하는 거예요. 특히 요즘 보면 기공을 많이 강조하죠. 기도를 하다보면, 수련을 하다보면 육체적인 진동이 많이 생깁니다.
그 진동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 차원이 다르고 방법이 다른 것인데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진동만 하면 '굉장한 경지에 올랐으니 조금만 더 하면 또 다른 진동을 얻게 되고 바로 도를 통하게 된다' 그렇게 말하는데 그건 전혀 맞지 않는 얘깁니다.
앉아서 수련 할 때 이상한 소리가 들리다거나 하는 어떤 색다른 그 기운. 근데 사실 '이상한 소리' 할 때 그 소리는 소리가 아니란 말이에요. 기운의 한 색깔이지, 귀로서 듣는 소리가 아닌 거예요.
그 다음에 또 여러가지 헛것이 보이는 거예요. 물론 그것이 눈에 보이는게 아니에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의 작용을 통해서 듣거나 보는 거예요. 그건 수련을 통해서 듣거나 보는 거예요. 그건 수련을 통해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지, 그걸로 어떻게 도를 깨닫고 하느님을 볼 수 있어요?
그 다음 빙의되고 접신되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것이 기운에 의해 생긴다고 했어요. 커발한 한웅께서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을 볼 수 없다 했어요. 다시말해 진리의 눈을 떠서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원도(願禱). 타협적인 방법을 통해 열심히 간절하게 기도해서 도를 깨달으려 한단 말이에요. 그러한 방법으로는 절대 도를 깨달을 수 없고 하느님을 못 보니 절(絶), 끊으라 했어요. '절'은 '절대'의 뜻이 아닌 '끊는다'는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이 말씀을 육천년 전에 하셨어요. 불교가 나온 것은 지금으로 부터 많이 잡아봐야 삼천년 밖에 안되는데 할아버지께서는 그 이전에 이미 확실하게 말씀을 하신 거예요. 어떤 소리를 내거나 기운, 또는 기도하는 방법으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러한 방법들이 때로는 필요한 거예요. 사실상..
절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방법들을 통해서는 빨리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그건 아닌거라. 필요에 따라서는 해야 돼요. 그러한 방법들에 너무 집착해서 '아, 이 방법만이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고집해서는 안되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