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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용황의 모용인, 단 선비 공략과 전연 (前燕)의 건국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2     조회 : 420  

모용황이 바다를 건너 모용인을 치려 하자 많은 신하들이 간언하며 ‘바닷길은 위태롭고 험하니 의당 뭍길(陸路)로 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모용황이 말했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얼지 않았는데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로 세 번이나 얼어붙었다. 옛날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얼어붙은 호타수(滹沱水)를 건너 대업을 이루었으니, 어쩌면 하늘이 내가 이를 건너 승리하도록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계획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 계획을 막는 자가 있으면 벨 것이다!” (皝曰:「舊海水無凌, 自仁反已來, 凍合者三矣. 昔漢光武因滹沱之冰以濟大業, 天其或者欲吾乘此而克之乎! 吾計決矣, 有沮謀者斬!」)


그리고는 삼군(三軍)을 이끌고 창려(昌黎)로 부터 얼음을 밟으며 진격했다. 모용인은 모용황이 올 것을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모용황의 군이 평곽(平郭)에서 7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에야 모용인의 척후기병이 모용황이 쳐들어왔다고 전하였다. 이에 모용인이 놀라며 출전하였다가 모용황에게 사로잡혔고, 모용황은 모용인을 죽인 뒤에 돌아왔다.이후 모용인의 일족들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었는데 정형(丁衡), 유의(游毅), 손기(孫機) 등은 모두 모용인에게 신임되고 중용되었으니 모용황이 그들을 붙잡아서 죽였고 왕빙(王冰)은 자살했다. 모용유(慕容幼), 모용치(慕容稚), 동수(佟壽·), 곽충(郭充), 적해(翟楷), 방감(龐鑒)은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 모용유는 도중에 돌아왔고, 모용황의 군사가 추격하여 적해, 방감은 베어죽이고, 동수, 곽충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나머지 관리와 백성들은 모용황이 모두 사면하고, 고후(高詡)를 여양후(汝陽侯)로 봉하여 요동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로써 모용인을 비롯한 형제들과의 전쟁은 끝나고 정적들을 모두 제거한 모용황의 중심체제로 조직하게 되었다.


한편 단요(段遼)가 자신의 장수 이영(李詠)을 보내 모용선비의 무흥(武興)을 야습하게 하였는데 큰 비를 만나 군을 이끌고 되돌아가자 도위(都尉) 장맹(張萌)이 뒤쫓아 공격하여 이영을 사로잡았다. 단란(段蘭)은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곡수정(曲水亭)에 주둔하며 유성(柳城)을 공격하려 하였고, 우문귀(宇文歸)는 안진(安晉)으로 공격해 들어와 노략질하며 단란을 후위에서 도우며 유성으로 재 진입했다.


모용황이 보병과 기병 합쳐 5만으로 단요를 공격하였고 군대가 유성(柳城)에 주둔하자 단란, 우문귀가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봉혁(封弈)을 보내 경기병를 이끌고 뒤쫓아 공격하게 하니 이들을 격파하고 군수물자를 약탈했다. 그리고 단 선비의 관사에서 단요군의 군량을 먹으며 20일을 지낸 뒤에 돌아왔다. 모용황은 단 선비와 우문선비가 수치스럽게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다시 공격해올것을 예상하고 제장들에게 명을 내려 유성 근처에 복병을 두고 다시 공격해올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봉혁(封弈)을 보내 기병을 이끌고 마두산(馬兜山)주변의 여러 길에 잠복하도록 하였다. 얼마 뒤에 단요의 기병이 도착하였고, 봉혁이 이를 습격하여 대파하고 단요의 장수 영보(榮保)를 죽였다.


겸장사(兼長史) 유빈(劉斌), 낭중령(郞中令) 양경(陽景)으로 하여금 동진의 사자로 와 있던 서맹(徐孟) 등을 호송하며 경사(京師)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모용황은 장남인 모용준(慕容儁)에게 단요(段遼)의 여러 성을 공격하게 하고 봉혁(封弈)은 우문(宇文)의 별부(別部)를 공격하게 하니, 이들이 모두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다. 이로써 단 선비와 우문선비는 당분간 모용선비를 공격하지 못했다.


