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선비는 단석괴(檀石槐)가 나타나 선비 전체의 종족을 통합하기 전까지는 선비의 씨족 가운데 크게 중심이 되는 씨족이 아니었다. 단석괴(檀石槐) 이전까지의 선비는 전체적으로 통일되어 역사상 전면에 나타났던 부족이 아닌 마땅한 영도자가 없이 씨족끼리 이동하여 개별적으로 세력을 유지했던 종족이었다. 그러면서 흉노, 한, 오환, 부여, 고구려와 행동을 함께 하면서 씨족을 연명했고 전쟁 때는 그들의 용병으로 싸우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선비는 강대국들의 부용세력으로 평가를 받았고 동족인 오환이 한창 주목을 받을 때도 선비에 대한 당시 국제사회인식은 역시 오환의 부용세력이자 부여, 고구려의 거수국(渠帥國)이었다.
이렇게 씨족들끼리 뭉쳐 개인적인 성향을 보였고 동족과도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씨족들을 융화시키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단석괴(檀石槐)는 이러한 씨족들을 통일하고 단족(檀族)을 중심으로 흉노의 뒤를 이은 선비 최초의 유목 국가를 건설했다. 단족 자체의 기원은 선비가 기원했을 때부터 있었던 씨족이 아닌 단석괴가 본연의 씨족을 이끌고 선비을 통일했을 때 나타난 종족으로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
보통 이러한 영웅의 출현은 정당화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신화를 설정하곤 하는데 특히 유목민족의 경우, 영웅에 대해 신성시하는 부분이 있어 그러한 경향이 매우 강하다. 단석괴(檀石槐)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로 부합되는 것이 흉노를 격퇴하고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했던 선비족 최초의 영웅이기 때문에 선비에 대한 민족성 강화와 부족민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정치적 정당성 작업이 필요했다. 이러한 작업은 탁발씨의 북위(北魏)에서 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북위의 지배층이 선비이고 피지배층이 한족이므로 소수의 선비가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인 것으로 추측된다.
단 선비의 기원으로 알려진 단석괴의 출생 설화는『삼국지(三國志)』,「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과 『후한서(後漢書)』,「오환선비전(烏桓鮮卑傳)」으로 나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투록후가 집으로 돌아온 후, 괴이하게 여겨 그 아이를 죽이려 했다. 처가 말했다. "일찍이 낮에 길을 가다 천둥 벼락소리가 들려 하늘을 올려다 보았는데, 번쩍이는 빛(電)이 입 안으로 들어와 이를 삼켰습니다. 그 후, 임신하여 출산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기이(奇異)한 점이 있으며, 장차 크게 될 것입니다.”
투록후가 한사코 믿으려 하지 않자, 처는 친정집에 말해 아이를 거두어 기르게 했다. 단석괴라 이름지었는데, 장대(長大), 용건(勇健)하며, 지략(智略)이 남보다 뛰어났다. 나이 14~15세 때에 다른 부(部)의 대인 복분읍(蔔賁邑)이 단석괴 외가의 소와 양을 약탈하자 단석괴가 이를 추격했다.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고, 잃어버렸던 것을 모두 되찾아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부락(部落)이 외복(畏服)했고, 법금을 시행하면 옳고 그른 일을 공평하게 가렸으므로, 감히 이를 어기는 자가 없었으니, 마침내 그를 대인으로 추대했다." (匈奴及北單于遁逃後, 餘種十餘萬落, 詣遼東雜處, 皆自號鮮卑兵. 投鹿侯從匈奴軍三年, 其妻在家, 有子. 投鹿侯歸, 怪欲殺之. 妻言:「嘗晝行聞雷震, 仰天視而電入其口, 因呑之, 遂妊身, 十月而産, 此子必有奇異, 且長之.」 投鹿侯固不信. 妻乃語家, 令收養焉, 號檀石槐, 長大勇健, 智略絶衆. 年十四五, 異部大人蔔賁邑鈔取其外家牛羊, 檀石槐策騎追擊, 所向無前, 悉還得所亡. 由是部落畏服, 施法禁, 平曲直, 莫敢犯者, 遂推以爲大人. 檀石槐旣立, 乃爲庭於高柳北三百餘里彈汗山啜仇水上, 東西部大人皆歸焉. 兵馬甚盛, 南鈔漢邊, 北拒丁令, 東卻夫餘, 西擊烏孫, 盡據匈奴故地, 東西萬二千餘里, 南北七千餘里, 罔羅山川、水澤、鹽池甚廣.)
