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선행연구와 그 외의 사서들을 중심으로 하여 선비의 기원에 대해 환단고기 입장에서의 학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온 선비족에 대한 기록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왠만하면 환단고기류의 사서들을 인용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공식적으로 학계에서 위서로 지정된 사실 때문인데 이로 인한 국내 학계에서 필자가 심대한 타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기록은 기록이니 만큼 논문으로만 쓰면 안된다는 전제 하에 칼럼으로만 한 두번 정도 남기면 별 문제 없다고 하여 조심스럽게 언급해보고자 한다.
선비의 기원은 고조선에부터 시작된다. 이에 대한 근거는『단기고사(檀奇古史)』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해당 기록은 다음과 같다.
"벌음 단군천황의 아우인 벌심(伐心-代心)을 남선비(南鮮卑) 대인(大人)으로 삼았다."
위 사료는 B.C 1,622년의 기록으로 단군조선에서 선비의 기록 중 최초의 기록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위 사료 이전의 선비가 어떻게 기원했는지에 대한 사료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현재 기록은 동호의 후예이자 동호와 동일민족이라는 학설이 아직 지배적이다. 그것은 동호 시기 다음에 기록이 다양하고 문헌학적으로 접근이 가장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류의 사서에서 나타난것에 의하면 고조선 때 구성되었던 유목민족 중 하나이고 흉노와 비슷한 유목민족으로 보인다. 당시 선비는 민족계통형태가 아니라 씨족 형태였기 때문이다. 대음단군의 동생을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았다는 것은 북방을 안정시키며 농경 주도 세력과 유목 세력의 유착화를 진행시켰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선비족의 입장으로는 씨족형태의 개인적 성향이 강한 민족을 통치하는 영도자가 배출되기 어려운 점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한 영도자를 단군이 친족을 보내 직접 통치하게 했다는 것은 전형적인 국정 안정을 통해 제후들의 이탈을 막고 연방을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는 판단이다.
이렇게 초기 선비족은 수렵과 유목을 병행하며 기후에 따라 남쪽과 북쪽으로 이동하곤 했는데 이것은 당시 시베리아의 기후도 상당한 변화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고조선에서 선비에 대한 기록 중 대음 단군 이후로 32세 추밀단군 시기에 『규원사화(揆園史話)』 문헌이 나타나는데 해당 사료는 다음과 같다.
"임자 원년(B.C. 849), 갑인 3년(B.C. 847), 선비산(鮮卑山)의 추장 문고(們古)가 공물을 바쳤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 선비산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기존의 학설에서는 동호의 후예들이 선비산에 정착했기 때문에 선비족이라는 어원이 생겼다고 통상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류 사서에서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추정하고 있는데 첫 번째 위 사료의 나오는 선비산은 기존에 있었던 선비족이 정착했기 때문에 원래 산 명칭이 선비산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원래 지명은 필요에 따라 이동이 가능한데 산의 지명도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 그리고 두 번째, 선비산의 위치가 지금의 대흥안령산맥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이칼 동부 부리야트(Vliyart) 지역에 울롱(Ullong)산이라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울롱의 어원은 부리야트 어로 ‘해 뜨는 동쪽’을 의미한다. 그리고 울롱 산 주변에는 사르바르(Sarbar)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부리야트 인들은 사르바르 평원과 울롱 산에 선비족이 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르바르 평원은 기원전 5세기에 서방으로 이동한 사르마트의 기원지로 연구되어 왔다. 선비와 사르마트가 유사음역을 가지고 있고 고고학적으로도 서로간의 주거 방식과 유물 장식도 비슷하다. 봉분도 앞 목곽이 넓고 뒷 목곽으로 갈수록 좁아진다는 부분도 매우 유사하다.
특히<마야투르 키예프>에는 두 민족이 같은 민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야투르 키예프>를 발견한 블라디미르 쿠바레프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르마트가 부리야트 사르바르에서 기원했으며 그 어원도 같았다. 그리고 사르마트는 서방으로 이주했으며 남방으로 이주한 사르마트를 선비족이라 하였다... 이것은 사르마트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대흥안령산맥의 선비산이 B.C 3세기에 등장하고 있다는 문헌적 사료를 고찰하였을 때 이전의 선비산은 부리야트 지역의 울롱 산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환단고기류 사서를 비교하였을 때 나온 결론이다. 씨족사회에서 점점 인원이 늘어나면서 부족이 되었고 위 사료인『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 언급하고 있는 추장이라는 부족장 명칭이 등장하게 되었다.
43세 물리단군 시기에 ‘우화충의 난’ 이 일어났고 부여족인 구물단군이 우화충을 평정하자 많은 유목민족들이 단군조선으로부터 분리되었는데 선비족도 이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 부족은 사르바르 평원에서 남하하여 동호(東胡)에 예속되어 동호의 유목산업을 관장하게 되었고 다른 한 부족은 서방으로 끊임없이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에 들어와 원 주민인 스키타이를 공격하여 정복에 성공했다. 이들 사르마트인들은 훈족이 등장하기까지 800여 년 동안 세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로마와 대치하고 있는 고대 유럽 사회에 유일한 유목민족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동호에 예속되었던 선비족은 동호가 흉노의 묵특선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자 오늘날의 대흥안령산맥에 위치한 선비산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보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비는 점차 강성해져 다시 남하하여 서랍목륜하 지역에 재정착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단기고사(檀奇古史)』와 『규원사화(揆園史話)』의 문헌, 울롱(Ullong)과 사르바르(Sarbar)평원의 선비산 위치 고찰과 선비와 사르마트 비교언어를 통해 선비의 기원을 검토해 보았다. 기존에 알려진 선비의 기원과는 다른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에 대한 가능성을 유추하고 검토하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고대 유목민족이 부리야트 지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와 사르바르 평원의 재 고찰에서 지금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이것은 현재 남아있는 부리야트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한 부분이 많았던 것에 대한 결정적인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단고기류의 사서들로 분석해 볼 때 고대 부리야트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부리야트의 역사에 대한 재검증 및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굳이 환단고기류의 사서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어 고대 부리야트와 선비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며 이에 다른 학술연구적 성과가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한다. 선비의 기원은 북방사 연구의 중요한 연결을 의미하기 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