모용황은 북쪽의 거점을 창려군(昌黎郡)으로 옮기고, 을련(乙連)의 동쪽에 호성(好城)을 쌓아 장군 난발(蘭勃)로 하여금 지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을련(乙連)을 고립시키고 또한 곡수(曲水)에 성을 쌓아 을련을 간접적으로 포위했다. 을련(乙連)에 매우 심한 기근이 들어 단요가 을련으로 곡식을 보내자 난발(蘭勃)이 이를 요격해서 곡식을 거두었다.


이에 단요가 장수 굴운(屈雲)을 보내 흥국(興國)을 공격하니 모용황의 장수 모용준(慕容遵)과 함께 오관수(五官水) 가에서 크게 싸워 굴운이 패하였고, 모용준이 굴운을 참수하고 군사들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 『자치통감(資治通鑑)』권95에 의하면, 모용황이 을련성(乙連城)* 동쪽에 호성(好城)을 쌓고 절충장군(折衝將軍) 난발에게 지키게 한 것은 337년(함강 3년) 3월 ; 단요가 수레 수천 대로 을련성에 곡식을 실어나르자 난발이 이를 탈취한 것은 같은 해 4월 ; 단요가 종제(從弟)인 양위장군(揚威將軍) 굴운을 보내 흥국성에 있던 모용황의 아들 모용준(慕容遵)을 야습하게 하자 모용준이 이를 격파한 것은 같은 해 6월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호삼성 주 ; 을련성(乙連城)은 단국(段國)의 동쪽 경계이며 곡수(曲水)의 서쪽이라 하였다.


봉혁(封弈)등은 모용황에게 연왕(燕王)을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모용황은 이를 거절했으나 여러 씨족장들과 관원들의 주청에 못이겨, 337년에 왕위(王位)에 오르고는 나라의 죄인들을 사면했다. 봉혁(封弈)을 국상(國相), 한수(韓壽)를 사마(司馬)로 삼고, 배개(裴開), 양무(陽騖), 왕우(王㝢), 이홍(李洪), 두군(杜羣), 송해(宋該), 유첨(劉瞻), 석종(石琮), 황보진(皇甫眞), 양협(陽協), 송황(宋晃), 평희(平熙), 장홍(張泓) 등을 모두 열경(列卿)이나 장수(將帥)로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연나라가 건국되었고 하북과 요동, 요서 지역의 패자가 되었다. 그리고 단씨(段氏)를 왕후(王后)로 삼고 왕자 모용준(慕容儁)을 태자(太子)로 삼았다. 이와 같이 모두 위 무제 조조, 진 문제 사마소(司馬昭) 시대의 전례대로 즉위식과 책봉식을 거행한 뒤 연나라 내부가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것을 재 복구하여 국가로써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이러한 시대적 구분에 의하여 모용황의 연나라를 전연(前燕), 모용수의 연나라를 후연(後燕)으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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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요양박물관이 만들어놓은 당나라 시절의 요동성 모형

 

 

 

 
 
