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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s.jpg  정길선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산책
 
  고대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의 개념
  
   작성자 : 배달문화원
작성일 : 2020-01-06     조회 : 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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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의 개념
GIL SUN JUNG
조(趙) 나라와 연(燕) 나라의 북쪽, 현재의 몽골과 고비사막, 바이칼 호 인근의 남부 시베리아, 그리고 알타이 산맥 북부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에서는 그 이전 3~400년부터 스텝 지대의 지배를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 멀리 페르시아나 주변의 국가들은 늘 있던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세력 정쟁이라고 여겨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스키타이나 사르마트를 제외한 강력한 세력이 등장한 것도 아니었고 가장 강력한 통치자인 대선우나 대칸이 나오더라도 황금과 보물 등으로 적당히 무마하면 문명국의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는 유목 기마 족들이 노리는 것은 농경민이 소중하게 여기는 영역과 농토가 아니라 약탈 물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원하는 것만 내어주면 조용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변경에 일종의 용병 세력으로 세워 다른 유목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으면 문명국의 관점에서는 국경을 안정시킬 수 있는 최상의 방책이었다.

보물과 약탈 물 및 조공 품, 그리고 군사적인 용병을 동원하는 것을 매개로 하는 공존 관계에 대하여 미국의 토마스 바필드(Thomas Barfield)는 거울 제국(Mirror Empires)이라는 종속과 화평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어느 지역에 강력하면서도 규모가 큰 제국이 세워지면 이에 상응하여 변경 건너편에서 이를 상응하는 다른 강력한 정치 체제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가장 잘 나타난 사례가 중국, 페르시아와 같은 강력한 전제주의 집단과 북방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는 중원이나 페르시아에서 강력한 제국이 등장하면서 정권과 물자의 집중이 이루어지고 이와 더불어 유목민들이 이를 약탈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이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지도자나 부족이 등장할 경우 제국의 규모에 준하는 제국적 연맹체(Imperial confederacy)가 형성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유목 연맹은 중국이나 페르시아 같은 정착형 제국에 준하는 관료행정이라던가 고도의 행정 체제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제국적 유목 연맹의 지도자들은 군사력과 대외 교섭권을 독점하여 강력한 지휘 체계를 구축하고 휘하의 부족들에게 물품을 분배할 권리 역시 독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휘하 부족들은 약탈 물을 분배가 보장되는 한 지도자의 명령을 절대 거역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목 연맹의 지도자는 위와 같은 역학 관계를 이용하여 정착 제국의 제왕들 못지않은 강력한 권력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B.C 4세기에서 B.C와 A.D의 전환 시기까지 유라시아를 지배하던 스키타이와 신흥 강국으로 여러 연맹들을 지배하였던 사르마트의 관계가 이러하였으며 역시 초원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던 킴메르 연맹,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이동하여 제국을 세워 정착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 아나톨리아의 프리기아나 카스피 해 남쪽의 메디아 왕국 또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과는 반대로 변경의 유목 집단이 정착 문명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정착 문명의 근거지로 들어가 이를 점령하고 왕조를 세우는 사건이 상당수 존재했다.

이를 보통 정복왕조(Conquest dynasty)라 불리는데 킴메르 계의 아시리아, 북인도의 마우리아 왕조,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멀리 이집트의 힉소스 왕조가 그러했으며 중국사에서는 이러한 정복왕조가 다수를 이루었다. 이러한 정복 왕조(Conquest dynasty)의 개념은 유목민이 그들의 우수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다수의 정착민을 엄격한 신분제도로 편성하여 이들을 피지배계층으로 두고 통치하는 형태이다. 그러나 정복왕조의 건설이 아니라 유목민이 정착에 성공하여 반농반목이 아닌 온전한 정착국가를 건국하는 경우는 아시아에서 볼 때 많지 않은 사례이지만 대체로 유럽에서는 그러한 형태가 나타난다.

