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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s.jpg  정길선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산책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7     조회 : 399  

즉위 후에는 백성들이 영토를 개간하여 살 수 있도록 몇몇 황무지에 백성들을 이동시켰고 산지도 개간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했다. 그리고 승려인 사문(沙門)의 담요(曇曜)에게 명하여 운강석굴(雲崗石窟)*을 축조하게 하였다.* 정치는 유학적인 부분을 많이 인용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불교를 장려하여 북위의 영내에 12개의 사찰을 추가로 짓게 하였다. 또, 담요의 상주에 의해 승려기호나 불도호를 마련하여 북위 시기에 일반 백성들에게 불교문화가 융성하게 하였다.


* 운강석굴(雲崗石窟)은 중국 산서성에 위치한 석굴 사원으로, 북위 시대(460~534)에 조성되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유적이며, 북위 초기 다섯 황제를 나타낸다는 거대한 불상을 통하여 불교가 정치에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위의 낙양 천도 뒤 농만에 석굴 사원이 건립되었다. 중국 전래의 양식에 중앙아시아 양식이 가미되어 소박함과 서방의 분위기가 함께 섞여 있으며, 한국 전통적 불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담요5굴이라고 말해지는 거대한 불상 중, 최대의 제20굴의 불상은 도무제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 여겨져 이하, 명원제 · 태무제 · 경목제 · 문성제의 모습을 본떴다고 여겨진다.


주변 국가들하고의 외교도 강화하여 고구려와의 사신왕래로 유대관계를 돈독하게 하였고 남조의 송나라와도 교역이 성행하여 남조와 북조가 만나는 양자강 유역은 문화 교류의 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456년에 장남인 탁발홍(拓跋弘)이 태자로 책봉되었고 465년에 문성제가 죽자 태자인 탁발홍(拓跋弘)이 황제로 즉위했다. 탁발홍은 후에 헌문제(献文帝)로 불리며 본 단락에서는 헌문제로 서술하기로 한다.당시 시중(侍中)・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이었던 을불혼은 헌문제가 즉위한 후 권력을 잡았다. 을불혼은 조서를 위조하여 상서(尙書) 양보평(楊保平)・평양공(平陽公) 가애인(賈愛仁)・남양공(南陽公) 장천도(張天度) 등 많은 관료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숙청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헌문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배경 세력이 없었다는 것도 되지만 무엇보다도 권신(權臣)의 등장은 어린 황제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게다가 울블혼은 문성제의 깊은 신임을 받았던 고위 관료였다. 선제(先帝)의 신임까지 받았던 권신을 헌문제가 제거하기에는 매우 어려웠을거라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기록에는 장수왕 50년, (462년)과 장수왕 52년, (464년) 두 차례 사신 왕래의 기록이 있다. ; 五十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중략)... 五十二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울블혼의 권력 장악은 매우 빠르고 신속했다. 외부의 군사권까지 장악하면 북위는 헌문제가 당분간 버티고 있더라도 울블혼이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황위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울블혼에게는 시중 겸 사도(司徒)로 있던 평원왕(平原王) 보륙고려(步六孤麗)가 가장 두려운 존재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울블혼은 보륙고려를 소환하여 죽이고 그의 군대를 흡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도성의 상황을 안 보륙고려가 소환을 거부했고 울블혼은 보륙고려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도성의 친위대와 수비대를 동원했다. 그러면서 울블혼은 보륙고려에게 도성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권고했던 사위감(司衛監) 구목릉다후(丘穆陵多侯)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 때, 전중상서(殿中尙書)인 순양공(順陽公) 탁발욱(拓跋郁)이 울블혼을 죽일 것을 도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 때문에 울블혼이 보륙고려를 공격하는 계획이 철회되었다.

 

울블혼은 탁발욱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역적을 소탕한 공으로 태위(太尉) ・ 녹상서사(錄尙書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거기대장군으로써 도성의 수비군을 완전히 장악했고 섭정의 지위는 아니었지만, 사실상의 섭정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는 승상(丞相)의 자리에 올라 태원왕(太原王)에 봉해졌다. 을불혼의 지위는 여러 왕들보다 상급의 지위에 있게 되었으며, 국가의 대소사는 모두 을불혼이 있는 태원왕의 왕부에서 결정되었다. 466년, 을불혼은 조정의 전권을 독점하면서 신하들을 죽이는 일이 많아졌다. 그것은 을불혼이 정당한 권력 승계가 아닌 부정적인 권력 승계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대 왕조의 권력가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을불혼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을불혼의 전횡은 북위 황실의 대대적인 반발을 일으켜 문성제의 황후였던 풍태후(馮太后)가 을불혼의 세력들을 뒤엎고 북위 황족의 위신을 찾으려 하였다.


