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전1833년 무자년(戊子年) 여름 4월에 뿔이 하나인 외뿔 짐승(一角獸)이 송화강의 북쪽에 나타났다.
외뿔 짐승 즉 뿔이 하나만 달린 짐승을 일각수(一角獸)라 하는데, 양(羊)과 같이 생겼다 하여 외뿔양이라고도 한다. 이 외뿔양이 바로 해치(獬豸, 廌)이다. 원래 법(法)이라는 글자는, 물의 흐름을 따라 해치(廌)가 따라가는 모습을 조합한 회의문자(會意文字)로서 해치(廌)를 내포(內包)하고 있던 글자인데, 이 廌(치)를 생략하여 약자(略字)로서 法(법)이라 쓰게 된 것이 된다.해치는 고대중국의 순(舜)임금 시절에 신령스런 동물로 전하는데, 선악(善惡)을 구분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단군조선의 삼사오가(三師五加) 제도에서 선악(善惡)을 담당하였던 양가(羊加)의 업무와 직결된다, 그리하여 해치는 순임금 시절에 형벌(刑罰)을 담당하였던 고요(皐陶)라는 사람이 관직에 해치(廌)를 사용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후대 조선시대에도 법과 형벌을 관장하는 관청이 되는 사헌부(司憲府) 등에서 해치(廌)를 관모(官帽)나 관복(官服)에 새기기도 하였다.
한편, 경복궁 앞에 화기(火氣)를 죽이기 위하여 세운 소위 해태(海駘)는 현재 서울의 상징동물이기도 한데, 원래는 해치(獬豸, 廌)는 일각수(一角獸)인 외뿔양(一角羊)으로서 선악(善惡)을 구분하는 신령스런 동물이었으나, 해치(廌)를 법(法)이라는 글자에서 유추하여 물(水)과 관련된 해태(海駘)라고 인식함으로써 불을 진압(鎭壓)하는 신령스런 동물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 된다.
당시 송화강(松花江)은 속말(粟末)로 표기 되기도 하며 지금의 우수리강(牛首里江)에 합류하는 강으로서, 단군조선 전기의 수도가 되는 아사달(阿斯達)이 위치한 강이며, 그 북쪽에 외뿔 짐승이 출현하였다 하는 것이다.
외뿔 짐승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선악(善惡)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되는데, 원래 일각수(一角獸)가 순임금 시절에 관직에 사용한 상징적인 동물인 바, 순(舜)임금 나라의 땅을 이어 세운 하(夏)나라에 무슨 변고(變故)가 생긴 것을 알리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이는 서기전2224년에 선 하(夏)나라가 약400년이 지나면서 이때부터 망조(亡兆)가 나타난 것을 알리는 것이 된다.
[요하(遼河) 동쪽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
서기전1833년 가을 8월에 천왕께서 나라 안을 순수하시며 요하(遼河)의 왼쪽(左)에 이르러 순수관경비를 세우고 역대 제왕(帝王)의 명호(名號)를 새겨서 전하게 하였다.
요하(遼河)는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한 강이 아니라, 단군조선 당시에 요중(遼中)에 위치한 강으로서 후대에 소위 요수(遼水)라 하여 요동(遼東)과 요서(遼西)의 구분을 짓는 큰 강이 되는데, 원래 북류(北流)하는 황하(黃河) 하류에 합류하던 강이 될 것이며, 북경 부근을 흐르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가 된다.영정하(永定河)가 원래의 요수(遼水)로서 대요수(大遼水)가 되고 영정하 중상류 지역에 합류하는 강으로서 북동에서 서남으로 흐르는 강이 청수하(淸水河)로서 소요수(小遼水)이다. 대요수의 중하류 지역이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고죽국(孤竹國)의 영역이 되며, 대요수의 상류지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諸侯國)인 기후국(箕侯國, 소위 箕子國)의 북부지역이자 구려국(句麗國)의 서남지역에 속하게 되고, 소요수 지역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구려국(句麗國)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된다.
