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염민(冉閔)이 패망한 뒤에 왕오(王午)가 안국왕(安國王)이라 자칭했었는데 왕오가 죽은 뒤에는 여호(呂護)가 다시 안국왕의 호칭을 물려받아 노구(魯口)를 보전하였다. 모용각이 진격하여 이를 쳐서 패주시키고, 전군(前軍) 열관(悅綰)을 보내 뒤쫓게 하자 야왕(野王)에서 따라잡아 부족민들을 모두 항복시켰다.
요양(姚襄)이 후량(後凉)을 들어 모용준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후량은 전연에 의해 멸망했다. 모용평(慕容評)을 도독 진옹익량강양형서예연십주하남제군사(都督秦雍益梁江揚荊徐兗豫十州河南諸軍事)로 삼아 임시로 낙수(洛水)에서 수비하게 하고, 모용강(慕容彊)을 전봉도독(前鋒都督) 도독형서이주연회제군사(都督荊徐二州緣淮諸軍事)로 삼아 진격하여 하수 남쪽을 점거하게 했다.
모용준이 화룡(和龍)으로부터 계성(薊城)에 이르렀다. 유주, 기주 사람들은 모용준이 동쪽에서 공격해 올 것이라 여기고는 서로 결속하여 각자 소재하는 곳에 모여서 결탁하였다. 모용준의 수하가 이들을 칠 것을 청하자 모용준이 이에 대한 즉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 밖에 명하여 경계하며 엄히 방비하도록 하였다.
부생(苻生)의 하내태수(河內太守) 왕회(王會)와 여양태수(黎陽太守) 한고(韓高)가 군(郡)을 들어 모용준에게 귀부했다. 동진의 난릉태수(蘭陵太守) 손흑(孫黑)과 제북태수(濟北太守) 고주(高柱) 및 건흥태수(建興太守) 고옹(高瓮)이 각기 군(郡)을 들어 동진에 반역하고 모용준에게 귀부했다. 당초 모용준의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인 범양공(范陽公) 유녕(劉寧)이 유성(蕕城)에 기거하고 있다가 전진(前秦)의 부씨(苻氏)에게 항복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호(戶) 2천을 이끌고 계로 와서 다시 항복하니 모용준은 유녕을 후장군(後將軍)으로 임명했다.
355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사자를 보내 사은(謝恩)하고 특산품을 공물로 바치니, 모용준이 고국원왕을 영주제군사(營州諸軍事)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임명하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였으며 왕호(王號)는 변경없이 예전과 같게 하였다.
같은 해 단란(段蘭)의 아들인 단감(段龕)이 염민(冉閔)의 난을 틈타 무리들을 끼고 동쪽으로 가서 광고(廣固)에 주둔하고는 스스로 제왕(齊王)이라 칭하며 건업(建鄴)에 칭번한 반면, 모용준에게는 신하로서가 아닌 중표(中表)의 예법으로써 서신을 보내 모용준이 정통 황제가 아닌 것으로 대하였었다.
이에 모용준이 모용각(慕容恪)과 모용진(慕容塵)을 보내 이를 쳤다. 모용각이 하수를 이미 건넌 뒤에, 단감의 동생인 단비(段羆)가 용맹하며 지모가 있어 단감에게 이렇게 청하였다.
“모용각(慕容恪)이 용병(用兵)을 잘하는데다 또한 그의 중려(衆旅)가 성대하여 대항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저들이 군대를 성 아래에 주둔시키면 비록 우리가 항복을 청한다 해도 들어주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왕(王)께서는 다만 성을 고수(固守)하시고 저 단비가 정예병을 이끌고 적을 막도록 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만약 제가 싸워서 이길 경우 왕께서 말달려 와서 적을 뒤쫓으며 공격한다면 적들은 한 필의 말조차 무사히 되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제가 패하는 경우에는 왕께서 급히 성을 나와 항복을 청한다면 천호후(千戶侯)의 지위를 잃지 않으실 것입니다.”
단감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단비가 자신의 의견대로 행할 것을 청하자 단감이 노하여 그를 죽이고는, 3만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용각에게 항거했다. 모용각이 제수(濟水) 남쪽에서 단감을 만나 싸워 대패시키고는 마침내 그의 동생인 단흠(段欽)을 죽이고 그의 군사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모용각이 진격하여 광고(廣固)를 포위하자 제장(諸將)들이 모용각에게 속전속결해야 한다고 권하였다. 그러자 모용각은 속전속결보다는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승산이 있다고 보고 거처를 만들었다. 그리고 도리어 농사를 지으며 포위한 채 기다리자 단감이 임명한 서주자사 왕등(王騰)과 삭두선우(索頭單于) 설운(薛雲)이 모용각에게 항복하였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단감(段龕)은 사자를 건업(建鄴)으로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동진의 목제(穆帝)가 북중랑장(北中郞將) 순선(荀羨)을 보내 그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모용각의 군대가 강성한 것을 보자 매우 두려워했다. 순선의 동진의 구원군이 배회하며 진격하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순선의 군대는 퇴각하는 도중 양도(陽都)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태수인 왕등(王騰)을 사로잡아 죽이고 돌아갔다.
모용각이 마침내 광고(廣固)를 함락하니 단감을 복순장군(伏順將軍)으로 삼고 선비(鮮卑), 흉노, 갈(羯)족의 3천여 호(戶)를 계(薊)로 옮기고 모용진(慕容塵)을 남겨 광고(廣固)를 방어하게 하였다. 모용각이 군대를 거두어 개선하여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