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有戶氏)의 명을 받아 천자(天子) 순(舜)을 죽인 우(禹)는, 명령을 수행한 결과에 대하여 유호씨의 명(命)을 받아 공(功)을 정리하지 아니하고서 군사들만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나 우(禹)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에 우(禹)는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干)와 창(戈)을 보수하여 유호씨에게 항거하고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며 반역(反逆)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우(禹)의 반역(反逆)과 유호씨(有戶氏)의 유시(諭示)]
결국 서기전2224년 우(禹)가 단군조선을 배반하고 도산(塗山)에 단(壇)을 설치하여 서남(西南) 제족(諸族)을 쳐서 제후(諸侯)라 하여 도산에 모으고 조공을 받았다. 이러한 행위는 서기전2357년에 배달나라의 질서를 반역하여 당(唐)을 세운 요(堯)의 전철(前轍)을 그대로 밟은 것이었다.
도산(塗山)은 요순(堯舜)의 9년 대홍수를 위한 치수문제(治水問題)로 단군조선의 태자부루가 회의(會議)를 주관(主管)하여 우(禹)에게 치수법(治水法)을 전수(傳授)하여 준 곳이다. 여기에 우(禹)가 하(夏)나라의 첫 수도(首都)를 정한 것이다.
우(禹)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마음대로 제후(諸侯)를 봉하고 조공(朝貢)을 받는 것은 단군조선의 제도(制度)를 본 받은 것이나 폭돌(暴突)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천하(天下)가 시끄러워졌으며, 단군조선 직할영역으로 도망하여 오는 자가 많았다. 이에 우(禹)는 물길과 육지의 길을 차단하여 내왕하지 못하게 하였다.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는 묘예(苗裔)를 수습하고, 소부(巢夫)와 허유(許由)가 사는 곳과 통하면서, 서남(西南) 제족(諸族)과 연락하여 세력을 모으니 읍(邑)을 이루었다.
곧 유호씨는 권사(權士)를 선발하여 참칭(僭稱) 하왕(夏王) 우(禹)에게 보내어, 제왕참칭(帝王僭稱), 오행망설(五行妄說), 역제반란(曆制反亂) 등 요(堯)의 세가지 죄(罪)를 들어 유시(諭示)하였다.
1. 제왕(帝王) 참칭(僭稱)의 죄(罪)
“요(堯)는 천수(天數)를 잘못 알았다. 땅을 나누어 함부로 천지(天地)를 제 멋대로 하고, 기회를 틈타 독단(獨壇)을 차려, 사람을 몰아내고서 사사로이 개나 양을 기르고, 자칭 제왕(帝王)이라 하며 혼자서 처리하니, 이에 인간세상은 침묵하여 흙과 돌과 풀과 나무처럼 말이 없고, 하늘의 도리는 거꾸로 거슬러 허망(虛妄)에 빠져 버렸다.
이는 거짓으로 하늘의 권세(權勢)를 도둑질하여 사욕(私慾)의 횡포를 자행한 것이다. 제왕(帝王)이 만약 천권(天權)을 대행(代行)하는 것이라면, 역시 능히 일월(日月)을 개폐(開閉)할 수 있어야 하며, 만물(萬物)을 조작(造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제왕(帝王)이란 수(數)의 요체(要諦)이며 사람이 거짓으로 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으로 칭하면, 한낱 사기와 허망의 사악한 꾸민 놀이일 뿐이다. 사람의 일이란, 이치를 증거하는 것이며, 인간세상의 일은 그 이치를 증거하는 사람의 일을 밝히는 것이니, 이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도(符都)의 법(法)은 천수(天數)의 이치를 명확히 증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래의 업무를 수행하게 하고, 그 본래의 복(福)을 받게 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말하는 자와 듣는 자는 비록 먼저와 뒤 즉 선후(先後)가 있으나 높고 낮음이 없으며,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비록 친숙함과 생소함이 있을지나 끌어 들이거나 몰아내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해(四海)가 평등(平等)하며 제족(諸族)이 자행(自行)하는 것이다. 오직 오미(五味)의 죄책을 보속(補贖)하는 것과 마고대성(麻姑大城)의 업(業)을 회복하는 것은 언제나 한 사람의 희생(犧牲)으로 주관(主管)하는 것이며, 여러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일은 예로부터 인간세상의 일과 섞이지 아니하였으니, 황궁씨(黃穹氏)와 유인씨(有因氏)의 역사가 바로 이것이다.”
2. 오행망설(五行妄說)의 죄(罪)
“또, 그 소위 오행(五行)이라는 것은, 천수(天數)의 이치에 아직 그러한 법이 없다. 방위의 5중(中)이라는 것은 교차의 뜻이며, 변행(變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하는 것은 1부터 9까지이므로, 5라는 것은 언제나 중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9가 윤회(輪回)하여 율려(律呂)가 서로 조화(調和)된 연후에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기수(基數)를 말하는 것이며, 그 5와 7의 크게 이루는 고리(環)에 이르면, 그 자리가 5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4와 7이 있는 것이다.
