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석괴는 앞서 단 선비씨족의 기원을 서술함에서 출생과 신화적 요소에 대해 서술하였으며 본 단락에서는 단석괴의 단 선비의 성장과 가비능의 등장 및 가비능의 암살로 인한 부족 침체기까지 서술하려 한다.
단석괴가 즉위한 이후 고류(高柳) 북쪽 3백여 리 되는 곳의 탄한산(彈汗山) 철구수(啜仇水)가에 정(庭)을 두었고 주변 씨족들의 융합을 촉구하자 동부와 서부의 대인들이 모두 귀부하기 시작했다. 이 때 군사들의 세력이 강력해졌고 북쪽의 정령(丁令)을 정복하러 나서면서 단석괴의 정복전쟁이 시작되었다. 단석괴는 정령의 족장인 아련한(兒連限)을 사로잡고 정령 14부를 통합했다. 그리고 서쪽의 오손(烏孫)을 공격하여 오손의 왕인 다르할트(Darhalt)를 죽이고 오손과 서역의 국가들을 지배하에 두었다. 이렇게 되면서 단 선비는 실크로드의 중앙지역을 장악하고 상인들을 약탈하여 부를 충족했다. 그리고 옛 흉노의 세력들을 제거하고 선비족 관리들을 임명하여 통치하게 하니 서방이 안정되고 북방이 평정되었다.
단석괴는 이후,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 서쪽 국경 지대를 모두 점령했다. 남으로는 후한의 변경지대에까지 세력을 확장하니 후한은 북쪽 국경 지대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단석괴의 영역은 동서로 12,000여 리, 남북으로 7,000여 리에 이르고 산천(山川)과 수택(水澤), 염지(鹽池)를 포함하니 후한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후한은 환제(桓帝)가 즉위한 시기로 환관과 외척들의 부패가 극에 달해 있어 북방의 군사력이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후한은 스스로의 힘으로 단석괴와 전쟁을 할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후한은 고구려와 부여의 힘을 이용하려 하였다. 특히 부여는 선비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들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부여는 이내 거절했고 후한의 사신을 잡아 오히려 단석괴에게 보내고 후한을 공동으로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단석괴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부여와 단 선비의 군사동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후한은 고구려에도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맺으려 하였으나 당시 고구려는 차대왕(次大王)의 시기로써 후한과는 적대관계였던 때 였다. 그러나 차대왕은 후한의 요청을 거부하자 후한은 이에 대한 앙심을 갖고 후일 고구려를 공격하게 되었다. 상황이 불리하게 되자 일단 후한은 흉노중랑장 장환(張奐)을 시켜 단독 공격에 나섰으나 패했다. 그러자 후한은 사신을 단석괴에게 보내 인수(印綬)를 지니고 단석괴를 왕으로 봉하려고 하였다. 이전 한나라 시기에 흉노를 포섭하여 대우를 했던 것과 같이 선비에도 그런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단석괴는 이를 거절하며 받지 않고 더욱 심하게 침략했다.
단석괴는 오환의 세력들을 흡수하고 후한의 하북성 변경을 공격하였다. 요동(遼東), 우북평(于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등을 함락하고 지금의 북경(北京)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이렇게 단석괴는 동서 1만 4천리의 넓은 영토를 경영하게 되었다. 이것을 오늘날의 거리로 환산하여 보면 "몽골~열하성~상곡~산해관~천진~북경~산서성" 일대로 볼 수 있으며 장성 이북의 거의 모든 지역이 단석괴의 세력 하에 들어갔다.
단석괴는 정복한 땅을 중부, 동부, 서부의 3부로 나누고 각각 4명의 대인을 두고 통치하게 하였다. 이는 혼자서 넓은 제국을 다스리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분할통치는 이후 거란이 화북과 중앙아시아를 정벌하였을 때도 이루어졌다. 다음 내용은『삼국지(三國志)』「오환선비동이열전(烏桓鮮卑東夷列傳)」에서 인용한 자료이다.
① 우북평(右北平)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에 이르고 부여(夫餘), 예맥(濊貊)과 접하는 곳까지 동부(東部)가 되고 20여 읍(邑)이 있는데, 그 대인은 미가(彌加), 궐기(闕機), 소리(素利), 괴두(槐頭)가 있었다.
