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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s.jpg  정길선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산책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7     조회 : 427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분개한 태무제는 북량을 공격해, 439년 9월에 저거목건의 항복을 받아내었고 북량은 멸망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元嘉十三年, 河西王牧犍通於其嫂李氏,兄弟三人傳嬖之。李氏與牧犍之姊共毒魏公主,魏主遣解毒醫乘傳救之,得愈。魏主征李氏,牧犍不遣,厚資給,使居酒泉。魏每遣使者詣西域,常詔牧犍發導護送出流沙.)


*『북사(北史)』, 卷二,「魏本紀」, 第二. [본문] 九月丙戌,牧犍與左右文武五千人面縛軍門,帝解其縛,待以藩臣之禮。收其城內戶口二十餘萬,倉庫珍寶不可稱計.


저거목건은 북위로 끌려온 뒤로도 북위 황족에 준하는 대우로서 중용되었으나, 북위 황실 환관의 밀고로 저거목건이 항복 전에 고장에서 보물을 몰래 빼돌린 것이 알려져서 태무제는 저거목건의 여동생, 우소의를 포함한 모든 일족을 사사토록 했다. 이렇게 저거씨는 멸족되었고 북량의 일족들은 모두 참살되었다. 439년 북량 멸망을 끝으로 화북을 통일하였다. 서역에서 조공을 바쳐오는 나라만 해도 20여개국에 이르니 북위의 국세는 강력하였고 화북 지방의 최대의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元嘉十三年, 有司索牧犍家,得所匿物;魏主大怒,賜沮渠昭儀死,幷誅其宗族,唯沮渠祖以先降得免。又有告牧犍猶與故臣民交通謀反者,三月,魏主遣崔浩就第賜牧犍死,諡曰哀王.)


태무제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또한 남조 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회남(淮南)과 강북(江北)을 함락했다.* 이 때 도사 구겸지(寇謙之)가 도교교단을 확립하고, 한인 관료 최호(崔號)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폐불(廢佛)을 단행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 선비의 한인동화와 도시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북위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최호가 태무제의 신임을 얻으면서 한인 관료들을 다수적으로 등용하기 시작한 것에 비롯되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선비의 귀족들에게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것은 일단 강제적인 한족화가 원인이었고 선비의 귀족 자제들의 등용문이 좁아지면서 선비의 귀족들의 설 자리가 점점 사라졌던 것이 주 원인이었다. 결국 450년 종애(宗愛)를 필두로 한 선비의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최호를 죽이고 다수의 한인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태무제도 452년 종애(宗愛)에 의해 시해되었다. 이후 4대 문성제(文成帝)의 황후이자 5대 헌문제(獻文帝)의 적모(嫡母)로 문명태후가 혼란을 수습하여 겨우 북위를 안정시키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변란과 혼란을 막기 위하여 모사자귀제도(母死子貴諸度)*를 장착하게 되는데 이것은 외척의 내정간섭을 막기 위해 실시한 제도였다. 결국 외척들의 내정간섭을 막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그러한 외척들 대부분이 선비족인 것을 감안할 때 부족들의 분열도 조장하는 부분이 있어 선무제(宣武帝) 이후에 폐지되었다.


*『북사(北史)』, 卷二,「魏本紀」, 第二. [본문] 始晉元熙二年武帝裕受禪,至昇明三年禪於蕭道成。舉凡國力、疆域、武功皆南朝最盛者。初,北境抵關中、河南,末年仍有淮泗諸郡。其厲行土斷,廢僑州郡,乃和合傖吳之舉也。宋室出身寒門,亦知用人唯材,開南朝寒門掌機要之始。元嘉間,文帝經營,亦成治世。元嘉末,文帝見弒,宋室內亂不止,終為蕭氏所乘。歷五十九年,傳九帝。


* 중국불교사에서는 4번의 큰 폐불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삼무일종의 법난(三武一宗의 法難) 또는 삼무일종의 폐불(三武一宗의 廢佛)이라고 부른다. 삼무(三武)는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 재위 423~452),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재위 560~578), 당(唐)의 무종(武宗: 재위 840~846)을 가리키고, 일종(一宗)은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재위 954~959)을 가리킨다. 폐불을 단행하게 된 이유로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유 · 불 · 도 3교, 특히 불교와 도교 양교의 대립항쟁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립을 이용하여 그것을 결정적인 단계로까지 이끌어간 것은 역시 정치적 · 경제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당시의 지배자는 폐불을 단행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교단 쪽에도 폐불을 유발할 만한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 세금과 노역(勞役)을 피하기 위하여 출가한 방대한 인구는 이를 감당해야 할 정부의 재정을 위협하였고 또 그들의 타락과 비행이 아주 심했던 것이 그러한 조건이었다.