특히 게르만계 민족들과 슬라브계 민족들의 대이동을 통해 로마 제국에 정착한 뒤, 그들을 정복하고 반농반목의 경제 체제를 버리고 온전한 정착국가를 건국했다. 약탈과 기습을 주 전략으로 삼던 유목 사회로 놓고 볼 때 아시아에서 유목민들이 완전한 정착 국가로 전환한 것은 중국 북방을 유린하고 북위, 요, 금, 청나라, 그리고 인도의 무굴 제국과 터키의 오스만투르크 등이 그 사례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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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전연의 전성기와 모용각의 활약
353년 동진의 영삭장군(寧朔將軍) 영호(榮胡)가 팽성(彭城)과 노군(魯郡)을 들어 동진에 반역하고 모용준에게 항복했다. 모용준은 이를 받아들여 팽성태수로 봉하여 변경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상산(常山) 사람인 이독(李犢)이 수천명 무리를 모아 보벽루(普壁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모용준이 모용각(慕容恪)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이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3. 모용준, 전연의 황제로 즉위하다.
352년 단 선비의 단근(段勤)이 당초 모용준에게 귀부했었다가 그 뒤에 다시 반기를 들었다. 모용준이 모용각(慕容恪)과 상국(相國) 봉혁(封弈)을 보내 안희(安喜)에서 염민(冉閔)을 치고, 모용수(慕容垂)는 역막(繹幕)에서 단근(段勤)을 치고, 모용준은 중산(中山)으로 가서 모용각과 봉혁의 군대를 위하여 미리 주둔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09
42. 모용준의 즉위와 염민, 염위의 멸망
모용준(慕容儁)은 자(字)가 선영(宣英)이고 모용황(慕容皝)의 차남이다. 당초 모용준의 조부인 모용외(慕容廆)가 늘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내가 복(福)과 인(仁)을 쌓았으니 내 자손이 마땅히 중원(中原)을 차지할 것이다.” 얼마 뒤에 모용준을 낳자 모용외가 말했다, “이 아이의 골상(骨相)이 범상치 않으니 우리 가문이 마땅한 후계…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22
41. 전연, 부여와의 전쟁과 모용황의 죽음
모용황은 학문적인 부분과 인재 양성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이는 초기의 과거제도를 창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용황은 인재를 양성하는 방식으로 대신(大臣)의 자제(子弟)들 중 관학생(官學生)이 된 자에게 고문생(高門生)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리고 학문의 진흥을 위해 옛 궁에 학교를 세워 활을 쏘고 수련하면서 공부 하는 곳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382
40. 동진(東晉) 조정, 모용황의 전연을 북방의 패자로 인정하다.
343년 전연은 우문귀(宇文歸)가 국상(國相) 막천혼(莫淺渾)을 보내 모용황을 공격하니 제장들이 맞서 싸울 것을 청했으나 모용황은 허락하지 않았다. 막천혼은 모용황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겨 전혀 방비하지 않았다. 이 때 모용황은 모용한(慕容翰)과 기병들을 보내 막천혼의 군사들을 치게 하니 막천혼(莫淺渾)이 대패하여 혼자 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416
39. 모용황과 고구려의 전쟁 - 고구려의 치욕
339년,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에 이르렀다. 전연의 군대가 막강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화의를 청하자 다시 회군하여 돌아왔다. 340년에는 고국원왕이 태자를 모용황에게 보내 입조하게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故國原王> [본문] 九年, 燕王皝來侵, 兵及新城…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396
38. 모용황, 단 선비 - 후조(後趙) 석계룡과의 전쟁
모용황은 단요(段遼)가 여러 차례 변경을 공격하여 피해를 주자 장군 송회(宋回)를 후조(後趙)의 석계룡(石季龍)*에게 보내 함께 단요를 공격할 군대를 요청했다. 이에 석계룡이 군대를 총괄하여 진격하고, 모용황도 군사를 이끌고 단요의 도읍인 영지(令支) 이북의 여러 성들을 공격했다. 단요가 장수 단란(段蘭)을 보내 항거하니 이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453
37. 모용황의 모용인, 단 선비 공략과 전연 (前燕)의 건국
모용황이 바다를 건너 모용인을 치려 하자 많은 신하들이 간언하며 ‘바닷길은 위태롭고 험하니 의당 뭍길(陸路)로 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모용황이 말했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얼지 않았는데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로 세 번이나 얼어붙었다. 옛날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얼어붙은 호타수(滹沱水)를 건너 대업을 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420
36. 모용황의 요동 경략
평주 요동국 양평현의 현령 왕빙(王冰), 장군 손기(孫機)가 요동(遼東)으로써 모용황에게 반기를 드니 동이교위(東夷校尉) 봉추(封抽), 호군(護軍) 을일(乙逸), 요동상(遼東相)* 한교(韓矯), 현도태수(玄菟太守) 고후(高詡) 등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이들은 모용황에게 돌아갔다. * 요동상(遼東相)은 요동국의 상相. 모용외가 요동공…
Name: 정길선  |  Date: 2017-05-22  |  Hit: 852
35. 모용인의 반란과 모용황의 토벌
333년 5월에 모용황이 요동공의 지위를 이었고 평북장군(平北將軍) 대행이자 평주자사(平州刺史)가 되어 부(部) 내부를 장악했다. 같은 해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가 그의 별부(別部) 일두귀(逸豆歸)에 의해 축출되어 도망치다가 객사했다. 이에 모용황은 일두귀의 행위를 용납하지 못한다고 하여 본격적으로 거병하였다. 모용황이 기병…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405
34. 모용외의 중원 공략과 모용황의 등장