요하의 왼쪽은 곧 요하의 동쪽이 된다. 그리하여 순수관경비가 세워진 곳은 요하의 동쪽으로서 지금의 영정하 동쪽이 된다. 이 곳은 단군조선의 발해만 유역에 있었던 번한(番韓)이 위치한 지역이다. 즉 번한은 고죽국의 동쪽, 구려국의 남쪽, 진번국(眞番國)의 서쪽에 위치한다. 진번국은 진한(眞韓)과 번한(番韓)의 사이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으로서 지금의 요동반도 서쪽을 흐르는 요하(遼河)의 서쪽지역과 대릉하 동쪽지역이 된다. 진번의 남쪽에 임둔(臨屯)이 위치한다.
단군조선 시대 요하의 동쪽이 되는 번한 땅에 세워진 순수관경비의 유적을 보고 서기전220년경 인물인 창해역사(蒼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이 지은 시가 고려시대 문하시중을 지내신 이암(李嵒)선생이 지은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전한다. 창해(蒼海)는 고대 중국의 북해(北海) 또는 동북해(東北海)로서 지금의 발해(渤海)를 가리키며 여홍성의 여씨(黎氏)는 산동지역의 동이족(東夷族)과 직결되는 성씨이기도 하다.
여홍성이 지은 시는 아래와 같다.
“마을 밖 변한이라 불리는 곳에, 독특하게 빼어난 변함없는 돌이 있네. 받침은 거칠어지고 철축꽃은 붉기만 하고, 글자는 허물어지고 이끼는 푸르기만 하네. 처음 다듬어져 생긴 채로, 흥망의 돌로 서 있네. 문헌에는 증거가 없을지나, 이것이 단씨의 흔적이 아니랴! (村郊稱弁韓 別有殊常石 臺荒躑躅紅 字沒莓苔碧 生於剖判初 立了興亡石 文獻俱無徵 此非檀氏跡)”
여홍성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 된다. 단군조선의 변한 땅이 어디인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홍성은 진시황(秦始皇)을 철퇴(鐵槌)로 쳐 죽이려다 부차(副車)만 부수고 실패하였던 산동지역 동이족 출신의 인물이다.
여홍성이 말한 변한(弁韓)은 번한(番韓)을 음차(音借)한 글자로서 서기전209년 이후 한반도 남쪽에 세워진 후삼한(後三韓)의 변한이 아니라 곧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194년경까지 단군조선의 비왕(裨王)인 번한(番韓)이 다스리던 발해만 유역에 위치하였던 원래의 번한(番韓)을 가리키는 것이다.
창해역사 여홍성이 보았던 단군조선 번한(番韓)에 세워진 비석은 원래의 요하(遼河), 요수(遼水)였던 지금의 북경(北京) 동쪽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의 중하류 지역 바로 동쪽에 세워졌던 것이다.
[용가(龍加) 소속 내량(來良)과 하걸(夏桀)과 상탕(商湯)]
서기전1813년 무신년(戊申年)에 용가(龍加) 소속 내량(內良)을 파견하여 하(夏)나라 걸(桀)왕을 도와 상(商)나라 탕(湯)을 치다가 탕이 사죄하므로 내량이 군사를 돌렸다. 이때 내량이 염이(厭夷) 때문에 관중(關中)의 기주(岐周)에 살게 되었다.
단군조선 시대에 삼사오가(三師五加)에서 나아가 팔가(八加) 구가(九加)라고도 부르는데, 팔가는 삼사오가를 합칭한 것으로 되기도 하고, 구가는 팔방과 중앙을 합친 구방을 직책으로 분류한 것이 되는데, 용가(龍加) 또는 호가(虎加)가 총괄직에 해당한다.
단군조선 초기에 팔가구가(八加九加)로 기록된 것을 나열해 보면, 호가(虎加)는 용가(龍加)라고도 하며 태자부루(太子扶婁)가 맡았던 직책이고, 마가(馬加)는 신지씨(神誌氏)가 맡았으며, 우가(牛加)는 고시씨(高矢氏)가 맡았고, 웅가(熊加)는 치우씨(蚩尤氏)가 맡았으며, 응가(鷹加)는 부소(扶蘇)가 맡았고, 노가(鷺加)는 녹가(鹿加)라고도 하는데 부우(扶于)가 맡았으며, 학가(鶴加)는 주인씨(朱因氏)가 맡았고, 구가(狗加)는 여수기(余守己)가 맡았으며, 봉가(鳳加)는 아밀(阿密)이 맡았다.
