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년에 모용외가 다시 신성(新城)을 공격하자, 고구려 봉상왕(烽上王)은 고노자(高奴子)를 신성태수(新城太守)로 임명, 군사를 내어 허술한 틈을 타서 공격하자, 모용외는 다시 패하였다. 모용외가 다시 신성(新城)을 공격하자, 고구려 봉상왕(烽上王)은 고노자(高奴子)를 신성태수(新城太守)로 임명, 군사를 내어 허술한 틈을 타서 공격하자, 모용외는 다시 패하였다. 고구려는 승세를 몰아 모용외의 서쪽 변경을 약탈하고 돌아왔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七,「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五, <烽上王> [본문] 元年, 春三月, 殺安國君達賈, 王以賈在諸父之行, 有大功業, 爲百姓所瞻望, 故疑之謀殺 國人曰, 微安國君, 民不能免梁貊肅愼之難, 今其死矣, 其將焉託, 無不揮涕相弔, 秋九月, 地震. 五年, 秋八月, 慕容廆來侵, 至故國原, 見西川王墓, 使人發之, 役者有暴死者, 亦聞壙內有樂聲, 恐有神乃引退, 王謂群臣曰, 慕容氏, 兵馬精强, 屢犯我疆埸, 爲之奈何, 國相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高奴子爲新城太守, 善政有威聲, 慕容廆不復來寇.)
301년 유주 지역에 홍수가 나서 하북성이 곤궁해지자 모용외가 창고를 열어 식량을 배급하여 유주가 구제 되었다. 그러자 진 혜제(惠帝)가 이에 대한 감사함으로 명복(命服, 관복)을 선물하였다. 302년, 고구려의 미천왕(美川王)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玄菟郡)을 침범하여 격파하고, 8천 명을 포로로 하였다. 그리고 포로들을 모두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우문막규(宇文莫圭)가 동생 굴운(屈雲)을 보내 변경 성들을 공격하여 모용선비에 대해 모반을 일으켰다. 굴운은 모용선비의 여러 성들을 점거한 뒤 부장인 대소연(大素延)을 보내 하북 지역의 인근 부락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소연이 공격하자 모용외가 친히 공격하여 격파했다. 그러자 대소연이 분노하여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극성(棘城)을 포위하니 모용외의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군사들 중에 맞서려는 뜻을 가진 군사들이 없었다. 모용외는 스스로 성 밖에 나가 좌우의 군을 따르게 하여 대소연의 군사들을 격파하니 100리에 걸쳐 뒤쫓으며 1만여 명을 참수했다.
(『진서(晉書)』, 卷 百八,「載記」,第八,<慕容廆傳>. [본문] 太安 初, 宇文莫圭遣弟屈雲寇邊城, 雲別帥大素延* 攻掠諸部, 廆親擊敗之. 素延怒, 率衆十萬圍棘城, 衆咸懼, 人無距志. 廆曰:「素延雖犬羊蟻聚, 然軍無法制, 已在吾計中矣. 諸君但爲力戰, 無所憂也.」 乃躬貫甲冑, 馳出擊之, 素延大敗, 追奔百里, 俘斬萬餘人.)
진나라는 8왕의 난을 겪으며 각 민족들이 발흥하여 각기 국가를 세우기 시작하는데 304년 유연이 한(漢)나라 건국을 시작으로 하여 진나라에 독립한 것을 시초로 갈족(葛族)이 남하하여 중원에 들어와 부족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07년에는 모용외가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여 독립했다.
이러한 진나라의 내란은 북방지역에서도 나타났는데 요동태수(遼東太守) 방본(龐本)이 사적인 원한으로 동이교위(東夷校尉) 이진(李臻)을 죽이자, 우문선비 씨족계열인 소련(素連), 목진(木津) 등이 이진(李臻)의 원수를 갚는다는 핑계로 반란을 일으켜 여러 성들을 장악하고 관원들과 백성들을 도륙하여 독립을 개시하려 하였다. 요동태수 원겸(袁謙)이 여러 번 싸웠으나 패배하니 동이교위 봉석(封釋)이 우문선비를 두려워하여 화친을 요청했다. 그리고 해마다 우문선비 계열이 침입하여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이자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떠돌아다니다 모용외에게 귀부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모용외의 아들 모용한(慕容翰)이 모용외에게 우문선비를 정벌함이 옳다고 주장하자 모용외가 이에 찬성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기병을 이끌고 요동을 공격하여 소련, 목진을 쳐서 대패시키고 대거 참수했다. 그리고 우문선비의 2부(部)가 모두 항복하자 이들을 극성(棘城)으로 옮기고, 요동군(遼東郡)을 다시 세운 뒤에 돌아왔다.
진 회제(懷帝)가 몽진(蒙塵)하여 평양(平陽)에 있게 되자 왕준(王浚)이 회제의 명으로 모용외를 산기상시(散騎常侍), 관군장군(冠軍將軍), 전봉대도독(前鋒大都督), 대선우(大單于)로 임명했으나 모용외는 받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西晉)의 마지막 황제인 민제(愍帝)가 사자를 보내 모용외를 진군장군(鎭軍將軍), 창려요동2국공(昌黎遼東二國公)으로 임명했다. 이와 같은 작위를 준 것은 한의 유총을 공격해달라는 요청이기도 했다. 두 호(胡)족이 전쟁을 벌임으로써 쇠퇴해가는 진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속셈이었으나 이는 회제의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 흉노 유연(劉淵)이 304년에 자립해 한(漢)나라를 세웠고 (뒤에 조趙로 국명을 바꾸었고 그 뒤 석륵의 조나라(後趙)와 구별해 보통 前趙로 부른다.), 그 아들인 유총(劉聰) 때인 311년(영가 5년)에 진나라 수도인 낙양을 함락하고 회제를 포로로 잡아 한나라 수도인 평양으로 압송하였다. 회제가 평양으로 몽진했다는 것은 이 사건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 온라인게임에 나타난 모용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