또, 그 순행 및 역행과 생성과 소멸의 윤멱(輪冪)은 4이지 5가 아니다. 즉 원래의 수인 9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윤멱이 한번 끝나는 간격은 2와 8 사이의 7이며 5가 아니다. 또, 그 수(數)의 성질에 짝지운 물질로서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라는 5가지 중에 금(金)과 토(土)를 어찌 따로 구별하는가? 그 작은 차이로 구별한다면, 기(氣), 풍(風), 초(草), 석(石) 따위는 어찌 같이 거론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모두 들자면 무수히 많은 것이며, 엄격히 들자면 금(金), 목(木), 수(水), 화(火), 또는 토(土), 목(木), 수(水), 화(火)의 4이며, 결코 5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그 물성(物性)을 어떤 연유로 수성(數性)에 짝지우는가? 수성(數性)의 물질은 그 근원이 9이며 5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행(五行)의 설(說)은 참으로 황당무계(荒唐無稽)한 말인 것이며, 이로써, 이치를 증명하는 인간세상을 무혹(誣惑)하여, 하늘의 화(禍)를 만드니 어찌 두렵지 않은가!”
유호씨는 계속하여 당요(唐堯)가 변란(變亂)을 일으켰던 역법제도(曆法制度)에 관하여 우(禹)에게 유시하였다.
3. 역제반란(曆制反亂)의 죄(罪)
“또 그 역제(曆制)는 천수(天數)의 근본을 살피지 아니하고, 거북이나 명협(蓂莢)의 미물(微物)에서 근본을 취하였으니, 요(堯)는 또 무슨 속셈인 것인가! 천지 만물이 모두 수(數)에서 나와 각 수(數)의 상징함이 있는데, 하필이면 거북과 명협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물(物)과 일(事)에 각 그 역(曆)이 있으니, 역(曆)이라는 것은 역사(歷史)이다. 그러므로 요(堯)의 역제는 곧 거북과 명협의 역이며 인간세계의 역이 아니니, 인간세계에 합치(合致)하지 아니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이런 가닭으로 삼정(三正)을 번복(飜覆)하여 구차하게 맞추려고 하나 되지 아니하여 마침내 천화(天禍)에 이르게 되었다.
역(曆)이란 인생증리(人生證理)의 기본인 까닭으로 그 수(數)는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아니한 것이 없다. 이러하므로, 역(曆)이 바르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일(事)이 증명(證明)되고 합치(合致)하여 복(福)이 되고, 역(曆)이 바르지 아니하면 천수(天數)에 어긋남이 있어 화(禍)가 되니, 이는 복(福)은 이치가 존재하는 데 있고, 이치는 바른 증명에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역(曆)의 바름과 바르지 아니함은 인생화복(人生禍福)의 실마리이니, 가히 삼가지 아니할 것인가! 옛 시대 오미(五味)의 재앙이 한 사람의 미혹됨에서 나와 만대의 살아있는 혼령들에게 미치고 있는데, 이제 또 역(曆)의 재앙이 장차 천세(千世)의 진리(眞理)에 미치고자 하니 두렵도다!
천도(天道)가 돌고 돌아 저절로 끝(終)과 처음(始)이 있고, 종시(終始)가 또 돌아 4단(段)씩 겹쳐 나아가 다시 종시(終始)가 있다. 1 종시의 사이를 소력(小曆)이라 하고, 종시의 종시는 중력(中曆)이라 하고, 네 번 겹친 종시를 대력(大曆)이라 한다. 소력의 1회(回)를 사(祀)라 하고 사에는 13기(期)가 있으며, 1기(期)에는 28일(日)이 있고 다시 나누어 4요(曜)가 된다. 1요(曜)에는 7일(日)이 있으며, 요(曜)의 끝(終)을 복(服)이라 하는 까닭으로, 1사(祀)에는 52요복(曜服)이 있으니, 364일(日)이다. 이는 1, 4, 7의 성수(性數)이다.
매번 사(祀)의 처음에 대사(大祀)의 단(旦)이 있는데, 이 단(旦)이라는 것은 1일(日)과 같은 까닭으로 합하여 365일이 되며, 3사(祀)의 반(半)에 대삭(大朔)의 판(昄)이 있는데, 이 판(昄)이라는 것은 사(祀)의 절반이다. 이는 2, 5, 8의 법수(法數)이다.
판(昄)의 긴 것이 1일(日)과 같은 까닭으로 제 4의 사(祀)는 366일이 된다. 10사(祀)의 반(半)에 대회(大晦)의 구(咎)가 있고, 구(咎)라는 것은 시간(時間)의 뿌리이다. 300구(咎)가 1묘(眇)가 되는데, 묘(眇)라는 것은 구(咎)가 눈에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9633의 묘(眇), 각(刻), 분(分), 시(時)를 지나 1일이 되니, 이는 3, 6 ,9의 체수이다. 이와 같이, 끝(終)나고 시작(始)하여 다시 중력(中曆)과 대력(大曆)에 미치어 이수(理數)가 이루어진다.