흉노의 한 제후가 3년 전장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제후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 아내는 낮에 길을 가다 천둥 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번개가 입에 들어와 삼켜 임신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크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제후가 안 믿자 아내는 부모 집에 아이를 보내 기르게 했다. 아이는 자라며 기골이 크고 용맹할 뿐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부락이 그를 경외하고 복종해 마침내 부족장으로 추대됐다. (其中一個三年, 戰場諸侯匈奴,我回到我的, 妻子生下, 了一個孩子。諸侯殺子。妻子白天走的路,我聽到雷, 聲在天空中,我看到閃電之, 妊娠吞噬孩子, 可能會很大,他說。米蒂亞諸侯, 不送孩子的, 妻子親庭是育。奇骨孩子成長,以及兩個大勇猛, 智略部落優於, 他服從敬畏,終於到了, 部族長推戴.)
같은 이야기가 <위서>에도 존재한다.
『위서(魏書)』, 卷 一, 「太武帝紀」第 一 [본문] 匈奴의 한 諸侯가 三年 후, 戰場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諸侯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 아내는 낮에 길을 가다 천둥 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번개가 치면서 우박이 내려 이를 삼켜 아이를 妊娠하여 낳으니 아이를 檀石槐라 이름 지었다. (經過一個, 匈奴諸侯的, 三年,戰場,我回到我的, 妻子生下, 了一個孩子。諸侯殺子。的路要走一天,他的妻子, 聽到打雷閃, 電擊中天空看, 不起冰雹妊娠, 兒童吞食生, 下一個孩子叫的, 名稱檀石槐內置。)
당시 단족은 흉노에 속해 있었는데 한나라 순제(順帝)때 흉노와 같이 행동하여 장성 안에 들어와 대군(代郡)을 함락하여 태수를 참수했다. 한나라에서는 여양영(黎陽營)의 군사를 보내 중산(中山)에 주둔하게 하고, 변방 군(郡)의 군사를 장성 안에 주둔시켜 흉노, 선비 연합군을 고립시켰다. 이 때 남흉노가 한나라에 귀속되어 있었는데 기병과 보병 만여 명을 이끌고 흉노에 종군하고 있는 선비를 공격해 승리했다. 그리고 흉노와 북선우(北單于)가 달아난 후, 남은 종(種) 10여 만 락(落)이 요동으로 와서 뒤섞여 지냈는데 모두 선비병(鮮卑兵)이라 자칭했다.
이 때 단석괴의 아버지인 투록후(投鹿侯)는 순제 때 장성을 넘어온 흉노군에 종사하였다가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투록후(投鹿侯)는 흉노에서 내린 제후 작위이다. 이는 흉노에 종사하고 있는 선비의 씨족들을 통솔하기 위해서 씨족의 족장을 제후 등급으로 승급시키고 흉노의 영토 안에 종사하게 하면서 자치권도 부여했다.
위 사료 중 『삼국지(三國志)』,「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을 보면 ‘번쩍이는 빛을 삼켰다’라고 하였고 『후한서(後漢書)』,「오환선비전(烏桓鮮卑傳)」에는 ‘번개가 입에 들어와 삼켰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같은 신화를 서술했던 사료에는 『위서(魏書)』 「태무제기(太武帝紀)」에는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려 삼켰다’라고 하였다. 각각의 사료에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지만 천둥과 번개에 이은 우박으로 모두 귀결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천둥과 번개는 북방 신화적 요소에서 나타나는데 천둥은 ‘신의 목소리 = 텡그리의 목소리’ 로 보인다. 그리고 번개는 ‘전사’를 상징하고 우박은 ‘신의 권위’를 상징한다. 이는 북방신화에서 공통적으로 풀이되고 있는 부분이며 결론적으로 ‘텡그리의 권위를 받은 족장’ 이라는 것에 착안한다.1)
1) 山本真司,「北方神話的要素」, 北方史學會, 1991.
北島洋介,「匈奴の神話研究」, 東京大学人文科学研究科, 1993.
김종우, 「조선 민족의 신화 고찰」, 김일성대학 출판부, 1994.
위 3개 등의 논문에서 천둥은 ‘신의 목소리 = 텡그리의 목소리’ 로 보인다. 그리고 번개는 ‘전사’를 상징하고 우박은 ‘신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공통적인 서술을 찾을 수 있다.
다른 선비의 씨족인 복분읍(蔔賁邑)이 단석괴 일가의 가축을 훔치자 15살의 소년인 단석괴가 추격하여 모두 되찾아오는 용맹성을 과시했다. 그리고 단씨 부족이 점점 부족민이 늘어나자 이들을 지도하여 지도자의 자질을 보였다. 그리고 아버지인 투록후가 사망하자 단씨 일족들의 추대를 받아 단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여기까지 단석괴의 출생과 단석괴 즉위 이전의 성장 배경이다.
단석괴 시대의 선비족 강역
단석괴가 출생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내몽골 후허하오터 평원
중국 드라마에 나타난 영웅 단석괴, 영웅이라 하기에는 초라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