TOTAL 170
44. 전연의 전성기와 모용각의 활약
353년 동진의 영삭장군(寧朔將軍) 영호(榮胡)가 팽성(彭城)과 노군(魯郡)을 들어 동진에 반역하고 모용준에게 항복했다. 모용준은 이를 받아들여 팽성태수로 봉하여 변경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상산(常山) 사람인 이독(李犢)이 수천명 무리를 모아 보벽루(普壁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모용준이 모용각(慕容恪)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이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3. 모용준, 전연의 황제로 즉위하다.
352년 단 선비의 단근(段勤)이 당초 모용준에게 귀부했었다가 그 뒤에 다시 반기를 들었다. 모용준이 모용각(慕容恪)과 상국(相國) 봉혁(封弈)을 보내 안희(安喜)에서 염민(冉閔)을 치고, 모용수(慕容垂)는 역막(繹幕)에서 단근(段勤)을 치고, 모용준은 중산(中山)으로 가서 모용각과 봉혁의 군대를 위하여 미리 주둔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09
42. 모용준의 즉위와 염민, 염위의 멸망
모용준(慕容儁)은 자(字)가 선영(宣英)이고 모용황(慕容皝)의 차남이다. 당초 모용준의 조부인 모용외(慕容廆)가 늘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내가 복(福)과 인(仁)을 쌓았으니 내 자손이 마땅히 중원(中原)을 차지할 것이다.” 얼마 뒤에 모용준을 낳자 모용외가 말했다, “이 아이의 골상(骨相)이 범상치 않으니 우리 가문이 마땅한 후계…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22
41. 전연, 부여와의 전쟁과 모용황의 죽음
모용황은 학문적인 부분과 인재 양성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이는 초기의 과거제도를 창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용황은 인재를 양성하는 방식으로 대신(大臣)의 자제(子弟)들 중 관학생(官學生)이 된 자에게 고문생(高門生)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리고 학문의 진흥을 위해 옛 궁에 학교를 세워 활을 쏘고 수련하면서 공부 하는 곳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82
40. 동진(東晉) 조정, 모용황의 전연을 북방의 패자로 인정하다.
343년 전연은 우문귀(宇文歸)가 국상(國相) 막천혼(莫淺渾)을 보내 모용황을 공격하니 제장들이 맞서 싸울 것을 청했으나 모용황은 허락하지 않았다. 막천혼은 모용황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겨 전혀 방비하지 않았다. 이 때 모용황은 모용한(慕容翰)과 기병들을 보내 막천혼의 군사들을 치게 하니 막천혼(莫淺渾)이 대패하여 혼자 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416
39. 모용황과 고구려의 전쟁 - 고구려의 치욕
339년,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에 이르렀다. 전연의 군대가 막강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화의를 청하자 다시 회군하여 돌아왔다. 340년에는 고국원왕이 태자를 모용황에게 보내 입조하게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故國原王> [본문] 九年, 燕王皝來侵, 兵及新城…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396
38. 모용황, 단 선비 - 후조(後趙) 석계룡과의 전쟁
모용황은 단요(段遼)가 여러 차례 변경을 공격하여 피해를 주자 장군 송회(宋回)를 후조(後趙)의 석계룡(石季龍)*에게 보내 함께 단요를 공격할 군대를 요청했다. 이에 석계룡이 군대를 총괄하여 진격하고, 모용황도 군사를 이끌고 단요의 도읍인 영지(令支) 이북의 여러 성들을 공격했다. 단요가 장수 단란(段蘭)을 보내 항거하니 이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453
37. 모용황의 모용인, 단 선비 공략과 전연 (前燕)의 건국
모용황이 바다를 건너 모용인을 치려 하자 많은 신하들이 간언하며 ‘바닷길은 위태롭고 험하니 의당 뭍길(陸路)로 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모용황이 말했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얼지 않았는데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로 세 번이나 얼어붙었다. 옛날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얼어붙은 호타수(滹沱水)를 건너 대업을 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421
36. 모용황의 요동 경략
평주 요동국 양평현의 현령 왕빙(王冰), 장군 손기(孫機)가 요동(遼東)으로써 모용황에게 반기를 드니 동이교위(東夷校尉) 봉추(封抽), 호군(護軍) 을일(乙逸), 요동상(遼東相)* 한교(韓矯), 현도태수(玄菟太守) 고후(高詡) 등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이들은 모용황에게 돌아갔다. * 요동상(遼東相)은 요동국의 상相. 모용외가 요동공…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853
35. 모용인의 반란과 모용황의 토벌
333년 5월에 모용황이 요동공의 지위를 이었고 평북장군(平北將軍) 대행이자 평주자사(平州刺史)가 되어 부(部) 내부를 장악했다. 같은 해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가 그의 별부(別部) 일두귀(逸豆歸)에 의해 축출되어 도망치다가 객사했다. 이에 모용황은 일두귀의 행위를 용납하지 못한다고 하여 본격적으로 거병하였다. 모용황이 기병…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405
34. 모용외의 중원 공략과 모용황의 등장
배억(裴嶷)이 건업(建鄴)으로부터 돌아올 때 동진에서 사자를 보내 모용외를 감평주제군사(監平州諸軍事), 안북장군(安北將軍),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임명하고 식읍을 2천 호(戶) 늘려주었다. 321년에는 동진에서 모용외에 사신을 보내 사지절(使持節), 도독유주동이제군사(都督幽州東夷諸軍事), 거기장군(車騎將軍), 평주목(平州牧…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97