을불혼은 이러한 부정하게 축적했던 권력을 안전하게 도모하기 위해서 당시 이조(吏曹)의 업무를 맡고 있던 안원장군(安遠將軍) 가수(賈秀)에게 여러 차례 자신의 처를 공주로 책봉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본연이 가장 안정되게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황실의 인척이 되는 것이었고 이것은 을불혼 입장에서는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풍태후는 이러한 을불혼의 속셈을 알아채고 가수에게 이를 거부하게 하였다. 이에 격분한 을불혼은 가수가 인색하다고 비난하였고, 급기야 가수를 죽이려고 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太宗明皇帝, 泰始四年, 顯祖時年十二,侍中、車騎大將軍乙渾專權,矯詔殺尚書楊保年、平陽公賈愛仁、南陽公張天度於禁中。侍中、司徒、平原王陸麗治疾於代郡溫泉,乙渾使司衛監穆多侯召之。多侯謂麗曰:“渾有無君之心。今宮車晏駕,王德望素重,奸臣所忌,宜少淹留以觀之;朝廷安靜,然後入,未晚也。”麗曰:“安有聞君父之喪,慮患而不赴者乎!”即馳赴平城。乙渾所為多不法,麗數爭之。戊申,渾又殺麗及穆多侯。多侯,壽之弟也。己酉,魏以渾為太尉、錄尚書事,東安王劉尼為司徒,尚書左僕射代人和其奴為司空。殿中尚書順陽公鬱謀誅乙渾,渾殺之。 …… 秋,七月,癸巳,魏以太尉乙渾為丞相,位居諸王上;事無大小,皆決於渾.)


그러나 을불혼에게 이러한 사태는 이미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북위 황실의 황족들은 을불혼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고 있는 가운데 시중 탁발비(拓跋丕)가 을불혼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고 황실에 보고하였다. 그러자 풍태후가 보륙고려에게 군사를 일으켜 성 밖에 진주하게 하고 내부 수비병들을 이용하여 을불혼의 식솔들을 잡아 가두고 그를 주살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太宗明皇帝, 泰始四年, 卷一百三十一:魏丞相太原王乙渾專制朝權,多所誅殺。安遠將軍賈秀掌吏曹事,渾屢言於秀,為其妻求稱公主,秀曰:“公主豈庶姓所宜稱!秀寧取死今日,不可取笑後世!”渾怒,罵曰:“老奴官,慳!”會侍中拓跋丕告渾謀反,庚申,馮太后收渾,誅之。秀,彝之子;丕,烈帝之玄孫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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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성 대동시에 있는 북위 시대 불교 유적 운강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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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에 나타난 풍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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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시대의 낙양성 지도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472년 백제에서 사절들이 북위에 들어와 국교(國交)를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11
64.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을불혼을 축출한 풍태후는 4년간 대리통치 하였다. 466년 풍태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실의 공주와 헌문제와의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수태왕은 이에 대해 “공주가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장녀와 혼인을 성사하도록 하겠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북위의 풍태후는 이를 인정하여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96
63.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즉위 후에는 백성들이 영토를 개간하여 살 수 있도록 몇몇 황무지에 백성들을 이동시켰고 산지도 개간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했다. 그리고 승려인 사문(沙門)의 담요(曇曜)에게 명하여 운강석굴(雲崗石窟)*을 축조하게 하였다.* 정치는 유학적인 부분을 많이 인용하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00
62.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27
61. 북위 태무제의 정복 전쟁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宋)나라와 자주 전쟁하여 하남성(河南省)을 함락했다. 그리고 강대국인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 보게 되자 고구려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은 사신이 서로 왕래했고 상인들은 고구려와 북위의 영토에서 주로 교역하여 양국의 문물이 서로의 국가에 전파되었다.* * 명원제 시기에는 사신이 왕래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6  |  Hit: 409
60. 탁발규의 평성(平城) 천도와 북위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평성에 수도를 옮기자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이동시켰다. 탁발규는 각 출신과 국가, 민족등을 따지지 않고 명족(名族)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78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67
58. 전진의 부견이 탁발선비를 복속시키고 동진(東晉)과의 비수대전에…
북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 북위 시조 탁발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발규는 대나라 왕족이자 전체적인 탁발선비의 중원 정착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북위의 대표적 군주로 도무제(道武帝-탁발규)와 효문제(孝文帝)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제의 시작이 선비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98
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45
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52
55.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538
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탁발선비는 모용선비와 더불어 한민족과 관계 뚜렷한 선비의 씨족이다. 그리고 중원의 5호 16국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하여 남북조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인 북위(北魏)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모용선비가 한창 강성할 때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晋)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왕으로 봉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35
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64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21
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1123
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615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849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6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38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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