배억(裴嶷)이 건업(建鄴)으로부터 돌아올 때 동진에서 사자를 보내 모용외를 감평주제군사(監平州諸軍事), 안북장군(安北將軍),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임명하고 식읍을 2천 호(戶) 늘려주었다. 321년에는 동진에서 모용외에 사신을 보내 사지절(使持節), 도독유주동이제군사(都督幽州東夷諸軍事), 거기장군(車騎將軍), 평주목(平州牧…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97
33. 고구려의 요동 침공과 모용외의 대응
모용외의 차남인 모용황(慕容皝)이 각 제후들과 귀족 자제들을 이끌고 속수(束脩)하여 수업(受業)하고 모용외가 정무를 보다 틈이 있으면 친히 유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이렇게 모용외가 다스리는 요동지역은 비교적 평안했으며 학문으로는 유학적인 부분을 받아들임으로써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강력한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433
32. 고구려의 미천왕과 모용외, 모용선비의 완전한 하북성 정착
309년, 고구려 미천왕은 장수를 보내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함락시키고, 315년에는 현도성(玄菟城)을 함락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七,「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五, <美川王> [본문]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중략)...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75
31. 모용외와 고구려의 격돌
고구려는 관구검의 침입 이후 동산(東山)에서 재기하여, 현도(玄菟) · 요동(遼東)을 다시 침략하였다. 무제 때에 소요수(小遼水)로 침입하여, 신성(新城)을 점령하였고, 또 대량수(大梁水)상류로 침입하여, 양맥(梁貊)을 통치하였다. 294년에 모용외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여, 신성(新城)을 포위하자, 신성(新城)의 재북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439
30. 모용선비와 부여의 전쟁
모용외는 우문선비를 공격하여 제압하기 위해 진나라에 사자를 보내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으나 진나라의 무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용외는 이에 분노하여 우문선비를 제압하고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낙양으로 향하는 지역인 요서(遼西)를 침입하여 여러 성들을 약탈하고 진나라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 그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49
29. 모용선비의 등장과 모용외 신화
위나라가 모용선비에게 요동을 내주었다는 것은 위나라 입장에서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고 고구려, 부여와의 전쟁을 통해 모용선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 그리고 모용선비를 동북지역의 방패막이로 삼아 고구려와 부여를 견제하는 것도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행위에 분노한 고구려는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면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58
28. 모용선비에 대해 종합적 연구 개요
모용선비는 고구려 역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5호 16국 시대에 세워진 선비 국가 중 가장 강한 국가는 탁발선비의 북위이지만 5호의 시대적 구분을 보았을 때 초기와 중기는 모용선비의 전연, 후연 시대, 후기는 탁발선비의 북위 시대로 구분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하북성, 산동성 지역에는 모용선비가 강력한 국가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38
27. 남량(南凉)의 멸망과 독발선비의 후예, 티베트로 이주하여 토번을 …
독발이녹고 사후, 독발녹단이 즉위하여 남량을 통치했다. 아버지는 독발사복건이고 독발오고(禿髮烏孤), 독발이녹고(禿髮利鹿孤)의 동생이다. 남량은 세습 없이 형제상속으로 제위를 이어갔다. 이것은 독발사복건이 독발녹단의 재능을 높이 사서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였고, 독발오고와 독발이녹고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형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416
26. 독발선비가 세운 남량(南凉)
독발선비는 걸복씨와 같이 중원 북서쪽, 하서(河西)지역에 근거했던 부족이었다. 이들은 원래 독발씨라고 하는 씨족으로 분류되었으나 점차 씨족민이 늘어가면서 부족으로 탈바꿈 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하서 양주(凉州)를 거점으로 하였으며 기존에 세력을 이루었던 걸복선비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중원의 혼란기 시대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0  |  Hit: 357
25. 걸복선비, 서진(西秦)의 멸망과 마무리
걸복치반의 뒤를 이은 걸복모말(乞伏暮末)은 즉위하자마자 북량의 침입을 받았다. 북량은 끊임없이 서진을 공격했으며 그것은 북쪽의 위협인 서진을 정복해야 북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북량의 침략으로 서진 정권은 영토를 조금씩 잃어갔고 농서 지역과 산서성에 쥐었던 패권마저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Name: 정길선  |  Date: 2017-05-19  |  Hit: 401
24. 걸복선비의 전성기, 걸복건귀, 걸복치반이 중국 서부 지역의 맹주가…
걸복건귀는 서성(西城)으로 천도하여 세력을 토욕혼 지역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저족이 세운 후량(後凉)이 존재했고 오히려 후량의 역습을 받아 대패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후량은 397년 금성(金城)을 함락시키고 서진의 동쪽 국경 지대를 유린했다. 그러나 이 때 패배로 인해 서진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이러한 세…
Name: 정길선  |  Date: 2017-05-19  |  Hit: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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