웅가(熊加)는 국방군사 담당으로서 목숨을 담당한 마가(馬加)에서 파생된 것이 되며, 응가(鷹加)는 형벌 담당으로서 구가(狗加)에서 파생된 부서가 되고, 노가(鷺加)는 질병(疾病) 담당인 저가(豬加)에 해당되며, 학가(鶴加)는 선악(善惡)을 담당하여 양가(羊加)에 해당하고, 봉가(鳳加)는 재정(財政) 담당으로서 부루단군 천왕 때 신설된 부서가 된다.
단군왕검 천왕 시대에 오가(五加)의 업무 중에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는 명칭을 그대로 두고, 양가(羊加)는 배달나라 시대 때에는 계가(鷄加)라고도 하였던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 시대에는 학가(鶴加)라 별칭한 것으로 되며, 저가(豬加)를 노가(鷺加)로 별칭하고, 마가(馬加)에서 웅가(熊加)를 별도로 두어 치우(治尤)의 별칭이 된 것으로 되고, 구가(狗加)에서 응가(鷹加)를 별도로 두고, 총괄직으로서 용가(龍加) 또는 호가(虎加)를 신설하였던 것이며, 부루천왕 때 저가(豬加) 또는 노가(鷺加)에서 별도로 봉가(鳳加)를 신설한 것이 된다.
호가 또는 용가는 태자부루가 맡아 진한(眞韓)으로 봉해졌으며, 마가 신지씨는 숙신(肅愼)에 봉해지고, 우가 고시씨는 청구(靑邱)에 봉해지고, 웅가 치우씨는 남국(藍國)에 봉해지고, 응가 부소는 단군왕검 천왕의 둘째아들로서 구려(句麗, 九黎)에 봉해지고, 노가 부우는 단군왕검 천왕의 셋째아들로서 진번(眞番)에 봉해지고, 학가 주인씨는 개마(蓋馬)에 봉해지고, 구가 여수기는 예국(濊國)에 봉해졌는데, 여기에 단군왕검 천왕의 넷째아들인 부여(扶餘)가 부여에 봉해지고, 그 외 옥저(沃沮)가 봉해져 모두 기본 9군후국(君侯國)이 되며, 그 외에도 졸본(卒本), 비류(沸流) 등 소국들이 많았다.
내량(內良)은 단군조선의 팔가(八加) 중 총괄직인 용가(龍加)에 소속된 인물로서 하(夏)나라 걸(桀)왕을 도우라고 명을 받고 파견되었던 것이며, 상(商)나라 탕(湯)을 치다가 탕이 사죄하므로 군사를 돌렸던 것이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서남방이 되는 서이(西夷)에 속하는 염이(厭夷)의 소란 때문인지 내량(內良)이 단군조선 본국으로 복귀하지 아니하고, 서기전1766년 이후 은(殷)나라 시대에 백작(伯爵)의 제후국인 주(周)나라가 소재하였던, 관중(關中)의 기주(岐周)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은 견이(畎夷)와 가까운 곳인데, 백이(白夷)에 해당하는 서이(西夷)와 더불어 하은주의 서쪽 변방을 다스렸던 것이다.
내량이 활동한 역사는 서기전1767년에 신지 우량(于亮)이 견군(畎軍)을 이끌고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는 역사와 연관된다. 빈기는 빈(邠)과 기(岐)의 땅이며 은나라 제후국으로서 은나라를 멸하고 세운 주(周)나라의 제후국시절 주무대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하(夏)나라의 제후국이던 은나라의 제후 탕(湯)이 서서히 군사를 일으킨 것이 되는데, 서기전1766년에 은나라를 세우기까지 최소한 약 50년간의 준비기간이 있었던 것이 된다. 은탕(殷湯)은 이윤(伊尹)을 재상(宰相)으로 삼아 하(夏)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잡았는데, 은(殷)의 원래 국명이 상(商)이므로 상탕이라고도 한다.
