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가 벌어지자 모용각은 염민을 격파하여 7천여 명을 참수하고 염민을 사로잡아 보내니 용성(龍城)에서 염민을 참수했다. 모용각은 호타(呼沲)에 군을 주둔시키며 염민의 남은 세력의 상황을 주시했다. 염민의 장수 소해(蘇亥)가 장수 김광(金光)을 보내 기병 수천을 이끌고 모용각을 기습하게 하자 모용각이 이를 역습하여 김광을 죽이니 소해가 크게 두려워하며 병주(幷州)로 달아났다. 이에 모용각이 진격하여 상산(常山)을 점거하니 단근(段勤)이 두려움을 품고 항복을 청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진격하여 업(鄴)을 공격했다. 염민의 장수 장간(蔣幹)이 성문을 닫고 항거하며 방어했다. 모용준이 또 모용평(慕容評) 등을 보내 기병 1만을 이끌게 하니 모용각과 합류해서 업(鄴)을 공격했다.
장간(蔣幹)이 정예병 5천을 이끌고 성(城)을 나와 싸움을 거니 모용평(慕容評) 등이 이를 공격해 격파하여 4천여 명을 베었고 장간은 단신으로 도망하여 업(鄴)으로 돌아갔다. 모용각(慕容恪)과 봉혁(封弈)이 노구(魯口)에서 왕오(王午)를 쳐서 항복시켰다. 뒤이어 모용평(慕容評)이 업성(鄴城)을 공격해 함락하고는 염민(冉閔)의 처자와 신료 및 문물(文物)들을 중산(中山)으로 보냈다.
여기에서 모용준이 황제가 될 징조에 대한 부분들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해당 국가의 상징적인 부분들이 신격화 되어서 나타난다. 전연의 상징적인 부분은 바로 ‘제비’ 라는 새로 전연의 뒷 글자인 ‘燕 -> 제비 연’ 이다. 그리고 그러한 배경에는 춘추전국시대에 하북성은 燕나라 영토였다. 그리고 훗날 해당지역은 고구려에게 점령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연의 영토이고 모용준은 하북성을 거점으로 하여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모용준이 황제가 될 징조에 대한 기록과 그러한 설화는 다음과 같다.
"당시 모용준 궁궐의 정양전(正陽殿) 서쪽 산초나무에 있는 제비집에서 제비새끼 세 마리가 태어났는데 그 새끼의 목 위에 꼿꼿한 털이 있었다. 범성(凡城)에서 기이한 새를 헌상했는데 다섯 가지 색깔이 무늬를 이루었다. 모용준이 뭇 신료들에게 “이는 무슨 징조요?”라고 물으니 모두 말했다.
“연(䴏,제비)이라는 것은 연조(燕鳥)입니다. 머리에 모관(毛冠)이 있는 것은 우리 대연(大燕)이 용흥(龍興)하여 통천관(通天冠)과 장보관(章甫冠)을 쓰게 될 상(象)입니다. 새 둥지(巢)가 정양(전)의 서쪽 산초나무에 있다는 것은 지존(至尊)이 임헌(臨軒)하여 만국(萬國)의 조현을 받을 징조입니다. 새끼가 세 마리라는 것은 그 수(數)가 삼통(三統, ; 천통, 지통, 인통)에 응한다는 징험입니다. 신령스런 새(神鳥)에게 다섯 가지 색깔이 있다는 것은 우리 성조(聖朝)가 장차 오행(五行)의 록(籙)을 계승하여 사해(四海)를 다스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용준이 이를 읽어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진서(晉書)』, 卷 百十,「載記」, 第十, <慕容儁傳> [본문] 儁又遣慕容評等率騎一萬會攻鄴. 是時䴏巢于儁正陽殿之西椒, 生三雛, 項上有豎毛, 凡城獻異鳥, 五色成章. 儁謂羣僚曰:「是何祥也?」 咸稱:「䴏者, 燕鳥也. 首有毛冠者, 言大燕龍興, 冠通天章甫之象也. 巢正陽西椒者, 言至尊臨軒朝萬國之徵也. 三子者, 數應三統之驗也. 神鳥五色, 言聖朝將繼五行之籙以御四海者也.」 儁覽之大悅. 旣而蔣幹率銳卒五千出城挑戰, 慕容評等擊敗之, 斬首四千餘級, 幹單騎還鄴. 於是羣臣勸儁稱尊號, 儁答曰:「吾本幽漠射獵之鄕, 被髮左袵之俗, 曆數之籙寧有分邪! 卿等苟相褒擧, 以覬非望, 實匪寡德所宜聞也.」 慕容恪·封弈討王午于魯口, 降之. 尋而慕容評攻克鄴城, 送冉閔妻子僚屬及其文物于中山)
여기 사서에서 나타나는 제비 세 마리는 연나라의 새로 상징된다. 그리고 오색을 상징한다는 것은 황제를 상징하며 한족들이 황제를 상징할 때 쓰이는 색깔이다. 그리고 목 위에 털이 있다는 것은 새를 숭상하는 유목민족의 상징으로 보여 진다. 대부분 유목민족들의 수장들이 선우가 되려는 징조로 ‘새에 털이 나있다’ 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것도 같은 의도로 풀이된다. 그리고 삼통과 오행의 록을 계승했다는 것은 하늘의 계시를 받은 것으로 천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도 된다. 이것은 칭제(稱帝)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구실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352년에 모용준은 황제로 즉위하고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세워 원새(元璽)라 하였다. 그리고 백관(百官)을 두었다. 봉혁(封弈)을 태위(太尉), 모용각(慕容恪)을 시중(侍中), 양무(陽騖)를 상서령(尙書令), 황보진(皇甫眞)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장희(張希)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송활(宋活)을 중서감(中書監), 한항(韓恒)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하고 나머지 신하들은 각기 차등을 두어 봉하거나 임명하였다. 모용외(慕容廆)를 고조(高祖) 무선황제(武宣皇帝), 모용황(慕容皝)을 태조(太祖) 문명황제(文明皇帝)로 추존하였다. 그리고 세자(世子) 모용엽(慕容曄)을 태자(太子)로 삼았다.

한단(邯鄲市)는 본래 춘추전국시대 조(趙)나라 도성으로 알려졌지만 그 존재는 모용준의 전연의 황도가 되면서 중산(中山)으로 더 알려졌다.

모용준 제위 시기 도성이었던 중산(中山)은 지금 하북성 한단(邯鄲市)로 추정하고 있다. 동상은 모용준

한단(邯鄲市)의 청나라 시대 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