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라가 이전에 연나라와 혼인한 후 얼마 안 되어 연나라를 쳤으니, 이는 사신들이 지리적 상황을 상세히 알게 된 때문입니다. 지난 일을 통해 이러한 교훈을 얻었으니, 적당한 방법으로 거절해야 합니다.”
이를 받아들인 장수태왕은 북위에 다시 편지를 보내 아우의 장녀가 죽었다고 하자 북위의 풍태후는 몹시 노하여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장수태왕에게 다른 종실의 여자라도 보내 달라 하였다. 그러나 장수태왕은 이를 차일피일 미루었다.* 이후 장수태왕은 이전보다 더 빈번하게 사신왕래를 하여 양국 간의 교류를 활성화하였는데 이것은 장수태왕의 다른 정치적인 포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長壽王> [본문] 五十四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魏文明太后, 以顯祖六宮未備, 敎王令薦其女, 王奉表云, 女已出嫁, 求以弟女應之, 許焉, 乃遣安樂王眞尙書李敷等, 至境送幣, 或勸王曰, 魏昔與燕婚姻, 旣而伐之, 由行人具知其夷險故也, 殷鑑不遠, 宜以方便辭之, 王遂上書, 稱女死, 魏疑其矯詐, 又遣假散騎常侍程駿, 切責之, 若女審死者, 聽更選宗淑, 王云, 若天子恕其前愆, 謹當奉詔, 會, 顯祖崩, 乃止.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는 장수왕 55년,(467년)부터 장수왕 58년,(470년)까지 매년 사신을 왕래한 것으로 기록이 있다. ; 五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중략)...五十六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중략)...五十七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중략)...五十八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이러한 상황에서 풍태후가 권력을 헌문제에게 양도함으로써 비로소 헌문제는 469년에 친정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태자를 풍태후의 아들인 탁발굉(拓跋宏)으로 올렸다. 이 시기에 앞서 서술했던 구품중정제가 확실한 틀을 잡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추천관료가 늘어나 후일 효문제(孝文帝)가 치세를 이룩할 때 기본적 바탕이 되었다. 471년에는 헌문제는 태자인 탁발굉에게 양위하고 스스로를 태상황제라 하여 북명궁(北鳴宮)에 거처했다.*
*『위서(魏書)』, 卷 七,「賀狄干傳」, 第 六 [본문] 帝雅薄時務,常有遺世之心,欲禪位於叔父京兆王子推,語在任城王雲傳,羣臣固請,帝乃止。丙午,冊命太子曰:「昔堯舜之禪天下也,皆由其子不肖。若丹朱、商均能負荷者,豈搜揚仄陋而授之哉?爾雖沖弱,有君人之表,必能恢隆王道,以濟兆民。今使太保、建安王陸馛,太尉源賀持節奉皇帝璽綬,致位於爾躬。其踐昇帝位,克廣洪業,以光祖宗之烈,使朕優遊履道,頤神養性,可不善歟?」丁未,詔曰:「朕承洪業,運屬太平,淮岱率從,四海清晏。是以希心玄古,志存澹泊。躬覽萬務,則損頤神之和;一日或曠,政有淹滯之失。但子有天下,歸尊於父;父有天下,傳之於子。今稽協靈運,考會羣心,爰命儲宮,踐昇大位。朕方優遊恭己,栖心浩然,社稷乂安,克廣其業,不亦善乎?百官有司,其祗奉胤子,以答天休。宣布宇內,咸使聞悉。」於是羣公奏曰:「昔三皇之世,澹泊無為,故稱皇。是以漢高祖,既稱皇帝,尊其父為太上皇,明不統天下。今皇帝幼沖,萬機大政,猶宜陛下總之。謹上尊號太上皇帝。」乃從之。
탁발굉이 황제가 되어 후일 효문제(孝文帝)라 하였다. 본 단락에서는 효문제로 서술하기로 한다. 효문제는 황제가 되자마자 어머니인 풍태후의 섭정을 받았다. 풍태후는 당대 여성 중에서 최고의 지식인이었고 유학을 심취하였으며 신하들과 담론을 즐겼을 정도로 영걸이었다. 이러한 풍태후의 영향 때문에 효문제는 유교적인 예법을 채용하고, 균전제을 시행하면서 삼장제(三長制)*를 확립했다. 같은 해, 민노구(民奴久)등이 고구려에 죄를 짓고 북위에 도망가서 항복하였다. 위나라는 그들에게 각각 토지와 저택을 주었다.* 이에 장수태왕은 노하여 민노구 등의 일족들에 대한 인도를 요구했으나 북위에서는 이들을 이민족을 받아들이는 차원을 설명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강한 고구려의 요구로 인해 민노구(民奴久)등의 무리를 고구려에 다시 돌려보내자 장수태왕이 이들을 모두 참수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 삼장제는『주례(周禮)』의 제도에 의거하여 5가(家)를 1린(隣)이라 하여 인장(隣長)을, 5린을 1리(里)라 하여 이장(里長)을, 5리를 1당(黨)이라 하여 당장(黨長)을 두었는데, 인장·이장·당장의 3장을 가리킨다. 3장의 임무는 호적조사, 세금징수 등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기 전에는 호적제도가 완비되지 못하여, 백성이 호족(豪族)의 그늘에 숨어 30호·50호를 1호라고 속이는 등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을 국가의 직접지배 아래 두기 위하여, 삼장제를 실시하여 호적조사를 철저히 하였다. 백성의 연령·사망 등에 따라 토지를 수여·반환하게 하는 균전제(均田制)는, 이것을 기초로 한 것이다. 북위의 후기에는 5가를 비린(比隣), 20가를 여(閭), 100가를 당족(黨族)이라 하고, 북제(北齊)에서는 10가를 비린, 50가를 여리(閭里), 100가를 족당(族黨)이라 하였다. 그뒤 2장제로 바뀌었다가 589년 수(隋)나라 때 폐지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長壽王> [본문] 五十九年, 秋九月, 民奴久等奔降於魏, 各賜田宅, 是魏高祖延興元年也.
중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북위풍태후"
헌문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문제는 북위의 수도를 대동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북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중국 역사상 다섯 손가락에 안에 항상 들어가는 명군이다.
사진은 대동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을 그린 벽화
북위 황제 헌문제의 능, 헌문제는 풍태후에 눌려 제대로 정치 한 번 해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