이때는 단군조선이 정식 천자국인 하(夏)나라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소위 반란군이 되는 은탕(殷湯)의 군사를 진압한 것이 된다. 아직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인정 즉 천명(天命)을 받지 못한 것이 된다.
욕살은 지방장관에 해당하는데 이들 비신, 고사침, 돌개를 봉하여 욕살 윗 단계가 되는 한(汗)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욕살은 원(原)이나 성(城)의 책임자이며, 한(汗)은 지방의 왕(王)인 제후(諸侯)에 해당하는데, 소위 제후라는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즉 단군조선의 한(汗)은 소위 천자(天子)격에 해당된다.
서기전108년 북부여 시대에 위씨조선이 한(漢)나라에 망하자 졸본(卒本)의 한(汗)이었던 고두막(高豆莫)이 의병을 일으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하며 한나라와 전쟁을 하였는데, 이 고두막한(高豆莫汗)이 곧 북부여의 제후인 천자(天子)인 것이다.
고사침은 그 성씨가 고씨임을 알겠으나 ,비신과 돌개는 그 성씨가 불명이나 아마도 단군조선의 종실로서 한(桓)씨일 가능성이 많은데, 한편, 단기고사에서는 한불배(韓不倍), 신돌개(申突蓋)라고 적고 있어 비신의 성씨가 한(桓,韓)씨이며, 돌개의 성씨가 신(申)씨임을 나타내고 있다. 불배는 아마도 필사과정에서 비신을 잘못 쓴 것으로 되는데, 비신(丕信)이 맞는 것이다.
[하(夏)나라의 망조(亡兆)가 무르익다]
서기전1799년 임술년(壬戌年)에 하(夏)나라 사람이 들어와 걸왕(桀王)이 무도하여 스스로 망할 것이라 전하였다.
걸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데, 말기에 달기(妲妓)라는 여자에 빠지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여 나라의 정세(政勢)가 극도록 불안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에 제후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고 하나라의 제후국에 해당하는 상(商)나라의 탕(湯)이 군사를 일으키곤 한 것이다.
서기전1833년에 송화강의 북쪽에서 외뿔짐승(一角獸)이 출현한 것은 하(夏)나라의 망조(亡兆)를 나타낸 자연현상이 될 것이며, 서기전1813년에 상탕(商湯)이 군사를 일으키자 하나라 걸왕이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고, 이에 단군조선이 군사를 내어 탕을 치도록 하니 탕이 사죄하므로 군사를 물렸던 것이 된다.
그런데, 하나라 걸왕의 폭정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므로 상탕(商湯)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고, 결국에는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사부(師傅)가 된 유위자(有爲子) 선인(仙人)의 제자였던 이윤(伊尹)을 재상(宰相)으로 둔 탕(湯)이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서기전1766년에 하나라를 멸하고 상(商,殷)나라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하(夏)나라는 서기전2224년에 우(禹)가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의 명을 받아 유상(有象)과 함께 순임금을 협공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우의 군사가 순임금을 죽였고, 이에 우가 권력욕에 눈이 멀어 단군조선의 명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면서 독단(獨壇)을 설치하여 결국 단군조선을 반역하였던 것이고, 정식 천자국(天子國)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후대에 하나라 왕이 단군조선에 예를 표하면서 묵시적(黙示的)으로 천자국을 인정받은 것으로 된다.
하(夏)나라 말기에 상탕(商湯)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을 해오자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로 보아 하(夏)나라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의 천자국(天子國)임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되고 실제로 망하기 이전인 서기전1813년과 서기전1767년 등 두차례 이상 군사적 구원을 받은 사실이 있기도 하다.
[은탕의 재상 이윤(伊尹)의 스승, 유위자(有爲子)]
서기전1797년 갑자년에 하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상(商)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마다하고 단군조선에 많이 망명하였다. 이윤(伊尹)이 상(商)나라 탕(湯)의 재상이 되어 탕을 도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쳤다. 이에 이윤의 스승이었던 유위자(有爲子)가 “이는 사람을 사랑하고 하늘을 따르는 일이지만 이윤(伊尹)이 아니면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때 하나라 사람들이 단군조선에 대거 망명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역사적 망명 사건은 이후 중국역사에서 종종 나타나며, 하(夏)나라의 건국 당시인 서기전2224년경에도 하나라 시조 우(禹)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면서 단군조선의 정치제도를 흉내내어 마음대로 제후를 봉하고 조공(朝貢)을 받는 등 폭돌한 정치를 펼치므로, 이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라의 땅에서 탈출하여 단군조선 직할 영역으로 망명하였던 사실도 있었다.