② 우북평에서 부터 서쪽으로 상곡(上谷)에 이르는 곳까지 중부(中部)가 되고 10여 읍이 있는데, 그 대인은 가최(柯最), 궐거(闕居), 모용(慕容) 등으로 이들이 대수(大帥)가 되었다.
③ 상곡에서부터 서쪽으로 돈황(燉煌)에 이르고 오손(烏孫)과 서쪽으로 접하는 곳까지 서부(西部)가 되고 20여 읍이 있는데, 그 대인은 치건낙라(置鞬落羅), 일률추연(日律推演), 연려유(宴荔遊) 등으로 모두 대수(大帥)가 되었고 단석괴에 복속했다.
위의 사료를 보면 동부의 대인은 우문씨와 관계가 있었다. 주로 우문씨는 부여와 고구려 접경에서 활동했으며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후한 및 위나라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부는 모용씨가 세력을 펼쳤으며 모용목연이 중부대인이었다. 서부는 옛 북흉노 영토이고 서역과 오손을 지배하는 세력이었는데 이 세력은 탁발선비가 5호 16국 말기에 서진(西進)하면서 모두 탁발선비에 복종하게 되었다.
후한 영제(靈帝)때에 이르러 단석괴가 다시 후한 정벌에 나섰다 유주, 병주 2주를 공격하고 변경의 여러 군(郡)들까지 함락되니 후한 장성 남쪽 지역과 오늘날의 하남성(河南省)지역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177년,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 하육(夏育), 파선비중랑장(破鮮卑中郎將) 전안(田晏), 흉노중랑장 장민(臧旻)등을 단석괴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북방 변경에 주둔시키자 훈유 남선우와 함께 안문(鴈門)의 요새를 나와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고 2천 여 리를 지나 단석괴를 공격했다. 이에 단석괴가 부족민들을 이끌고 응전하자 장민 등이 패주했고, 병마(兵馬) 중에 돌아온 자가 10분의 1에 불과할 정도의 참패를 당했다.
후한의 공세에 승리한 단석괴는 선비의 인구가 많아지자 밭이나 가축, 사냥, 유목으로는 식량을 대기에 부족했다. 단석괴가 정복한 땅에 오후진수(烏侯秦水)라는 강이 있어 넓이와 길이가 수백 리로 물이 멈추어 흐르지 않고 강에 물고기가 있었으나 이를 잡을 줄 몰랐다. ( 오후진수(烏侯秦水) ; 강물이름. 진수(秦水)라로도 쓴다. 곧 내몽골 적봉시(赤峰市) 경내에 있는 노합하(老哈河)이다. 張純喜 주편, 『후한서사전(後漢書辭典)』, 齊南 : 山東敎育出販事, 1979, p. 384.) 그래서 남방의 한인(汗人)들이 물고기를 잘 잡는다는 이야기를 듣자 단석괴는 동쪽으로 한국(汗國)을 공격해 수천 가(家)를 사로 잡았다. ( “한국(汗國) ; 나라이름. 조선 남쪽 지경에 있는 마한 · 진한 · 변한 등의 부를 가리킨다. 한(汗)의 음은 한(韓)과 통한다. 삼한(三汗)의 총칭으로 생각된다.” 라고 하였다.) ※
※ 때는 희평(熙平)시기이다. ; 희평(熙平)은 후한 환제(桓帝) 유지(劉志)의 연호 가운데 하나로서 재위는 172~177년까지이다. 한나라 황제들은 하나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여럿 사용하였으며 예를 들어 한 무제는 재위 54년 동안에 11개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당 고종은 재위 34년 동안 14개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여황제인 무측천은 690년 정식으로 주정권(周政權)을 세워 황제를 칭한 뒤부터 705년 제위를 물려 줄 때까지 15년 동안에 14개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해마다 한 번씩 연호를 바꾼 셈이다.
그리고 이들을 오후진수 가에 옮겨 살며 물고기를 잡게 해 부족한 양식을 보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석괴가 나이 45세에 죽자 아들 화련(和連)이 즉위했다.
선비족 무덤벽화 무사도(연나라 시대, 내몽골 조양)와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