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학계에서의 선비 연구는 두 개의 학회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 보다 유독 북방기마유목민족에 관심을 나타내며 연구를 지속하던 러시아는 제정시기 때부터 이미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 극동사학회를 설립하고 동북아시아의 기마유목민족들을 연구했다. 그리고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에 알타이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중앙아시아에 산적해 있던 기마유목민족의 유적 및 문헌 사료들을 총람해왔다.
극동사학회에서는 동북아시아에서 출현한 유목민족들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 되고 있고 특히 만주족과 거란, 선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되어 있다. 특히 선비의 기원에 대해서는 기존의 ‘동호 기원설’ 과 ‘흉노 기원설’ 두 가지로 분류 되어 있다.
먼저 기존의 ‘동호 기원설’ 은 세르게이 이바노프(Сергей Иванов)가 동호의 역사를 연구하다가 주장한 학설이다. 세르게이는 동호가 다민족 국가였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동호에 속해 있던 민족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호의 적통은 선비가 아닌 오환이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동호의 왕이 묵특에게 패배하여 죽은 후, 남은 동호의 왕족들이 대거 오환으로 이동하여 흉노의 속국이 되었는데 이는 선비보다 앞서 오환에 대한 기록이 많고 한나라에서 오환도교위를 보낼 정도로 예우했는 것도 이와 상통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록들이 『흉노사』에 나타나고 있는데 『흉노사』에서는 “흉노의 공격을 받은 동호의 왕이 전사하고 동호의 태자와 왕족들이 도성을 탈출하여 오환산으로 달아났다.”라는 기록이 있어 세르게이의 학설을 근거로 받쳐주고 있다.
이러한 세르게이의 주장은 기존에 동호의 일족들이 갈라져 선비와 오환으로 분열되었다는 중국 문헌사료와의 기록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세르게이의 주장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것은 러시아에 동북아 고대사에 대해 알려지지 않는 문헌들이 많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의 동북아 고대사 문헌들을 중국 문헌사료와 비교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알타이학 연구소의 니콜라이 베츠카프(Николай Вцкaв)는 선비의 기원을 흉노에서 잡았다. 니콜라이의 주장에 따르면 선비는 흉노의 제후 부족이었으며 단군조선이 아시아를 통치하던 시기에 흉노에 조공을 바쳤던 민족이었다. 그리고 니콜라이는 선비를 민족이 아닌 부족으로 표기했다. 그리고 오환과 선비는 동일민족으로 두 민족이 갈라진 것은 전한 말기로 보았다. 그에 대한 근거는 흉노가 번성하고 있던 시기에 선비가 나오지 않고 오환이라는 이름의 부족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사기(史記)』,「흉노열전(匈奴列傳)」과『자치통감(資治通鑑)』,「한기(漢記)」에도 전한 말기까지 오환의 기록만 나와 있다. 이것은 오환과 선비가 동일민족이었다가 전한 말기에 남흉노의 북흉노 공격으로 인해 오환의 부족들이 갈라져 북쪽으로는 선비산에 의지하고 있는 오환족을 선비족, 남쪽의 오환을 남오환이라 하였던 『흉노사(Хунну исто́рия)』의 기록과도 일치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뒷 받침 할 수 있는 자료도 청나라 학자였던 정겸(丁謙)의『봉래헌지리총서(蓬萊軒地理叢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왕침(王沈)의『왕침위서(王沈魏書)』에 나오는 적산(赤山)이라는 것은 몽골어로 ‘ulan 山’의 의미이고, 오환산(烏桓山)은 음역(音訳)으로 오환(烏桓)이란 적(赤)의 의미라고 했다. 선비족이 전쟁에 나설 때 장수들이 붉은 색의 갑옷을 즐겨 입었고 붉은 색의 눈썹을 칠하였다. 이는 오환과 선비는 동족이 아닌 동일민족이라는 또 다른 근거이기도 하였다. ※
※ ulan (蒙古語:紅)설에 의하면 오환(烏桓)은 오환산(烏桓山)이라는 산의 이름에서 붙은 족명이라는 사서(史書)의 기재에 준하였다. 몽골어에서 홍(紅)을 오란(烏蘭,ulan)이라고 하고, 붉은색을 상징하는 것이며 표기하기를 선비와 같이 상정했다. 선비의 전통 샤머니즘에서 붉은색을 신성하게 여겼던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니콜라이의 이러한 주장은 선비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 학설을 통해 흉노 = 선비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중국 문헌사료와 『흉노사(Хунну исто́рия)』, 그리고 만주족의 문헌과 비교하여 주장했던 첫 사례였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사료와 연관 지어 북방의 역사를 고찰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러시아의 선비 연구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주로 북방기마유목민족의 입장에서 연구를 하고 있고 특히 선비의 기원에 대해서는 꾸준히 학설을 재기하고 있다. 그러한 부분에서 중국의 문헌자료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선비를 중국의 입장에서 관찰한 것이 아닌 북방기마유목민족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검토하였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학계의 선비 연구에 관한 선행연구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여 많은 학설이 재기되었고 연구도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선비연구는 북방사의 새로운 지평선을 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선비에 대한 다양한 선행연구들을 토대로 새로운 학설이 창조될 수 있고 새로운 고증론과과 검증론이 제시되는 것은 학계의 발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Предки китайцев якобы вели непрекращающиеся войны с другими племенами, такими как жуны (жун) — «рыжеволосые дьяволы» и ди. Отмечено племя «хунь-юй», это племя жило в степях севернее жунов. Прахуннские племена ханьюнь и хуньюй обитали в степи, примыкавшей к южной окраине пустыни Гоби.
В XIII веке до н. э. хунну начали постепенно переселяться с южной окраины Гоби на северную. Л. Н. Гумилёв считал, что хунну самостоятельно освоили кочевое скотоводство и научились пересекать пустыни. Также есть версия, что хунну многое переняли у индоевропейцев и развили их навыки.
За 300 лет с момента переселения на север число хунну выросло и они напали на Чжоу в 822 году до н. э.. Китайцы отбили набег, и о хунну не упоминалось в течение 500 лет. В это время в степях Восточной Монголии и Забайкалья сложилась культура плиточных могил, возможно, принадлежащая ранним хунну, скелеты в могилах относятся к палеосибирскому тип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