이윤(伊尹)이 처음부터 상탕(商湯)의 사람이 아니었으나, 상탕이 결국 이윤(伊尹)을 재상(宰相)으로 등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이 팽창하고 민심(民心)을 얻음과 더불어 하(夏)나라를 멸할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결국에는 단군조선의 군사적 후원까지 얻어 천명(天命)이라는 명분(名分)하에 하나라를 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위자 선인은 서기전1950년경 이전에 출생하여 서기전1797년 현재 약150세이던 때가 되는데, 이윤이 상탕의 재상이 되어 본격적으로 하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나라는 이미 기울었고 이 하(夏)나라를 경략할 인물로 곧 이윤만이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서기전268년에 지었다는 위(魏)나라 사람이자 공자(孔子)의 7세손으로 전하는 공빈(孔斌)의 홍사(鴻史) 서문에도 유위자(有爲子) 선인(仙人)의 제자이던 이윤(伊尹)이 은탕(殷湯)의 재상(宰相)이 되었다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이에 앞서 유위자 선인은 서기전1833년에 송화강 북쪽지역에 출현한 외뿔짐승을 하(夏)나라의 망조(亡兆)로 내다보았고, 서기전1797년에 이르러 유위자(有爲子) 선인이 하(夏)나라를 대신할 은(殷)나라는 이윤(伊尹)의 보좌(輔佐)로 이룰 것이라 단정한 것이 된다.
[우가(牛加) 홀달(屹達) 즉위]
서기전1783년 무인년(戊寅年)에 상나라 사절이 처음으로 입조하였다. 이해 7월에 아한(阿漢) 천왕이 붕하고 우가(牛加) 흘달(屹達)이 즉위하였다.
이때, 상(商)나라가 하나라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어느 정도 힘을 과시하던 때가 되는데, 상나라의 상국(上國)이 되는 하(夏)나라를 무시하고 하(夏)나라의 상국(上國)이 되는 단군조선(檀君朝鮮)에 직접 사절을 파견하여 예를 표한 것이 된다. 이때까지 단군조선은 하(夏)나라 정세를 관망한 것이 되며 하나라와 상나라 중 어느 나라를 후원할지는 도(道)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정하였던 것이 된다.
이 흘달(屹達)을 대음달(代音達)이라고도 하고, 제15대 대음(代音) 천왕의 대음(代音)을 후흘달(後屹達)이라고 하는데, 흘달(屹達)이 클달(泰地)의 음차가 되는 글자라면, 대음달(代音達)의 대음(代音)은 대음(大音)으로서 “큼”을 나타낸 이두식 표기가 되는 것이라 보이기도 한다.
조홍근 한문화사업총단 대표/천산역사연구원장/천부역(天符易)과학원장/마고족보연구원 대표/세계무궁화축제문화사업회 이사/독도 대마도 동해 만주 수호회복단 이사/천웅도 문무원 이사/광개토황비문연구원 이사/천부어문연구원 이사/산삼문화사업단 이사/한국삼협회 고문/홍익정치연구원 이사/한문화컨텐츠개발원 이사/한문화유물문화재연구원 이사/한문화사업단 이사/행운천지인 역리풍수 대표/(주)한문화개발 고문/플러스코리아타임즈 이사/춘천고조선유적지보전협의회 총괄기획위원장/천부풍수연구원 이사/풍수지리신문 편집국장/현 법무사/저서<홍익인간 7만년 역사> <마고할미로부터 7만년> <생활사주> <생활기문> <천부풍수> <천웅도와 홍익인간><우리말글과 세계언문역사>외 ------------------------------------------------ 30여년 동안 족보(族譜)와 한중일(韓中日)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符都誌), 한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2천393년 역사를 정립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