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년 백제에서 사절들이 북위에 들어와 국교(國交)를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의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저의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냅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신의 뜻을 전할 수 있다면, 비록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겠습니다.” ... (중략) .... “신과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게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쇠(釗, 고국원왕)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신의 조상 수(須, 근구수왕)가 병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였고, 잠시의 싸움에서 소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馮氏, 연나라)의 운수가 다하자, 그의 잔당들이 도망쳐온 이후로 고구려가 차츰 번성해, 드디어 백제가 업신여김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화가 이어진 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마음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지아비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 (중략) ... “지금 연(璉, 고구려 장수왕)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어육이 되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끊임이 없습니다. 죄악은 넘쳐나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써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馮族)의 병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싸움이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고 둔하지만 힘을 다하여 우리 병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간계를 꾸미는 일이 하나가 아니니, 겉으로는 외효(隗囂)*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하고 무모한 행동을 품고, 혹은 남쪽으로는 유씨(劉氏)*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과 맹약을 맺어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하여 폐하의 정책에 배반을 꾀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堯)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丹水)에서 묘를 벌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질다고 일컬었지만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한 방울의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빼앗지 아니한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庚辰)년(440년) 후에 우리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小石山)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ㆍ기물ㆍ안장ㆍ굴레를 얻어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분한 마음을 깊게 품었습니다. 옛날 송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 장왕(莊王)이 맨발로 걸었고*,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조그마한 변방의 소국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운을 모으고, 형세가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하십니까? 지금, 얻었던 말 안장 하나를 바쳐 실제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 외효(隗囂)는 중국 후한 초기 군웅이다.
* 유씨(劉氏)는 남조의 하나인 송(宋)나라로 추정된다.
* 연연(蠕蠕)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에 걸쳐 몽골 일대를 지배했던 유목민족으로 보인다.
* 요 임금이 단수에서 묘만(苗蠻)과 싸워 항복 받은 사실을 말한다.
* 맹상군이 조나라에 들렀을 때 조나라 사람이 그를 비웃으니 분노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1개 현을 멸하였다고 한 기록이『사기(史記)』에 서술되어 있다. ;『사기(史記)』, 卷 七十五,「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第 十五. [본문] 當我, 們到了該國, 孟嘗君, 趙, 趙國家的, 人嘲笑他,可能已經憤怒, 或縣一百殺, 了人都滅.
* 신주는 초나라 대부인데 제나라로 사신으로 가는 도중에 송에게 살해되었다. 이 말을 듣고 초장왕은 극도로 분노하여 맨발로 걸어 나왔고, 병사를 일으켜 송을 공격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百濟本紀」재인용.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二十五,「백제본기(百濟本紀)」, 第 三, <盖鹵王> [본문]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凉風微應, 伏惟皇帝陛下, 協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 弗斯侯長史餘禮, 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運, 遣進萬一之誠, 冀神祇垂感, 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중략)....又云, 臣與高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 輕廢鄰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須,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殫力竭, 轉自孱踧,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女, 執掃後宮, 幷遣子弟, 牧圉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중략)....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之期, 假手之秋也, 且馮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効畢力, 當率所統, 承風響應, 且高句麗不義, 逆詐非一, 外慕隗囂藩卑之辭,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蠕蠕, 共相脣齒,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嘗稱仁, 不捨塗詈, 涓流之水, 宜早壅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並得衣器鞍勒, 視之, 非高句麗之物, 後聞, 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雖未委當, 深懷憤恚, 昔宋戮申舟, 楚莊徒跣, 鷂撮放鳩, 信陵不食, 克敵立名, 美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况陛下合氣天地, 勢傾山海, 豈令小竪, 跨塞天逵, 今上所得鞍一以實驗.
효문제는 백제의 사신이 먼 곳에서 북위에 오느라 고생했다면서 예우를 후하게 하고 사신 소안(邵安)으로 하여금 그들을 함께 백제로 가게 하였다. 그러고는 고구려를 공격하는 부분에 있어 이를 거절하고 군사조차 빌려주지 않았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당시 강대한 국가였고 북위도 고구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단적인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분의 편지가 아마도 고구려에도 흘러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고구려에서 백제 개로왕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예상보다 빠르게 대응하였기 때문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二十五,「백제본기(百濟本紀)」, 第 三, <盖鹵王> [본문] 顯祖以其僻遠冒險朝獻, 禮遇尤厚, 遣使者邵安, 與其使俱還, 詔曰 ; 得表聞之, 無恙甚善, 卿在東隅, 處五服之外, 不遠山海, 歸誠魏闕, 欣嘉至意, 用戢于懷, 朕承萬世之業, 君臨四海, 統御群生, 今宇內淸一, 八表歸義, 襁負而至者, 不可稱數, 風俗之和, 士馬之盛, 皆餘禮等, 親所聞見, 卿與高句麗不穆, 屢致凌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讎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以具別旨. 又詔曰 ; 知, 高句麗阻疆, 侵軼卿土, 修先君之舊怨, 棄息民之大德, 兵交累載, 難結荒邊, 使兼申胥之誠, 國有楚越之急, 乃應展義扶微, 乘機電擧, 但以高句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 雖有自昔之釁, 於國, 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會, 理亦未周, 故往年遣禮等至平壤, 欲驗其由狀, 然高句麗奏請頻煩, 辭理俱詣, 行人不能抑其請, 司法無以成其責, 故聽其所啓, 詔禮等還, 若今復違旨, 則過咎益露, 後雖自陳, 無所逃罪, 然後興師討之, 於義爲得, 九夷之國, 世居海外, 道暢則奉藩, 惠戢則保境, 故覊縻著於前典, 楛貢曠於歲時, 卿備陳彊弱之形, 具列往代之迹, 俗殊事異 擬况乖衷, 洪規大略, 其致猶在, 今中夏平一, 宇內無虞, 每欲陵威東極, 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遠服, 良由, 高句麗卽叙, 未及卜征, 今若不從詔旨, 則卿之來謀, 載協朕意, 元戎啓行, 將不云遠, 便可豫率同興, 具以待事 時遣報使, 速究彼情, 師擧之日, 卿爲鄕導之首 大捷之後, 又受元功之賞, 不亦善乎,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幅, 又詔璉護送安等, 安等至高句麗, 璉稱昔與餘慶,有讎, 不令東過, 安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後使安等, 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王以麗人屢犯邊鄙, 上表乞師於魏, 不從, 王怨之, 遂絶朝貢.
475년 고구려의 장수태왕은 백제 개로왕의 죄를 물어 원정군을 일으켜 백제의 수도을 한성을 공격했다. 그리고 한성을 쉽게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고는 백제가 영유하고 있던 한수 유역의 영토를 모두 유린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해 476년에 북위에 사신을 보내 이러한 사실을 통보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二十五,「백제본기(百濟本紀)」, 第 三, <盖鹵王> [본문] 二十一年, 秋九月, 麗王巨璉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王閉城門不能出戰, 麗人分兵爲四道, 夾攻, 又乘風縱火, 焚燒城門, 人心危懼, 或有欲出降者, 王窘不知所圖, 領數十騎, 出門西走, 麗人追而害之.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長壽王> [본문] 六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백제 개로왕
고구려, 백제가 다스리던 당시 동북아시아
KBS 다큐맨터리 한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 장수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