33. 고구려의 요동 침공과 모용외의 대응
모용외의 차남인 모용황(慕容皝)이 각 제후들과 귀족 자제들을 이끌고 속수(束脩)하여 수업(受業)하고 모용외가 정무를 보다 틈이 있으면 친히 유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이렇게 모용외가 다스리는 요동지역은 비교적 평안했으며 학문으로는 유학적인 부분을 받아들임으로써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강력한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433
32. 고구려의 미천왕과 모용외, 모용선비의 완전한 하북성 정착
309년, 고구려 미천왕은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함락시키고, 315년에는 현도성(玄菟城)을 함락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七,「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五, <美川王> [본문]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중략)...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75
31. 모용외와 고구려의 격돌
고구려는 관구검의 침입 이후 동산(東山)에서 재기하여, 현도(玄菟) · 요동(遼東)을 다시 침략하였다. 무제 때에 소요수(小遼水)로 침입하여, 신성(新城)을 점령하였고, 또 대량수(大梁水)상류로 침입하여, 양맥(梁貊)을 통치하였다. 294년에 모용외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여, 신성(新城)을 포위하자, 신성(新城)의 재북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439
30. 모용선비와 부여의 전쟁
모용외는 우문선비를 공격하여 제압하기 위해 진나라에 사자를 보내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으나 진나라의 무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용외는 이에 분노하여 우문선비를 제압하고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낙양으로 향하는 지역인 요서(遼西)를 침입하여 여러 성들을 약탈하고 진나라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 그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49
29. 모용선비의 등장과 모용외 신화
위나라가 모용선비에게 요동을 내주었다는 것은 위나라 입장에서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고 고구려, 부여와의 전쟁을 통해 모용선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 그리고 모용선비를 동북지역의 방패막이로 삼아 고구려와 부여를 견제하는 것도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행위에 분노한 고구려는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면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58
28. 모용선비에 대해 종합적 연구 개요
모용선비는 고구려 역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5호 16국 시대에 세워진 선비 국가 중 가장 강한 국가는 탁발선비의 북위이지만 5호의 시대적 구분을 보았을 때 초기와 중기는 모용선비의 전연, 후연 시대, 후기는 탁발선비의 북위 시대로 구분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하북성, 산동성 지역에는 모용선비가 강력한 국가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38
27. 남량(南凉)의 멸망과 독발선비의 후예, 티베트로 이주하여 토번을 …
독발이녹고 사후, 독발녹단이 즉위하여 남량을 통치했다. 아버지는 독발사복건이고 독발오고(禿髮烏孤), 독발이녹고(禿髮利鹿孤)의 동생이다. 남량은 세습 없이 형제상속으로 제위를 이어갔다. 이것은 독발사복건이 독발녹단의 재능을 높이 사서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였고, 독발오고와 독발이녹고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형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416
26. 독발선비가 세운 남량(南凉)
독발선비는 걸복씨와 같이 중원 북서쪽, 하서(河西)지역에 근거했던 부족이었다. 이들은 원래 독발씨라고 하는 씨족으로 분류되었으나 점차 씨족민이 늘어가면서 부족으로 탈바꿈 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하서 양주(凉州)를 거점으로 하였으며 기존에 세력을 이루었던 걸복선비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중원의 혼란기 시대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57
25. 걸복선비, 서진(西秦)의 멸망과 마무리
걸복치반의 뒤를 이은 걸복모말(乞伏暮末)은 즉위하자마자 북량의 침입을 받았다. 북량은 끊임없이 서진을 공격했으며 그것은 북쪽의 위협인 서진을 정복해야 북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북량의 침략으로 서진 정권은 영토를 조금씩 잃어갔고 농서 지역과 산서성에 쥐었던 패권마저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Name: 정길선  |  Date: 2017-05-19  |  Hit: 401
24. 걸복선비의 전성기, 걸복건귀, 걸복치반이 중국 서부 지역의 맹주가…
걸복건귀는 서성(西城)으로 천도하여 세력을 토욕혼 지역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저족이 세운 후량(後凉)이 존재했고 오히려 후량의 역습을 받아 대패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후량은 397년 금성(金城)을 함락시키고 서진의 동쪽 국경 지대를 유린했다. 그러나 이 때 패배로 인해 서진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이러한 세…
Name: 정길선  |  Date: 2017-05-19  |  Hit: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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