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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s.jpg  정길선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산책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7     조회 : 496  

을불혼을 축출한 풍태후는 4년간 대리통치 하였다. 466년 풍태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실의 공주와 헌문제와의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수태왕은 이에 대해 “공주가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장녀와 혼인을 성사하도록 하겠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북위의 풍태후는 이를 인정하여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상서(尙書) 이부(李敷) 등을 국경으로 파견하여 폐백을 보내왔다. 그러자 고구려의 대사자 고불(高拂)은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위나라가 이전에 연나라와 혼인한 후 얼마 안 되어 연나라를 쳤으니, 이는 사신들이 지리적 상황을 상세히 알게 된 때문입니다. 지난 일을 통해 이러한 교훈을 얻었으니, 적당한 방법으로 거절해야 합니다.”


이를 받아들인 장수태왕은 북위에 다시 편지를 보내 아우의 장녀가 죽었다고 하자 북위의 풍태후는 몹시 노하여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장수태왕에게 다른 종실의 여자라도 보내 달라 하였다. 그러나 장수태왕은 이를 차일피일 미루었다.* 이후 장수태왕은 이전보다 더 빈번하게 사신왕래를 하여 양국 간의 교류를 활성화하였는데 이것은 장수태왕의 다른 정치적인 포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長壽王> [본문] 五十四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魏文明太后, 以顯祖六宮未備, 敎王令薦其女, 王奉表云, 女已出嫁, 求以弟女應之, 許焉, 乃遣安樂王眞尙書李敷等, 至境送幣, 或勸王曰, 魏昔與燕婚姻, 旣而伐之, 由行人具知其夷險故也, 殷鑑不遠, 宜以方便辭之, 王遂上書, 稱女死, 魏疑其矯詐, 又遣假散騎常侍程駿, 切責之, 若女審死者, 聽更選宗淑, 王云, 若天子恕其前愆, 謹當奉詔, 會, 顯祖崩, 乃止.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는 장수왕 55년,(467년)부터 장수왕 58년,(470년)까지 매년 사신을 왕래한 것으로 기록이 있다. ; 五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중략)...五十六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중략)...五十七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중략)...五十八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이러한 상황에서 풍태후가 권력을 헌문제에게 양도함으로써 비로소 헌문제는 469년에 친정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태자를 풍태후의 아들인 탁발굉(拓跋宏)으로 올렸다. 이 시기에 앞서 서술했던 구품중정제가 확실한 틀을 잡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추천관료가 늘어나 후일 효문제(孝文帝)가 치세를 이룩할 때 기본적 바탕이 되었다. 471년에는 헌문제는 태자인 탁발굉에게 양위하고 스스로를 태상황제라 하여 북명궁(北鳴宮)에 거처했다.*


*『위서(魏書)』, 卷 七,「賀狄干傳」, 第 六 [본문] 帝雅薄時務,常有遺世之心,欲禪位於叔父京兆王子推,語在任城王雲傳,羣臣固請,帝乃止。丙午,冊命太子曰:「昔堯舜之禪天下也,皆由其子不肖。若丹朱、商均能負荷者,豈搜揚仄陋而授之哉?爾雖沖弱,有君人之表,必能恢隆王道,以濟兆民。今使太保、建安王陸馛,太尉源賀持節奉皇帝璽綬,致位於爾躬。其踐昇帝位,克廣洪業,以光祖宗之烈,使朕優遊履道,頤神養性,可不善歟?」丁未,詔曰:「朕承洪業,運屬太平,淮岱率從,四海清晏。是以希心玄古,志存澹泊。躬覽萬務,則損頤神之和;一日或曠,政有淹滯之失。但子有天下,歸尊於父;父有天下,傳之於子。今稽協靈運,考會羣心,爰命儲宮,踐昇大位。朕方優遊恭己,栖心浩然,社稷乂安,克廣其業,不亦善乎?百官有司,其祗奉胤子,以答天休。宣布宇內,咸使聞悉。」於是羣公奏曰:「昔三皇之世,澹泊無為,故稱皇。是以漢高祖,既稱皇帝,尊其父為太上皇,明不統天下。今皇帝幼沖,萬機大政,猶宜陛下總之。謹上尊號太上皇帝。」乃從之。