대저 이러한 요(堯)의 세가지 잘못은 허위(虛爲)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가히 부도(符都)의 실위(實爲)의 도(道)에 비할 수 있겠는가!“
유호씨(有戶氏)는 이와 같이 반역자 우(禹)에게 단단히 타이르며, 모든 법(法)을 폐지하고 부도(符都)로 돌아올 것을 권하였으나, 우(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위협이며 모욕이라 하고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를 공격하였다가, 수차례 이기지 못하고 결국 서기전2199년 모산(茅山)의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이에, 하(夏)나라 무리들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죽고자 하는 수만이었다. 이들은 모두 우(禹)가 치수할 때의 무리였다. 우(禹)의 아들 계(啓)가 서기전2198년에 왕이 된 후 이들 대군(大軍)을 이끌고 유호씨의 읍(邑)을 진격하니, 유호씨의 군사는 불과 수천이었다. 그러나, 하나라 군사는 전쟁마다 반드시 패하니 한번도 승리를 하지 못하였으니, 계가 드디어 두려워 하여 퇴진하고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아니하니, 그 무리들이 격앙되었다. 이에 서기전2195년경 유호씨는 하나라 무리들이 눈이 멀어 조속히 고쳐지기는 불가능함을 보고서, 장차 서남(西南)의 제족(諸族)들을 가르치고자 그 무리를 이끌고 가니 그 읍(邑)이 자연히 없어졌다.
이상으로, 유호씨는 반역자 우(禹)에게, 서기전2357년경 당요(唐堯)가 저질렀던 3가지 잘못을 일러주며, 요의 전철을 밟지 말고 반역을 포기함으로써, 단군조선의 가르침을 받기를 권유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우(禹)는 거부하고 항거함으로써 단군조선의 역사상 반역자로 낙인 찍혔던 것이다. 우의 아들 계(啓)도 또한 우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욕심에 눈이 멀어 항거함으로써, 단군조선으로부터 내버려진 참칭왕국(僭稱王國)으로서 고대중국의 역사상 최초의 왕조(王朝)가 시작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夏)나라 후대의 왕들 중 단군조선에 호의적인 왕들도 있어 묵시적인 천자국(天子國)으로 존속하였던 것이며, 하나라가 도(道)를 잃을 때면 하나라 주변에 있던 소위 구이(九夷)로 기록되는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하(夏)나라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하나라의 정사(政事)에도 직접 깊숙이 간섭하여 통제하는 등 내정간섭을 계속하였던 것이 된다.
서기전1813년경 하나라 말기에 걸왕(桀王)이 군사를 일으킨 은탕(殷湯)을 토벌하기 위하여 단군조선에 군사적 구원을 요청하여 구원을 받기도 하였으나, 서기전1767년 결국 하나라가 조약을 위반함으로써 단군조선의 후원을 얻은 은탕의 군사가 하나라를 멸하여 소위 동이족의 은왕조(殷王朝)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유호씨가 하(夏)나라를 내놓은 자식처럼 포기하고서, 가르침을 펴러갔던 서남(西南) 지역은 마고대성(麻姑大城)이 있었던 파미르고원에서 볼 때 서쪽의 소위 수메르지역과 남쪽의 인도지역이 된다. 서방지역을 달이 지는 땅이라 하여 월식주(月息洲)라 하고, 남방지역을 별이 생기는 성생주(星生洲)라 한다.
유호씨가 이들 월식생성(月息星生)의 땅에 찾아가니, 백소씨(白巢氏)와 흑소씨(黑巢氏)가 살던 곳으로서, 그들의 후예가 오히려 소(巢)를 만드는 풍속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고탑과 층대를 많이 지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소(巢)는 글자 모양대로 높은 탑모양의 망루(望樓)를 가리킨다.
서기전2190년경 유호씨가 방문하였을 때 수메르지역과 인도지역에서 고탑과 층대를 많이 지었으나, 그 유래를 알지 못하고 도(道)가 와전되어 이도(異道)가 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며 싸우고 정벌하는 등 천부(天符)의 본음(本音)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즉 마고(麻姑) 시대의 낙원의 역사는 거의가 기괴하게 되어 허망하게도 형적이 아주 없어진 것이었다. 다행히도 유호씨는 송구스럽게 맞이하는 전고자(典古者)의 영접을 받으면서, 마고(麻姑)의 도(道)와 천부(天符)의 본래(本來)의 이치(理致)를 일러주어 전(傳)하게 하였다.
유호씨의 후손은 단군조선에서 교부(敎部)의 직을 맡았다. 교부는 교육담당으로서 사도(司徒)에 해당하는데, 단군조선의 오가(五加) 중 양가(羊加)가 선악(善惡)을 담당하였는 바, 이 양가의 직속기관이 된다.
조홍근 한문화재단 사무총장, 홍익정치 연구원 부원장, 트위트-페이스북 역사당 부총재, 현 법무사. 30여년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0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