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평주자사(平州刺史) 동이교위(東夷校尉) 최비(崔毖)는 남주(南州) 선비 부족들 사이에서 신망이 있었다. 최비는 한족의 유민들까지 품어서 모을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유랑민들 중 최비에게로 오는 자가 없었다. 최비는 모용외가 유랑민들을 억류한 탓이라 생각하고는 이에 고구려(高句麗)와 우문(宇文), 단 선비(段鮮卑) 등과 은밀히 연결해 모용외를 쳐서 멸하고 그의 땅을 나누어가지자 제안했다.
319년 초, 고구려, 우문, 단 선비가 이에 동의했고 곧 군사를 일으켜 모용외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수도인 극성(棘城)을 포위하자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싸우지 않고는 이간책을 써서 세 나라를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사자를 보내 우문(宇文)의 군사들에 술과 고기를 주고 부족의 군사들에게 “최비(崔毖)의 사자가 모용선비에도 왔었다.”라고 전달했다. 모용외의 사자가 우문선비의 군영을 방문했다는 것을 안 고구려와 단 선비는 우문선비가 모용외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리고 군을 물려 돌아갔고 우문선비의 우문실독관(宇文悉獨官)은 모용선비를 단독으로 공격하고자 하였다.
모용외는 아들인 모용황에게 군사를 주어 북문을 열고 우문선비의 뒤쪽으로 돌아서 역습하기로 하였고 모용외는 정면에서 우문선비를 공격하니 양쪽의 포위망에 갇힌 우문선비의 군사들은 대패하였다. 우문실독관은 간신히 몸을 피했으나 일족들은 모두 붙잡혔다. 그리고 곧바로 모용외는 우문선비의 영토로 진격하여 우문선비 부족들을 제압하고 황제(皇帝)의 옥새(玉璽)를 노획하고는 이를 장사(長史) 배억(裴嶷)을 시켜 건업(建鄴)으로 보냈다.
최비(崔毖)는 모용외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질까 두려워하여 조카 최도(崔燾)를 모용외에게 보내 거짓으로 승전을 축하했다. 때 마침 세 나라의 사자들 또한 모용외에게 이르러 화친을 청하며, “우리의 본의가 아니고, 최평주(崔平州)가 공격하도록 제안하였다.”라고 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데리고 공격하며 포위한 곳을 보여주고는 군사들로 하여금 포위하도록 하고는 그에게 말했다.
“너희 숙부(叔父)가 나를 멸하라고 세 나라에 제안을 해놓고는, 어찌 속임수를 쓰며 내게 와서는 축하하는가?”
그러자 최도가 두려워하며 자백했다. 그러자 모용외는 최도를 보내주며 돌아가서 최비에게 전하라 하며 말했다,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이 하책이다.” 뒤이어 군대를 보내어 최비를 추격하자 최비는 가족들을 버린 채 수 십명의 기병과 함께 고구려로 달아났다. 모용외는 최비의 군병들을 모두 항복시키고 최도와 고첨(高瞻) 등을 극성(棘城)으로 이주시키고는 빈객으로 예우했다. (『진서(晉書)』, 卷 百八,「載記」,第八,<慕容廆傳>. [본문] 時平州刺史·東夷校尉崔毖自以爲南州士望, 意存懷集, 而流亡者莫有赴之. 毖意廆拘留, 乃陰結高句麗及宇文·段國等, 謀滅廆以分其地. 太興 初, 三國伐廆, 廆曰:「彼信崔毖虛說, 邀一時之利, 烏合而來耳. 旣無統一, 莫相歸伏, 吾今破之必矣. 然彼軍初合, 其鋒甚銳, 幸我速戰. 若逆擊之, 落其計矣. 靖以待之, 必懷疑貳, 迭相猜防. 一則疑吾與毖譎而覆之, 二則自疑三國之中與吾有韓 魏之謀者, 待其人情沮惑, 然後取之必矣.」 於是三國攻棘城, 廆閉門不戰, 遣使送牛酒以犒宇文, 大言於衆曰:「崔毖昨有使至.」於是二國果疑宇文同於廆也, 引兵而歸. 宇文悉獨官曰:「二國雖歸, 吾當獨兼其國, 何用人爲!」 盡衆逼城, 連營三十里. 廆簡銳士配皝, 推鋒於前, 翰領精騎爲奇兵, 從旁出, 直衝其營, 廆方陣而進. 悉獨官自恃其衆, 不設備, 見廆軍之至, 方率兵距之. 前鋒始交, 翰已入其營, 縱火焚之, 其衆皆震擾, 不知所爲, 遂大敗, 悉獨官僅以身免, 盡俘其衆. 於其營候獲皇帝玉璽三紐, 遣長史裴嶷送于建鄴. 崔毖懼廆之仇己也, 使兄子燾僞賀廆. 會三國使亦至請和, 曰:「非我本意也, 崔平州敎我耳.」 廆將燾示以攻圍之處, 臨之以兵, 曰:「汝叔父敎三國滅我, 何以詐來賀我乎?」 燾懼, 首服. 廆乃遣燾歸說毖曰:「降者上策, 走者下策也.」 以兵隨之. 毖與數十騎棄家室奔于高句麗, 廆悉降其衆, 徙燾及高瞻等于棘城, 待以賓禮. )
이후 모용외의 아들인 모용인(慕容仁)이 고구려의 하성(河城)을 공격하여 성주인 여노(如孥)가 모용외의 부장인 장통(張統)에게 사로잡혔다. 그리고 천 여명의 무리들이 모용선비군의 포로가 되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미천왕은 자주 병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다. 모용외는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慕容仁)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미천왕이 구원군을 보내어 역습하자 패하여 돌아갔다.
320년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또다시 침범하자 모용외가 군사를 보내 이를 공격해 격파했다.고구려는 이후 미천왕이 죽을 때까지 모용선비를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였다.이것은 여러 차례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큰 소득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반면 모용선비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잘 넘기며 하북성과 산동성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 『진서(晉書)』, 卷 六,「원제기(元帝紀)」에서는 “태흥 2년(319년) 12월] 선비족 모용외가 요동을 습격하자 동이교위,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고구려로 달아났다”(鮮卑慕容廆襲遼東, 東夷校尉, 平州刺史崔毖奔高句驪.)고 하고 “태흥 3년(320년) 3월, 모용외가 옥새 삼뉴를 봉송했다.”(三月, 慕容廆奉送玉璽三紐.)고 하였다. 최비가 고구려로 달아난 시점이 319년 12월이므로 위 문헌에 나오는 이전 사건들은 모두 319년 12월 이전이나 새해 무렵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17 (고구려 미천왕 20년)에서도 같은 해, 같은 달로 수록되어 있고,『자치통감(資治通鑑)』권91 진기13에서는 이 사건들을 모두 동진 원제 태흥2년(319년) 12월 조에 수록해놓았다.
요녕문화공정에서 극성을 복원한 모습
극성과 용성 부근의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