탁발굉이 황제가 되어 후일 효문제(孝文帝)라 하였다. 본 단락에서는 효문제로 서술하기로 한다. 효문제는 황제가 되자마자 어머니인 풍태후의 섭정을 받았다. 풍태후는 당대 여성 중에서 최고의 지식인이었고 유학을 심취하였으며 신하들과 담론을 즐겼을 정도로 영걸이었다. 이러한 풍태후의 영향 때문에 효문제는 유교적인 예법을 채용하고, 균전제을 시행하면서 삼장제(三長制)*를 확립했다. 같은 해, 민노구(民奴久)등이 고구려에 죄를 짓고 북위에 도망가서 항복하였다. 위나라는 그들에게 각각 토지와 저택을 주었다.* 이에 장수태왕은 노하여 민노구 등의 일족들에 대한 인도를 요구했으나 북위에서는 이들을 이민족을 받아들이는 차원을 설명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강한 고구려의 요구로 인해 민노구(民奴久)등의 무리를 고구려에 다시 돌려보내자 장수태왕이 이들을 모두 참수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 삼장제는『주례(周禮)』의 제도에 의거하여 5가(家)를 1린(隣)이라 하여 인장(隣長)을, 5린을 1리(里)라 하여 이장(里長)을, 5리를 1당(黨)이라 하여 당장(黨長)을 두었는데, 인장·이장·당장의 3장을 가리킨다. 3장의 임무는 호적조사, 세금징수 등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기 전에는 호적제도가 완비되지 못하여, 백성이 호족(豪族)의 그늘에 숨어 30호·50호를 1호라고 속이는 등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을 국가의 직접지배 아래 두기 위하여, 삼장제를 실시하여 호적조사를 철저히 하였다. 백성의 연령·사망 등에 따라 토지를 수여·반환하게 하는 균전제(均田制)는, 이것을 기초로 한 것이다. 북위의 후기에는 5가를 비린(比隣), 20가를 여(閭), 100가를 당족(黨族)이라 하고, 북제(北齊)에서는 10가를 비린, 50가를 여리(閭里), 100가를 족당(族黨)이라 하였다. 그뒤 2장제로 바뀌었다가 589년 수(隋)나라 때 폐지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長壽王> [본문] 五十九年, 秋九月, 民奴久等奔降於魏, 各賜田宅, 是魏高祖延興元年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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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북위풍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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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문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문제는 북위의 수도를 대동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북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중국 역사상 다섯 손가락에 안에 항상 들어가는 명군이다.

사진은 대동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을 그린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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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황제 헌문제의 능, 헌문제는 풍태후에 눌려 제대로 정치 한 번 해보지 못했다.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472년 백제에서 사절들이 북위에 들어와 국교(國交)를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11
64.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을불혼을 축출한 풍태후는 4년간 대리통치 하였다. 466년 풍태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실의 공주와 헌문제와의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수태왕은 이에 대해 “공주가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장녀와 혼인을 성사하도록 하겠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북위의 풍태후는 이를 인정하여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97
63.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즉위 후에는 백성들이 영토를 개간하여 살 수 있도록 몇몇 황무지에 백성들을 이동시켰고 산지도 개간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했다. 그리고 승려인 사문(沙門)의 담요(曇曜)에게 명하여 운강석굴(雲崗石窟)*을 축조하게 하였다.* 정치는 유학적인 부분을 많이 인용하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00
62.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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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북위 태무제의 정복 전쟁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宋)나라와 자주 전쟁하여 하남성(河南省)을 함락했다. 그리고 강대국인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 보게 되자 고구려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은 사신이 서로 왕래했고 상인들은 고구려와 북위의 영토에서 주로 교역하여 양국의 문물이 서로의 국가에 전파되었다.* * 명원제 시기에는 사신이 왕래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6  |  Hit: 409
60. 탁발규의 평성(平城) 천도와 북위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평성에 수도를 옮기자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이동시켰다. 탁발규는 각 출신과 국가, 민족등을 따지지 않고 명족(名族)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79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67
58. 전진의 부견이 탁발선비를 복속시키고 동진(東晉)과의 비수대전에…
북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 북위 시조 탁발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발규는 대나라 왕족이자 전체적인 탁발선비의 중원 정착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북위의 대표적 군주로 도무제(道武帝-탁발규)와 효문제(孝文帝)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제의 시작이 선비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98
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45
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52
55.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539
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탁발선비는 모용선비와 더불어 한민족과 관계 뚜렷한 선비의 씨족이다. 그리고 중원의 5호 16국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하여 남북조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인 북위(北魏)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모용선비가 한창 강성할 때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晋)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왕으로 봉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35
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65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22
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1123
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615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849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38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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