* 모사자귀제도(母死子貴諸度)는 후궁에게서 아이를 얻으면 생모를 죽이고, 아이는 따로 키우는 것을 말한다.


452년 그 해 황후의 영으로, 황족인 동평림왕 탁발한(東平林王 拓跋翰)이 갑자기 살해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문헌 사료가 현재 남아있지 않아서 자세하게 서술할 수 없지만 태무제의 후궁인 초방 서씨(椒房 舒氏) 셋째 황자였던 탁발한이 살해된 것을 추정한다면 반역을 꾀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태무제를 살해했던 종애와 이에 관해 정황상, 가장 가능성이 높은 부분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종애가 태무제를 살해하고 이러한 죄를 탁발한에게 씌웠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여러 추정이 가능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종애는, 문성제(文成帝)의 계부인 남안왕 탁발여(南安王 拓跋余)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리고 종애와 태무제의 황후 영은 공동으로 섭정에 나서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탁발여는 종애를 주살하고 친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종애가 탁발여를 먼저 주살하고 스스로 황위에 오르려 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동림낭중 유니(劉尼)와 전중상서 원하(源賀)가 종애를 공격해 종애를 죽이고 탁발황(拓跋晃)의 장남 탁발준(拓跋濬)을 옹립했다. 탁발준은 후에 문성제(文成帝)로 불리며 본 단락에서는 문성제로 서술하기로 한다. ( 魏書/列傳 凡九十二卷/卷十三 皇后列傳第一/曰: 文成元皇后李氏……及生顯祖,拜貴人。太安二年,太后令依故事,令后具條記在南兄弟及引所結宗兄洪之,悉以付託。臨訣,每一稱兄弟,輒拊胸慟泣,遂薨。後諡曰元皇后,葬金陵,配饗太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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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는 북량을 멸하고 화북을 통일하여 북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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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 속의 권신 종애(宗愛)와 태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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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석굴 내부의 문성제(文成帝)를 닮은 불상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472년 백제에서 사절들이 북위에 들어와 국교(國交)를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11
64.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을불혼을 축출한 풍태후는 4년간 대리통치 하였다. 466년 풍태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실의 공주와 헌문제와의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수태왕은 이에 대해 “공주가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장녀와 혼인을 성사하도록 하겠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북위의 풍태후는 이를 인정하여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97
63.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즉위 후에는 백성들이 영토를 개간하여 살 수 있도록 몇몇 황무지에 백성들을 이동시켰고 산지도 개간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했다. 그리고 승려인 사문(沙門)의 담요(曇曜)에게 명하여 운강석굴(雲崗石窟)*을 축조하게 하였다.* 정치는 유학적인 부분을 많이 인용하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00
62.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28
61. 북위 태무제의 정복 전쟁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宋)나라와 자주 전쟁하여 하남성(河南省)을 함락했다. 그리고 강대국인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 보게 되자 고구려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은 사신이 서로 왕래했고 상인들은 고구려와 북위의 영토에서 주로 교역하여 양국의 문물이 서로의 국가에 전파되었다.* * 명원제 시기에는 사신이 왕래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6  |  Hit: 410
60. 탁발규의 평성(平城) 천도와 북위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평성에 수도를 옮기자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이동시켰다. 탁발규는 각 출신과 국가, 민족등을 따지지 않고 명족(名族)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79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67
58. 전진의 부견이 탁발선비를 복속시키고 동진(東晉)과의 비수대전에…
북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 북위 시조 탁발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발규는 대나라 왕족이자 전체적인 탁발선비의 중원 정착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북위의 대표적 군주로 도무제(道武帝-탁발규)와 효문제(孝文帝)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제의 시작이 선비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98
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45
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52
55.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539
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탁발선비는 모용선비와 더불어 한민족과 관계 뚜렷한 선비의 씨족이다. 그리고 중원의 5호 16국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하여 남북조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인 북위(北魏)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모용선비가 한창 강성할 때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晋)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왕으로 봉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35
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65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22
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1123
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615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849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38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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